모욕 없는 사회가 곧 ‘품위 있는 사회’다

아비샤이 마갈릿소병철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박영서 기자

박영서 기자

사회적 약자들은 삶의 곳곳에서 크고 작은 모욕을 겪는다.
이런 일상적 굴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스라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1939∼)은 그 답을 ‘품위 있는 사회’에서 찾는다.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그는 공정한 분배에 앞서 ‘인간 존엄의 수호’를 사회의 최우선 가치로 제시한다.
이를 통해 빈곤과 실업, 소수자 차별, 사생활 침해, 그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보지 않는 ‘도덕적 인간맹(盲)’에 맞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고 보았다.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론을 열 가지 키워드로 해설한다.
마갈릿의 비전이 존 롤스의 정의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보완하는지, 한 사회가 ‘품위 없는 사회’임을 보여주는 ‘모욕’의 대표적 징후로는 무엇이 있는지, 인간에 대한 모욕은 왜 윤리적 잘못이 아니라 도덕적 잘못에 속하는지 등을 차근차근 짚어낸다.
단순한 이상론에 머물지 않고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제도적 모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우리가 외면해 온 현실을 드러낸다.
책은 마갈릿의 한계도 지적한다.
그가 ‘사람의’ 모욕보다 ‘제도의’ 모욕에만 중점을 맞춤으로써 모욕이 제도의 소행만 아니면 괜찮다는 듯한 면책적 논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책은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의 이론을 보완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한다.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좋은 사회는 단순히 잘 나누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사회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공정성의 언어는 넘쳐나지만 존엄의 감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제도와 태도를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모욕을 줄이고 존중을 늘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출발점일지 모른다.

 AI 알고리즘 쇼크

포연이 걷히자 전쟁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미군의 정밀 타격은 메스로 도려내듯 날카로웠다.
전쟁 한 달 동안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비롯한 주요 지도자 250여 명이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치밀한 계산의 결과였다.
전 세계는 인공지능(AI)이 설계하고 진행한 이란 전쟁에 놀랐다.
군사 전문가들은 이 전쟁을 "AI가 주도한 첫 전쟁"이라고 입을 모은다.
 AI는 기존의 전쟁 문법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과거의 승패가 병력과 화력에 달려 있었다면, 이젠 데이터 처리 속도가 전장을 지배한다.
미군은 최근 이란 공습 작전에서 팔란티어의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을 활용해 단 하루 만에 1000여 개의 표적을 동시다발적으로 때렸다.
위성과 드론, 감시장비가 수집한 데이터를 AI가 초단위로 분석해 목표를 설정하고 명령 체계를 자동화했다.
이 과정엔 앤트로픽의 대형 언어모델 '클로드'가 사용됐다고 한다.
발끈한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이에 협조한 AI 대기업 등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예고했다.
전쟁의 승패는 '누가 더 빨리, 더 정확히 상황을 해석하느냐'로 이동했다.
위성 사진과 감청 기록, SNS 게시물까지 모두 알고리즘의 재료가 된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사용한 '라벤더'나 '가스펠'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과거 수작업으로 처리하기 어려웠던 방대한 정보를 AI를 활용해 실시간에 가깝게 처리했다.
수십년간 축적한 정보망에 AI 기술을 입혀 이란 고위 인사들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추론했다.
이를 토대로 완벽한 전쟁 지도가 나왔다.
걸프전이 정밀 유도무기의 시대를 열었다면 지금은 '정보의 정리와 해석'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

지난 3월14일 영국 페어퍼드 공군기지에서 미국 B-1 폭격기가 정비를 받고 있다.<BR>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3월14일 영국 페어퍼드 공군기지에서 미국 B-1 폭격기가 정비를 받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란 전쟁이 특별한 이유는 AI가 부분 기능을 넘어 작전의 두뇌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선 이미지 인식이나 드론 제어 등 제한된 역할에 머물렀지만, 이번엔 AI가 작전 계획 단계부터 킬 체인 전체를 설계했다.
미군의 전광석화 같은 공격 뒤엔 수백 개의 표적을 자동 분석하고 우선순위를 매긴AI의 판단이 있었다.
AI가 전면에 나설수록 윤리 문제도 부각된다.
과연 누가 그 두뇌를 통제할 것인가. 앤트로픽은 자사 AI가 자율 살상무기나 대규모 시민 감시에 이용되는 것을 금지하는 윤리 원칙을 세웠지만 미 행정부는 이를 '안보 위험 요소'로 간주했다.
반면 오픈AI는 군사 계약을 확대하며 안보 네트워크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국가 안보를 위해 AI 통합이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다른 쪽에서는 "인간의 생사를 알고리즘이 결정할 수 없다"는 경고가 부딪힌다.
기계엔 피가 없다.
실제 워게임 시뮬레이션에서 AI 모델들은 가상 분쟁의 95% 경우에 핵 사용을 선택했다.
인간은 윤리와 두려움으로 핵무기를 극도로 꺼리지만 AI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효율 계산'만 있을 뿐이다.
AI는 전쟁의 속도를 극단적으로 높였다.
계산 속도만큼 판단의 시간은 줄고, 오판의 속도 역시 함께 빨라졌다.
자폭 드론과 자율 무인기 군단으로 대표되는 오늘의 전쟁은 '살상의 외주화'로 가는 것은 아닐까. 표면적으론 병력 피해를 줄이는 인도적인 기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본질은 누가 더 싸고 빠르게, 더 많이 '제거'할 수 있는가라는 효율성에 닿아 있다.
지하철에서 나를 위해 음악을 골라주는 알고리즘은, 전쟁이 터지면 같은 원리로 누군가의 집을 좌표로 찍을 게 분명하다.
"이 건물에 적 지휘관이 있을 확률 80%, 민간인이 희생될 가능성 30%." 우리는 그 숫자들의 조합을 '효율'이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AI가 전쟁의 생산성과효율성을 높일수록 인간의 양심은 설 자리를 잃어 가는 것 같다.
진짜 두려운 것은 AI가 너무 똑똑해지는 순간이 아니라 우리가 그 똑똑함을 핑계로 '생각하는 일'을 포기하는 순간일지 모른다.

AI가 드러낸 ‘전쟁 윤리’ 딜레마

임명환 심스리얼리티 AI융합원 원장

지구촌에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은 첨단 ICT와 AI의 실전 테스트라 불릴 만큼 기술 경연장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 기업 팔란티어의 AI 시스템 ‘고담’(Gotham)을 활용해 방대한 감시, 정찰 데이터 등을 분석하여 러시아군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과거 수일이 걸리던 표적의 식별시간을 불과 몇 분으로 단축시킨 것이다.
이스라엘군이 활용한 ‘하브소라’(Habsora) 시스템 역시 AI가 자동으로 타격 목표를 생성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첨단 ICT와 AI는 단순한 보조 도구가 아니라, 관측에서 통제, 타격까지 전쟁 전반에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 전략자산이다.
그러나 불가피한 전쟁이라도 인간 존엄성의 윤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스페이스X의 위성 인터넷 ‘스타링크’는 우크라이나의 생명선이었으나, 동시에 민간 기업의 서비스가 전쟁의 향방을 좌우하는 ‘비즈니스 리스크’를 노출했다.
미국-이란 전쟁에서도 앤스로픽은 자사의 AI 모델 ‘클로드’를 미국 전쟁부가 군사적으로 확대 적용하는데 반발하여 소송을 제기하는 등 ‘현실적 국방’과 ‘윤리적 양심’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AI가 살상용이 아니더라도 군사적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면, 해당 기업은 과연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군인은 물론 과학기술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최근 AI 워게임 시뮬레이션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다.
 AI 모델들은 전쟁의 조기 종결과 승리를 위해 ‘핵무기 사용’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인간적 직관이나 외교적 고려가 배제된 채 ‘승리’라는 최적화된 목표만을 쫓는 AI의 위험성이 드러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식 시장에서 순식간에 주가가 폭락하는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처럼, AI 간의 상호작용이 통제 불능의 전면전으로 번지는 ‘플래시 워’(Flash War)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책임의 공백’이다.
 AI 탑재 자율 드론이 오판하여 민간인을 공격했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드론에 탑재된 AI인가, 개발자인가, 아니면 알고리즘을 신뢰한 지휘관인가?전통적인 생명윤리 규범은 인간의 행위에 관한 사항이기에 의식, 도덕, 양심, 공정, 권리, 책임 등이 공리주의 원칙을 따른다.
그러나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 사례처럼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당사자 또는 이해관계자일 경우 개인주의에 영향받는 것이 현실이므로 전쟁에서 AI 생명윤리 준수를 기대하는 것은 모순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존엄성에 기반한 생명윤리 알고리즘을 의무적으로 탑재시키거나, 최종 의사결정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 통제하여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인구 절벽으로 인한 병력 감소에 직면한 대한민국에서 첨단 ICT와 AI 국방은 거부할 수 없는 필수 전략자산이다.
우리는 단순히 무기를 생산하는 공급처를 넘어, 유무인 복합전투체계의 선구자로 발돋음해야 한다.
하지만 기술 개발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할 수 있는 ICT-AI 국방’의 철학을 마련하는 것이다.
천궁-Ⅱ의 성능 입증으로 새롭게 도약하는 K-방산에 한국형 ‘소버린 AI’를 이식해 기술 종속을 막고,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AI 윤리규범 제정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기술적 우위와 윤리적 양심이 결합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국방은 진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 뉴스로 가득찬 미디어를 접하면서 ‘첨단 ICT와 AI를 비윤리적으로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필승을 부각시키는 현실을 씁쓸하게 바라본다.
손자병법에서 ‘백전백승’(百戰百勝)은 독립된 단어가 아닌, 뒤에 ‘비선지선자야’(非善之善者也) 문구가 함께 붙어 있다.
즉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 선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의미이다.
힘의 논리로 승리와 패배를 구분하지 않고, 삶의 지혜로 판단하면 모두가 패자이다.
전쟁은 세상을 파괴하고 인명 피해를 수반하기 때문에 첨단 ICT와 AI는 싸우지 않고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활용되어야 할것이다.

"조용히 쌓여 한순간에"…고지혈증, 젊을 때부터 막아야

김길원 기자

김길원 기자

심뇌혈관질환 출발점…당뇨병 환자, 고지혈증 유병률 일반인의 곱절'LDL 콜레스테롤' 평생 혈관에 축적…젊은층 조절률 61%나 떨어져

고지혈증
[자료 이미지]

고지혈증[자료 이미지](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통계청의 사망원인 통계(2020년)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심장질환은 전체 사망의 10.6%를 차지해 암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사망률(인구 10만명당)도 2010년 46.9명에서 2019년 60.4명, 2020년 63명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여기에 뇌혈관질환과 고혈압성 질환까지 포함한 순환기계 질환 사망률은 121.1명에 달한다.
이 거대한 질병군의 출발점에 있는 것이 바로 '고지혈증'이다.
고지혈증은 혈액 속 지방 성분, 즉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한 상태를 말한다.
혈액 속에 과도하게 쌓인 저밀도지단백(LDL) 콜레스테롤은 혈관 벽에 침착돼 '플라크'를 형성하는데, 이 플라크가 점점 커지면 혈관이 좁아지고, 결국 혈전이 생기면서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같은 치명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LDL은 흔히 '나쁜 콜레스테롤', 반대로 고밀도지단백(HDL)은 '좋은 콜레스테롤'로 불린다.
한국지질동맥학회에 따르면 총콜레스테롤 240㎎/dL 이상, LDL 160㎎/dL 이상, 중성지방 200㎎/dL 이상이면 높은 상태로 본다.
 HDL은 40㎎/dL 미만이면 위험 신호다.
"이 정도일 줄 몰랐다"…유병률 3배 급증해 '국민 질환'
문제는 고지혈증이 이미 '국민 질환' 수준으로 빠르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질병관리청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고콜레스테롤혈증 유병률은 2005년 남녀 각각 6%대에서 2020년에는 남성 20.2%, 여성 18.8%로 약 3배 증가했다.
특히 당뇨병 환자에서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당뇨병은 만성적인 고혈당 상태로 인한 혈관 내벽 손상이 심화하는데, 이렇게 약해진 혈관에는 LDL 콜레스테롤이 더 쉽게 침착돼 동맥경화가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뇨병 환자의 고지혈증 유병률은 69.2%로, 일반인(36.8%)의 두 배에 달한다.
기준을 더 엄격히 적용하면 80%를 훌쩍 넘는다.
부천세종병원 장덕현 심장내과 과장은 "고지혈증은 심혈관질환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라며 "위험성을 인지하고 젊을 때부터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 먹으면 잘 조절되지만…젊은층은 '사각지대'
희망적인 점도 있다.
고지혈증은 치료가 비교적 잘 되는 질환이다.
같은 조사에서 인지율(62.9%), 치료율(55.1%), 조절률(치료자 기준 85%)이 꾸준히 증가했다.
약물 치료를 시작하면 상당수 환자에서 목표 수치까지 안정적으로 관리된다는 의미다.
경희의료원 디지털헬스센터 연동건 교수 연구팀이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참여한 9만7천여명을 17년(2007∼2023년) 동안 분석해 국제학술지 '의학'(Medicine) 최신호에 발표한 논문에서도 지질저하제를 복용한 환자의 총콜레스테롤 수치가 감소하고, 조절률은 73%에서 88%로 크게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문제는 관리가 필요한 젊은층이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20∼44세 젊은 성인의 경우 지질 조절에 성공할 가능성이 기준 집단에 견줘 61%나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젊은 연령층에서 심혈관 질환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고 복약 순응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게 연구팀의 해석이다.
"콜레스테롤은 평생 쌓인다"…관리의 시작은 지금
고지혈증 관리의 핵심은 LDL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것이다.
특히 이미 심혈관질환이 있는 초고위험군은 LDL을 55㎎/dL 미만, 고위험군은 70㎎/dL 미만으로 유지해야 한다.
당뇨병 환자 역시 엄격한 관리가 요구된다.
장덕현 과장은 "LDL 콜레스테롤은 나이에 상관없이 혈관에 계속 축적된다"며 "젊을 때부터 낮은 수준을 유지해야 평생 심혈관질환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관리 방법은 비교적 명확하다.
우선 식습관 개선이 기본이다.
포화지방과 당분 섭취를 줄이고, 채소와 통곡물, 생선을 늘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도 필수다.
필요할 경우에는 스타틴 계열 약물 등으로 적극적인 약물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
다만 중성지방은 식사에 따라 변동이 크기 때문에, 매우 높은 경우가 아니라면 생활 습관 개선이 우선이다.
bio@yna.co.kr

15년 웹문지기 붕괴 직전

"당신은 로봇입니까?" 질문 더 이상 답할 가치 없어...'의도'와 '행동' 물어야최근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수업중 학생들과 특정 프로그램을 설치하다 몇몇 학생들이 회원가입에서 막히는 '해프닝'이 있었다.
분명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Are you human?"이라는 질문에서 낸 퀴즈에서 로봇 취급을 받은 것이다.
당시는 웃으며 넘어갔지만 종종 생각이 든다.
과연 리캡차(reCAPTCHA)나 턴스타일(Turnstile)이 언제까지 의미 있을까.사용자 지시로 움직이는 AI가 "너는 AI가 아닌 사람임을 증명하라"는 테스트 앞에 선 장면이다.
희극적이지만 현실이며, 더 중요한 것은 이 에이전트가 실제로 정답을 맞히고 그 문을 통과한다는 사실이다.
 
15년 넘게 웹의 문지기 역할을 해온 캡차(CAPTCHACompletely Automated Public Turing test to tell Computers and Humans Apart)는 이제 기술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붕괴 직전에 와 있다.

2024년 9월 취리히연방공대 연구진이 아카이브에 올린 논문 시선2024년 9월,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ETH Zurich) 연구진이 아카이브(arXiv)에 논문 한 편을 올렸다.
제목은 'Breaking reCAPTCHAv2'. 결론은 단순했다.
욜로(YOLO)라는 이미지 객체 탐지 모델로, 구글이 전 세계 수백만 사이트에 배포한 reCAPTCHA v2를 100% 성공률로 돌파했다.
이전 연구들이 기록한 68~71%의 돌파율이 단번에 천장을 찍었다.
더 주목할 대목은 논문의 부수적 발견이었다.
연구진은 reCAPTCHA v2가 이미지 인식 테스트 자체보다 쿠키와 브라우저 히스토리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우리가 '횡단보도를 찾으면서' 풀고 있다고 믿어 온 그 테스트는, 사실상 브라우저 평판을 평가하는 절차의 연출이었던 셈이다.

안광섭 세종대 겸임교수1년 뒤인 2025년 10월, 봇 탐지 연구기업 라운드테이블(Roundtable)이 범용 AI 에이전트를 직접 시험했다.
결과는 이랬다.
클로드 소네트 4.5(Claude Sonnet 4.5)가 60%, 제미나이 2.5 프로(Gemini 2.5 Pro)가 56%, GPT-5가 28%의 성공률로 reCAPTCHA v2 챌린지를 풀어냈다.
이 수치에서 눈여겨볼 것은 절대적인 성공률이 아니라, 캡차 돌파 용도로 전용 훈련되지 않은 범용 어시스턴트가 이 정도를 해낸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캡차 자동 해결 서비스 시장이 이미 성숙했다.
이미지 1000개당 수백 원 수준의 가격으로 reCAPTCHATurnstilehCaptcha 대부분을 해결하는 API가 공개적으로 판매된다.
대규모 사용자 연구 논문 'Dazed & Confused'가 reCAPTCHA v2에 내린 평가는 냉정했다.
"막대한 비용, 그리고 영(零)에 가까운 보안"이다.
이분법은 이미 무너졌다
캡차가 뚫렸다는 사실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봇인가 사람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2026년의 웹 트래픽을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클라우드플레어(Cloudflare)가 2025년 12월 공개한 연간 인터넷 보고서는 이 변화를 숫자로 보여준다.
전체 HTML 요청 트래픽 가운데 인간이 생성한 트래픽은 43.5%, AI가 아닌 자동화 봇이 47.9%, AI 봇이 4.2%였다.
여기에 검색 인덱싱과 AI 훈련을 동시에 수행하는 구글봇(Googlebot) 단독으로 4.5%를 차지했다.
2025년 9월부터는 일부 날짜에서 인간 트래픽이 비(非)AI 봇 트래픽을 역전하기 시작했다.
더 극적인 변화는 증가율에 있다.
사용자의 질의에 응답하기 위해 웹을 실시간 탐색하는 AI '사용자 행동(user-action)' 크롤링 규모가 2025년 한 해 동안 15배 늘었다.
또 다른 봇 관리 기업 데이터돔(DataDome) 집계에서도 거대언어모델(LLM) 크롤러 트래픽은 2025년 1월 전체 인증 봇의 2.6%에서 8월 10% 이상으로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 트래픽을 '봇'으로 단순 분류할 수 있는가. 사용자가 ChatGPT에 "오늘 뉴스 요약해줘"라고 요청해 발생하는 접속은 누구의 것인가. 사용자 본인의 것인가, OpenAI의 것인가, 아니면 둘 사이에 생겨난 새로운 주체의 것인가. 같은 질문이 한국 기업의 내부 업무에도 적용된다.
직원이 AI 어시스턴트로 경쟁사 공시를 자동 요약한다면, 그 접속은 직원의 것인가 회사의 것인가 도구의 것인가.문제는 여기서 더 복잡해진다.
웹에는 '원하는 봇'과 '원치 않는 인간'이 공존한다.
검색 엔진 크롤러는 반가운 봇이고, 브랜드 콘텐츠를 긁어가는 저품질 AI 스크래퍼는 귀찮은 봇이다.
마찬가지로 정상 사용자도 있고, 크리덴셜 스터핑(credential stuffing, 유출된 아이디·비밀번호를 자동 대입하는 공격)을 시도하는 인간도 있다.
'봇/사람' 분류는 이 네 가지 경우 중 단 하나도 정확히 분리해 주지 못한다.
진짜 질문은 '의도와 행동'이다
그렇다면 웹의 문지기가 물어야 할 질문은 무엇인가. 필자가 보기에 답은 명확하다.
"이 트래픽의 의도가 무엇이며, 내 서비스와 호환되는 행동인가"이다.
업계에서 논의되는 기술적 방향 역시 같은 선 위에 있다.
익명성을 유지하면서도 "이 클라이언트가 과거에 신뢰할 만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만 증명하는 프라이버시 패스(Privacy Pass) 프로토콜이 대표적이다.
이미 IETF에서 RFC 9576, RFC 9578로 표준화되어 있으며, 하루 수십억 건의 토큰이 오가는 규모로 운영 중이다.
더 정교한 변종으로 익명 속도제한 크리덴셜(ARCAnonymous Rate-Limit Credentials)과 익명 신용 토큰(ACTAnonymous Credit Tokens)이 개발 중이다.
이 프로토콜들은 "나는 누구입니다"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이 서비스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를 증명한다.
신분증을 제시하는 대신, 행동 이력에 대한 암호학적 영수증만 전달하는 셈이다.
동시에 신원이 중요한 트래픽에는 다른 접근이 자리잡고 있다.
구글, 오픈AI, 클라우드플레어, AWS가 HTTP 메시지 시그니처(HTTP Message Signatures) 표준을 활용해 자사 크롤러 요청에 암호학적 서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웹 봇 인증(Web Bot Auth)이라 부르는 이 방식은 봇 운영자가 "나는 숨지 않겠다"는 의사를 기술적으로 표명하는 장치다.
기업 전략을 자문해 온 관점에서 보면, 이 전환은 단순한 보안 기술의 교체가 아니다.
웹 비즈니스 모델의 근간이 움직이고 있다.
'익명으로 들어와 광고를 보고 나가는' 사용자를 전제로 설계된 미디어·콘텐츠 사업은, 그 전제가 흔들리는 지금 자신의 수익 구조를 원점에서 재설계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한국 기업이 주목해야 할 지점
웹 문지기가 계속 무력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필자가 보기에 사이트들은 결국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모든 콘텐츠를 로그인 뒤에 두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AI 사업자에게 데이터를 일괄 판매하는' 길이다.
두 경로 모두 개방형 웹을 끝낸다.
한국 기업이 지금 점검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자사의 봇 관리 정책이 여전히 'IP 블랙리스트 + 캡차'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 둘째, 자사의 콘텐츠가 AI 크롤러에 어떤 비대칭 비율로 소비되고 있는가. Cloudflare 자료에 따르면 일부 주요 AI 플랫폼은 2025년 하반기 기준 크롤 대비 레퍼럴 비율이 2만5000 대 1에서 10만 대 1에 이르렀다.
내 사이트를 읽기만 하고 트래픽은 돌려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셋째, IETF와 W3C에서 진행 중인 새 표준에 한국의 목소리를 담을 채널이 있는가."당신은 로봇입니까"라는 질문은 더 이상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 됐다.
이제 물어야 할 것은 "당신이 하려는 행동이 내 서비스를 훼손하지 않는가"이다.
질문의 문법을 바꾸지 못한 기업은, 뚫린 문 앞에서 여전히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inG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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