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 갇혀버린 피카소의 뮤즈

파블로 피카소는 도라 마르크를 모델로 한 '우먼 여인'을 1937년 한 해만 심사 4점, 기술을 포함하면 36점을 그토록, 일부 기록은 60여 점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사진은 영국의 활동모던과 이 의원이 있는 '운녀'로 피카소가 그린 것 중 가장 의회와 가치가 있는 형태를 보고 평가를 받습니다.
사진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와장창 깨져서 금이 간 유리창 같은 그림 속 여인이 손수건을 깨고로 잘근잘근 깨물며 울고 있습니다.

여인은 빨간 모자에 푸른색 클립을 달고, 긴 머리를 가지런하게 빗어 많은 긴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 바깥쪽으로는 나선형 사진처럼 모든 색이 사라지고 불안한 손가락과 치아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신, 파란색, 초록, 노란색의 경쾌한 위치를 보고 있음에도 초조한 모습의 이 여인은 바로 파블로 피카소가 큰 사랑했던 여자, 도라 마르입니다.

'우리 여인'이라는 제목을 받고 있는 이 그림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마크는 영원히 '우먼 여성'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피카소는 왜 연인을 보고 싶나요? '그림 속에 갇혀 있는 뮤즈', 마크와 피카소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피 묻은 장갑의 여인

만레이가 관찰한 도라 마크의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피카소와 마크의 첫 만남은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는 프랑스 파리의 예술가들이 자주 오 모여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 함께 아는 친구가 없는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마르와 피카소는 한 테이블에 마주앉게 됩니다.

멕시코는 대담한 사진으로 앙드레 브르통, 만레이의 인정을 받은, 초현실주의 예술가 그룹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금기를 추구하며 '에로티즘', '내적 경험'과 같은 저 잡음자 조르주 바타유와 연애를 한 적도 있었죠.

그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적인 해적을 지녔던 그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예술가 피카소를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

마크는 기 싸움에서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갑을 갑자기 한 손을 테이블에 얹어 놓습니다.
그리고 작은 칼을 꺼내는 손가락 사이를 감추는 모험을 시작합니다.

오른쪽 칼날이 마르의 희고 긴 손가락 사이를 빨리오고 가던 찰나. 대신에 잘못된 곳을 집어넣고, 흐른 피가 테이블 위에 손가락이 장갑을 끼고 있습니다.
피카소는 그런 마크를 지켜드립니다.

당신의 피 묻은 장갑, 내가 가져가고 있어요.

마르가 건넨 장갑을 피카소는 집으로 가져가는 것에 장사합니다.
 마르의 회장하고 예민한 마음을 상징하는 피 묻은 장갑, 그것에 손에 닿는 피카소.

이 사건은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추론하고, 그리고 그것이 미친정하게 자기만의 가구를 만든 피카소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나에게 도라는 우는 여자”

피카소는 마르를 뮤즈로 삼아 그림으로 답하지만, 백작 전용 사진가로 피카소에게 최신 사진을 공유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또 마르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함께 '반파시즘 선언'에 참여하며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는 목소리를 내는데, 그의 이러한 기본 의식 영향으로 피카소는 스페인 내에서 관심을 나타냄을 대작 '게르니카'로 간주합니다.

결합된 도라 마크 카메라와 피카소..Av Eileen Agar. CC BY NC ND 3.0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과정을 변형하는 것은 사진으로 부착하고 참여하는 중요한 기록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현실에서 두 사람은 매우 사랑하는 연인과 관계를 맺고 관계를 맺습니다.
피카소는 후일 마크에 대해 이런 말을 남깁니다.

도라는 나에게 '우리는 여자'였다.
나는 몇 년 동안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만 그렸는데, 내가 보는 것에서 즐거움이나 기분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눈에 도라는 익숙한 '우리 여자'라는, 그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런 외부적인 모습이 아니라 깊은 느낌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말처럼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린 다음 몇 년 동안 마르를 모델로 한 작은 점에 여러 점을 붙였다고, 그 대부분의 백작은 슬프고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는, '우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랑스러워서 예술가였죠, 피카소

'운녀'는 피카소가 도라 마크의 우울한 감정에 대처한 결과이다.
그는 마크의 고통에 심오한 감정을입을하면서도 그것을 이용했다.

마르크의 회고전을 영국의 현대 미술관은 모던하게 '우는 여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늘 불안하고 예민해 있어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는 문자의 마음을 피카소는 예리하게 보고 있었고, 때때로 부추기고 과장해 그림과 함께 일그러진 함, 손수건을 잘근잘근 깨물며 울부짖는 것은 옆에 있습니다.

그 결과물인 '운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명체입니다.
게다가 피카소는 마크를 통해 이해한 불안과 슬픔을 나누는 감정을 행복하게 했다는 것이 바로 '게르니카' 속사람들의 감정입니다.
'게르니카' 속 스페인 내전이라는 관측으로 참혹한 범위를 같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은 백의 마음에서 본 것을 여러 차원으로 변주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건 피카소가 '우먼 여인'의 도상을 '게르니카'에도 캠기 위해 여러 차례 차례를 하다가 포기했다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우리 여인'은 슬픔이 너무 강렬해 다른 감정의 감정을 압도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여기 피카소가 가장 강렬하게 고통과 고통의 감정은 마크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클로서 본명 '운녀'. 사진 김민 기자.

피카소는 마르의 피 묻은 장갑을 가져가는 것처럼, 그녀의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훔쳐'고, 그 사람들의 마음인 감정으로 확장해 '게르니카'에 용해했습니다.
마르크의 부츠빛 장갑은 피소의 속장 수납가는 순간 모양입니다.

마르는 후일 인터뷰에서 '미숙한 여인'은 피카소가 나를 본 시점인, 도라 마르가 아니오라고 말아서, 즉 '피카소의 우는 여인으로만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항변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표현하고, 그것이 더 많이 발전했다는 사실을 대작으로 만든 피카소. 그의 빈정함은 약 100년이 지나 또 다른 평가를 받고, 그에 따라 '우는 여인'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누군가의 눈물을 그림으로 길 수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어디에서 빌릴 수 있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로크비 비너스(비너스의 단장). 벨라스케스가 그린 누드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품으로, 화가가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1647~1651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품.

거품 속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를 그린 보티첼리,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비너스를 표현한 티치아노, 시중드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꽃단장하는 루벤스의 비너스까지.

르네상스와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린 비너스(혹은 아프로디테)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유럽 여러 미술관의 중요한 컬렉션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들 ‘비너스 그림은 표면적으로는 신화 속 여신을 묘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당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성을 그립니다.

풍성한 금발을 늘어뜨리거나, 그리스 조각상 같은 신체 비율을 충실히 따르고, 더 나아가 누워있는 공간이나 장신구를 아주 호화롭게 묘사한 것이 흔합니다.

그런데 스페인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남긴 그림 ‘로크비 비너스의 비너스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흐린 얼굴의 흑발 여인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비너스는 풍성한 금발의 여신이다.
우피치미술관 소장품

간송미술관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가 전시됐을 때, 이 그림을 보려고 긴 줄이 늘어섰던 것 기억하시나요?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에게나 호기심을 일으키는 소재입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그 그림을 직접 보겠다고 몇 시간을 기다리는 수고를 감수하는 건 ‘조선 시대 미인은 얼마나 예뻤나? 하는 궁금증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림을 보러 가서 여인의 얼굴, 옷, 장신구 같은 외모를 감상하죠.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로크비 비너스(비너스의 단장).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품

그런데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 여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 뒷모습이 전부입니다.

목걸이도, 팔찌도, 장식이 될 만한 어떠한 것도 걸치지 않은 누드에, 걸터앉은 침대에도 흰 시트 위에 어떠한 무늬도 없는, 그저 푸른빛이 도는 회색 천이 놓여 있죠. 게다가 여인의 머리 위 공간은 텅 빈 벽이며 그 위로는 붉은 커튼이 드리워져 이 공간이 화려한 궁궐인지 귀족의 저택인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사람의 집인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당대 대부분 화가가 비너스를 금발로 그린 반면 벨라스케스의 여인은 갈색빛이 도는 흑발을 하고 있습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로크비 비너스(비너스의 단장).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품

즉, 화가는 아름다운 여인을 신화나 환상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검은 머리카락을 하고 아주 사적인 공간에 누워 있는 현실 속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여인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시선을 빼앗기는데요. 그러한 매력을 만드는 결정적 장치는 바로 ‘거울입니다.

나를 보는 여인이 아름답다

그림에서 거울이 없다고 상상해 볼까요? 여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낯설고 다가가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날개를 단 소년(천사)이 든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의 얼굴은 희미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고, 또 관객과 눈을 맞추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비너스의 단장. 스페인 프라도미술관 소장품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여인이 ‘눈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울을 들고 있는 비너스는 대부분 자기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확인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와 달리 벨라스케스는 실제 각도로는 불가능함에도 여인의 시선을 과감하게 정면으로 돌립니다.
그 결과 보는 사람은 여인과 눈을 마주치며 교감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로크비 비너스(비너스의 단장).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품

또 거울 속 여인의 이목구비는 아주 흐리게 표현했습니다.
여인의 몸은 붓 터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고 반짝이게 그려 현실감을 더한 것과는 반대로 말이죠.

얼굴이 희미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그 불확실함 덕분에 보는 사람은 특정 인물이 아닌 나와 눈을 마주치는 ‘누군가를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이란 예쁘게 생긴 외모가 아니라 나와 닿을 수 있는 살갗이며, 뒷모습이 아니라 나를 보는 눈빛이라는 걸 이 그림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눈을 마주쳤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비너스)이 되었다.

사적 취미에서 공공 자산으로

벨라스케스는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을 표현하게 됐을까? 모든 것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작품의 제목인 ‘로크비 비너스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품이 되기 전 그림이 걸려 있던 저택의 이름 ‘로크비 파크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전엔 150여 년간 스페인 귀족들이 소장했고, 첫 거래 기록은 마드리드 딜러 도밍고 게라 코로넬입니다.
코로넬은 왕실 그림을 거래하던 유명한 상인이 아니라 아주 작은 규모의 미술상이었고, 이때까지 그림 이름은 ‘누드 여인(A nude woman)이었습니다.

그림이 이렇게 조용히 떠돌았던 이유는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누드를 그리는 것을 종교적 이유로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무척 내밀한 분위기 때문에 벨라스케스가 이탈리아에서 몰래 만난 연인을 그렸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과거엔 소수만 즐겼던 사랑의 언어를 지금은 미술관에서 무료로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엔 걸작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05년 그림의 소유주는 재정난으로 그림을 팔기로 합니다.
딜러가 책정한 금액은 4만 파운드. 내셔널갤러리의 1년 예산은 당시 5000파운드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국보급 문화재를 다른 나라에 빼앗길 수 없다는 여론이 일었고, ‘내셔널 아트 펀드 모금 운동으로 정부가 작품을 매입할 수 있게 됐죠.

이후 국왕이 익명으로 8000파운드를 기부했다는 소식까지 알려지면서, 이 작품은 내셔널갤러리에서 국민적 사랑을 받는 대표작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함께 여름 휴가를 떠나 배를 타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 사진출처 구스타프 클림트 재단

구스타프 클림트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이 ‘여인들의 초상화입니다.

클림트는 의뢰로 사교계 여성을 그리는가 하면, 상징에 빗댄 여자들의 누드를 그리고, 작업실에서는 이런 누드화의 모델을 선 여자들의 적나라한 포즈를 그렸습니다.

생전 클림트는 “나라는 사람은 흥미로울 구석이 하나도 없다”며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림을 봐달라”며 사생활을 숨기려 했죠.

그러나 수많은 여인을 그림으로 남긴 데다, 세상을 떠난 뒤 ‘숨겨둔 자식들 10여 명이 유산을 요구하며 나타나 ‘클림트의 여인들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 이야깃거리입니다.

오늘은 그 중 평생 클림트와 함께했던 여인이자 ‘키스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뮤즈, 에밀리 플뢰게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바람둥이 클림트 눈 감아준 헌신적 여자?

에밀리 플뢰게가 17살일 때 그린 초상화(1891). private collection

클림트와 플뢰게는, 클림트의 동생과 플뢰게의 언니가 결혼하며 사돈 관계로 알게 됩니다.

클림트가 29세 젊은 화가일 때, 17세인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을 그렸는데, 가족이나 주변 사람을 모델로 흔히 그림을 그렸던 시기입니다.

이후 클림트 형제들은 중요한 그림 커미션을 따내며, 그림 사업을 확장합니다.
플뢰게 자매 역시 ‘슈베스턴 플뢰게(플뢰게 자매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패션 디자인을 시작해, 두 가문이 사업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러다 에른스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클림트가 조카의 후견인이 되면서 에밀리 플뢰게와 구스타프 클림트는 가까워집니다.

두 사람은 빈의 사교 행사에 자주 함께했고, 사람들은 플뢰게를 ‘클림트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클림트가 죽을 때까지 둘은 결혼하지 않았고, 같이 살지도 않았습니다.
클림트는 어머니와 여동생, 누나들이 함께 살며 뒷바라지를 했고, 플뢰게도 언니, 동생 및 가족과 함께 살았죠.

이 때문에 예전의 클림트 전기에서는 플뢰게와 클림트가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거나, 플뢰게가 ‘바람둥이 클림트를 눈 감아준 헌신적 여자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술사학자들은 가부장적 시각에서 벗어나 플뢰게의 삶을 돌아보고 있는데요. 클림트의 모델, 뮤즈라는 렌즈를 버리고 플뢰게의 삶을 보면 그녀 자체로도 성공한 사업가이자 시대를 앞서갔던 디자이너였음이 드러납니다.

‘슈베스턴 플뢰게 전성기엔 직원 80명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19세일 때 에밀리 플뢰게. 알베르티나 미술관 소장.

클림트는 평생 플뢰게의 초상을 4차례 그렸는데, 여기서도 플뢰게의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17,19세 때 초상에서 플뢰게는 얌전한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19세 때 초상은 아름다운 정원과 공주풍 드레스가 눈길을 끌지만, 플뢰게의 포즈와 표정은 어색한 듯 경직되어 있죠.

구스타프 클림트 '에밀리 플뢰게 초상'(1902). Wien Museum Inv.-Nr. 45677, CC BY 4.0, Foto: TimTom, Wien Museum (https://sammlung.wienmuseum.at/en/object/820521/)

9년 뒤인 1902년.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다부진 입은 그대로지만 ‘비엔나 공방 디자이너들이 즐겨 사용했던 패턴의 원피스를 입고 턱은 약간 위로 든 모습이 자신감 넘칩니다.

플뢰게가 입고 있는 옷은 당시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낯선 스타일이었습니다.
허리가 조이지도 않고 패턴도 여성적 드레스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특히 영국에서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신체를 과도하게 억압하는 옷을 바꾸자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시작한 ‘개혁 드레스(Reform Dress)의 영향도 보입니다.

이런 옷을 좋아하는 건 지성인과 아방가르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었죠. 플뢰게 자매들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1904년 빈에 패션 상점 ‘슈베스턴 플뢰게를 열고 이런 옷을 만들었습니다.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고 있는 에밀리 플뢰게. 사진출처 구스타프 클림트 재단.

재밌는 건 클림트의 그림이 보여준 새로운 시도를 플뢰게 자매가 패션의 영역에서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년 프랑스와 런던을 방문했던 플뢰게는 폴 푸아레에게 영감을 얻었고, 또 클림트와 절친했던 비엔나 공방 디자이너, 건축가와도 활발히 협업했습니다.

이 때 슈베스턴 플뢰게에 가면 비엔나 공방 스타일 인테리어에 콜로먼 모저가 디자인한 가구가 놓여 있고, 또 각종 실험적인 공예품들이 비매용 장식품으로 진열되며 세련된 취향과 감도를 자랑했습니다.
유럽의 도버 스트릿 마켓 같은 ‘편집샵의 초기 형태를 보여줬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슈베스턴 플뢰게에서 콜로먼 모저가 디자인한 의자 옆에 서 있는 에밀리 플뢰게. 사진 레오폴드 미술관

그러면서 비엔나 공방 스타일을 낯설어 하는 고객에겐 여전히 귀부인 스타일의 옷을 제작해주면서 수익을 내는 수완도 갖췄습니다.
덕분에 슈베스턴 플뢰게는 전성기에 직원을 80명까지 두었고, 1차 세계대전 뒤에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고, 나치의 유대인 핍박으로 문을 닫기 전에 30년 넘게 영업을 이어 갔다고 합니다.

‘감각의 파트너 클림트를 사랑하다

벨베데레 미술관이 대표 소장품 '키스'와 에밀리 플뢰게를 스타일을 재현해서 만든 전시 홍보 사진.. 사진 벨베데레 미술관 제공

이렇게 플뢰게가 성공한 사업가였음을 주목한 독일 미술사학자 수자나 파르치는 “플뢰게가 클림트를 위해 ‘자기 희생(self-sacrifice)을 하고 눈 감아준(renunciation)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그녀가 자기 사업과 커리어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 비춰보면 부적절하다” “플뢰게가 클림트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음을 감안하면 각자를 존중하는 파트너십은 그녀에게도 득이 됐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클림트는 자신에게 초상을 의뢰하는 부유한 중산층 고객을 플뢰게에 소개하며 도움을 주었고, 디자인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을 공유하고 직접 옷을 함께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두 사람은 매년 여름 함께 휴가를 떠났는데, 이곳에서 플뢰게가 새롭게 디자인한 옷을 입고 홍보용 사진을 찍을 때, 대부분은 클림트가 찍어줬습니다.

클림트가 찍어준 에밀리 플뢰게 사진.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

1980년대에는 클림트가 플뢰게에 보낸 엽서 400장이 발견됐는데, 그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파리에 와보니 이곳 사람들은 더 과감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누구도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아. 당신이 파리를 무척 좋아했을 것 같아.”

그러다가 플뢰게가 시장 조사를 위해 해외로 떠나면 클림트는 “미디(에밀리의 애칭), 왜 그렇게 빈을 빨리 떠났어? 파리에 그렇게 급하게 가야만 했던거야?”하고 묻거나, 자신이 빈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는 “내 귀여운 미드리첸, 미데사, 미디(에밀리의 애칭들)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기뻐. 그녀가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올까? 어쨌든 돌아가면 만나게 될 테니까”하고 애정 표현을 했습니다.

클림트가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에밀리를 불러줘였고, 유산 절반을 그녀에게 남겼다고 하죠. 이 유산 대부분은 미완성 작품, 그림, 드로잉이었는데 플뢰게는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작품과 소장품을 팔지 않고 자택에 ‘클림트의 방을 만들어 보관했다고 전해집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 사진출처 구스타프 클림트 재단

클림트의 복잡한 관계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회화와 디자인에서 ‘새로움을 찾으려 했던 꿈과 희망이 두 사람을 강하게 연결해 준 고리가 아니었을까. 또 한 사람의 일방적 희생이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며 ‘감각의 파트너로 함께한 것이 오랜 시간 애정을 지키게 해주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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