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돌담과 능소화의 조화가 아름답다.
ⓒ 김숙귀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에 있는 학동마을은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 25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주 최씨 안렴사공파의 집성촌이다.
1670년경 전주 최씨 선조의 꿈 속에 학(鶴)이 마을에 내려와알을 품는 모습이 보였는데날이 밝아 그 곳을 찾아가 보니 과연 산수가 수려하고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에 명당이라 믿고 입촌, 학동이라 명명하면서 형성된 유서깊은 마을로 전해진다.
▲학동마을 가는길에 어느 집 담에 피어있는 능소화를 만났다.
길가 한쪽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바라보노라니 마음은 어느덧 풍성해지는 느낌이었다.
ⓒ 김숙귀
▲마을 돌담위에는 거의 대부분 능소화가 피어 있었다.
ⓒ 김숙귀
마을에 있는 모든 집들의 담과 집이 앉은 기단, 그리고 텃밭을 두른 낮은 담도 모두 돌로 정성스레 쌓았다.
담은 돌과 흙이 서로 부등켜 안은 듯 옹골차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을에 들어서니 입구에서부터 활짝 핀 능소화가 환한 얼굴로 나를 맞는다.
느릿느릿 골목길을 거닌다.
마음은 여유롭고 편안하다.
돌담마다 길게 줄기를 늘어뜨리고 소담하게 꽃을 피운 능소화가 돌담과 어우러져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화려하지만 지나치지 않고 정갈하다.
▲골목 한쪽에 접시꽃이 가득 피었다.
ⓒ 김숙귀
▲마을에 있는 찻집, 학동갤러리 입구. ⓒ 김숙귀
예전에는 양반꽃이라 하여 서민들은 키울 수가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사찰이나 시골 돌담, 그리고 삭막한 도시의 시멘트담에도 반갑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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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걷다가 매사고택(최영덕씨고가,경남문화재자료 178호)을 둘러보았다.
밥지을 때 나는 연기를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담장보다 낮게 만든 굴뚝과 돌담에 있는 구휼구(求恤口)는 가진자들의 넉넉한 베품을 생각하게 한다.
이즈음의 고성은 제대로 발품을 팔아볼 만하다.
상리연꽃공원의 수련과 제법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만화방초, 그리고 글래이스정원에는 수국이 만개하여안복을 누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또한 통영 쪽으로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광도천변의
수국길도 충분히 볼 만하다.
여름한철 고성 월평리 국도변에서주민들이 즉석에서 삶아 파는 따끈따끈한 찰옥수수 맛은 일품이다.
▲학동마을의 여름은 아름답고 풍성하다.
ⓒ 김숙귀
▲마을풍경. ⓒ 김숙귀
▲정갈하고 단아한 능소화의 모습. '명예,영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능소화는 왕을 사랑한 어느 궁녀의 슬픈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 김숙귀
돌담과 능소화
돌담과 능소화가 어우러진 곳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능소화, 돌담에 기대어 등을 내 거는 꽃
능소화,‘금등화(金藤花)’, ‘양반꽃’이라고 불리는 꽃의 계절
▲ 안동 법상동 골목길의 능소화. 이 골목을 걸어서 이르는 공립 여자고등학교에서 나는 다섯 해 동안 근무했다.

능소화(凌霄花)의 계절이다.
한여름엔 꽃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능소화는 다른 꽃들이 더위에 지쳐 허덕이고 있을 때 담장을 타고 하늘로 기어올라 주황색 고운 꽃을 피우는 것이다.
‘능소(凌霄)’란 ‘하늘을 뚫고 치솟아 오르다’의 뜻이다.
한여름 땡볕 속에 지치지도 않는 듯 하늘을 향해 휘감아 오르는 능소화의 모습에서 그런 이미지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 능소화 줄기 ⓒ 위키백과
능소화는 달리 ‘금등화(金藤花)’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등나무와 비슷하지만, 훨씬 아름다운 꽃을 피우니 ‘금(金) 자’를 붙여 금등화라 부른 것이다.
능소화는 꽃이 질 때도 깔때기 모양의 꽃송이가 시들지 않고 싱싱한 상태로 쏙 빠져서 아주 깔끔하게 떨어지는 특징이 있다.
빛깔이나 모양은 물론이고, 꽃이 질 때의 모습조차 고고하고 깔끔한 것이다.
그래서인가, 조선시대에는 이 꽃을 양반집에서만 길렀다고 한다.
상민들이 능소화를 심으면 양반을 능멸한다고 붙잡아다 볼기를 쳤다니 숨 막히는 중세의 풍경은 씁쓸하고 슬프다.
능소화를 달리 ‘양반 꽃’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다.
호젓한 골목 안 여염집 대문간에, 시골 대갓집 담벼락에 치렁치렁 핀 능소화를 나는 여느 꽃처럼 심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나는 이 꽃의 전설이 가진 곡절과 사연에 앞서 이미 충분히 젖은 눈길로 능소화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내게는 능소화와 관련된 기억도 추억도 없다.
철들 때까지 내겐 능소화를 만난 기억이 있는지조차 희미하다.
그런데도 늘 능소화는 아련한 비애의 이미지로 내게 다가온다.
능소화는 내게 선험적으로 슬픈 꽃인 것이다.
‘능소화’라는 제목으로 쓴 나태주, 김선우 시인의 시를 읽는다.
하나는 짧고 하나는 긴 호흡의 산문시다.
나태주 시인의 ‘능소화’는 어린 시절, 아스라한 기억의 창고로 인도하는 꽃이다.
고아원 자리, 전쟁고아들의 눈빛으로 핀 능소화, 그것도 슬프긴 매일반이다.
김선우 시인의 능소화는 징그럽다.
징그러운 원시적 생명력이다.
그것은 춘삼월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찌쟁찌쟁 쇳소리를 울리며 그 뜨거운 가슴의 열기로 염천을 능멸하며 피는 꽃이다.
능소화에 깃든 전설은 미완성의 소품 같다.
드라마틱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은 이 전설의 컨셉은 ‘기다림’이다.
단지 그것은 이 꽃의 모습과 생태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담장 주변을 서성이며 그것을 휘어감고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 경상남도 외도의 능소화



▲ 빛이 진한 이 꽃은 모양이 특이하다.
영어로 능소화를 '트럼펫 덩굴식물(trumpet creeper)'이라고 한 이유다.
학교 담장. 2012년.
복숭앗빛 같은 뺨의 ‘소화’라는 아름다운 궁녀가 있었다.
어쩌다 왕의 눈에 띄어 빈(嬪)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것으로 ‘승은(承恩)’도 끝,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세월만이 남았다.
기다림과 오매사복(寤寐思服)의 세월에 지쳐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유언에 따라 그녀는 자기 처소의 담장 가에 묻혔다.
여름이 되자, 그 여자가 묻힌 곳에서는 담장을 휘감고 덩굴로 자라는 아름다운 꽃 한 포기가 피어났다.
살아생전에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내다보려고 높게, 발걸음 소리를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벌린 그 꽃이 바로 능소화다.
능소화는 날이 갈수록 더 많이 담장을 휘감고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데 그 꽃잎은 정말 귀를 활짝 열어 놓은 듯하다.
▲ 마지막으로 근무한 학교 담장의 능소화. 그러나 지금 거기 능소화는 없다.
퇴직한 내 마지막 학교는 주도로에 바투 붙어 있었다.
첫 출근을 하면서 보니 한길을 따라 이어진 꽤 높다란 담장에 마치 말라붙은 등나무 줄기 같은 것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그게 무언지 궁금해했는데 능소화란 얘길 듣고 긴가민가했다.
머릿속에 떠올린 능소화의 모습과 그 바싹 말라붙은 줄기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5월로 접어들면서 능소화 줄기는 무성하게 잎을 매달기 시작했다.
황지우의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에서 노래한 대로 능소화는 비로소 ‘마침내, 끝끝내’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가 된 것이었다.
마치 말라죽은 나무처럼 보이던 그 앙상한 줄기에서 들불 번지듯 벋어나간 싱그러운 줄기의 생명력은 경이롭다.
능소화는 중국 원산의 갈잎 덩굴나무다.
담쟁이덩굴처럼 줄기의 마디에 생기는 ‘흡반’이라 부르는 뿌리를 건물의 벽이나 다른 나무에 붙여 가며 타고 오른다.
담장의 메마른 콘크리트 벽을 타고 오른 능소화 줄기를 지탱한 것은 뿌리다.
능소화는 7~8월에 가지 끝에서 나팔처럼 벌어진 주황색의 꽃을 피운다고 하는데, 학교 담장에 피어난 능소화는 철 이른 꽃인 셈이다.
사진을 찍어서 바라보면서 능소화가 생각보다는 훨씬 고운 꽃이라는 걸 깨닫는다.
주황색의 좀 심심한 빛깔은 보정을 거치면서 훨씬 짙은 주홍으로 변했다.
사진기가 재현한 빛깔이 ‘공갈’이라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박남준이 노래한 능소화(“당신을 향해 피는 꽃”)를 읽는다.
그가 능소화를 부르면 어떤 여자가 불려 나온다고 했다.
맞다, 능소화는 그런 꽃이다.
시인은 또 능소화가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어 나무에, 돌담에/몸 기대어 등을 내거는 꽃’이라 했다.
그렇다.
능소화는 담벼락에 내걸린 꽃등이다.
▲ 경상남도 외도의 능소화



▲ 고향 마을 이웃집에 핀 능소화
학교 담장에 핀 능소화는 여름이 깊어지면 담벼락 전체를 뒤덮곤 했다.
등불처럼 내걸린 능소화를 쳐다보며 출근하는 길이 소담스러웠는데, 어느 해부턴가 담장의 능소화가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확인해 보니 나보다 반년 먼저 퇴직한 교장이 지저분하다며 베어내 버렸다 했다.
학교의 주요 환경을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만들면서 그는 구성원들의 의견 따위는 전혀 구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 학교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교사들과 소통 장애로 외면 받았던 그는 제대로 격식을 갖춘 퇴임식을 치르고 학교를 떠났다.
얼마 전 학교 앞을 지나는데, 능소화도 없는 그 골목길 이름이 ‘능소화길’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머무는 골목, 능소화가 피어나는 담장 따라
고성 하일면 학동마을은 17세기 말 전주 최씨가 정착한 유서 깊은 곳으로,
꿈에 학이 알을 품은 모습을 보고 터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지죠.
그 전설처럼 마을은 학이 알을 품은 형상의 명당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이름도 ‘학동(鶴洞)’이 되었답니다.
고성군 하일면 학동마을의 옛돌담과 능소화를 찾아 오늘 떠나 봅니다.
학동마을은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듯한 고요한 분위기 속에,
돌담을 타고 흐드러진 능소화가 정겨운 풍경을 만들어줘요.
담장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도 차분해지고,
그 시대의 흔적과 숨결이 스며드는 기분이 들죠.
능소화는 아침 햇살을 받으면 특히 더 고운 빛을 내니,
살짝 이른 시간에 도착하셔서 담장 아래 그림자와
햇살의 조화를 감상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능소화의 종류는 두 종류인데 예전 중국에서 건너 왔다는 토종 능소화와
미국에서 수입한 미국능소화가 있는데 이곳에도 몇 해 전 미국능소화로
수종 변경을 해 토종 능소화 보다 아름답지는 못합니다.
토종 능소화는 중국에서 건너와 오랜 세월 우리 풍토 속에
스며들며 자리를 잡은 덕분에, 그 선연한 꽃색과 섬세한 꽃망울이
돌담이나 기와지붕과 어우러질 때 유독 조화롭고 고운 느낌을 주죠.
그런 맥락에서 보면 학동 옛돌담 위에 피어나야
진정한 멋이 살아나는 꽃이 바로 토종 능소화인지도 모르겠어요.
미국능소화는 생육이 강하고 번식이 쉬워서 관상용으로 널리 식재되지만,
꽃송이의 형태나 색감, 그리고 주변 풍경과의 어우러짐에선
아무래도 토종에 비해 세련된 맛이 부족한 게 사실이죠.
특히 문화재급 돌담처럼 세월을 품은 공간에는,
그 공간만의 정취와 호흡이 맞는 식물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능소화에는 애틋하고도 슬픈 전설이 전해집니다.
옛날 어느 궁궐에 ‘소화’라는 이름의 궁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궁궐 안에 따로 처소를 하사받았지만,
그 후 임금은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고 해요. 소화는 매일 담장 곁에서 임금이 오기를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고,
결국 그리움 속에 병이 들어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떠난 뒤,
소화가 머물던 담장 위에 진한 주홍빛 꽃이 피어났는데, 사람들은 그 꽃을 그녀의 이름을 따 ‘능소화’라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하늘을 오르다’는 뜻의 한자 ‘능소(凌霄)’처럼, 그녀의 그리움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능소화의 꽃말도 ‘명예’, ‘그리움’, ‘기다림’ 같은 감정이 깃들어 있어요. 돌담을 타고 하늘을 향해 오르는 그 모습이,
마치 소화의 간절한 기다림을 닮은 듯해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리곤 하죠.
이 마을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선비 정신과 역사,
그리고 자연이 어우러진 특별한 공간이죠.
특히 능소화가 돌담을 타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모습은
마치 시간의 결을 따라 피어난 기억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돌담 위로 흐드러진 능소화처럼, 고요한 마을의 시간도 조용히 피어납니다.
학동의 여름은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