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디저트 ┃ 숙주나물에 얽힌 한 배신자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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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한민국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은 음식 중 하나가 마라탕이죠. 특유의 중국 향으로 거부감을 내비치던 사람들이 어느샌가 후루룩 마라탕을 마시고 있다는 자전적 고백도 이어지고 있어요. ‘혈중마라농도’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예요. 그만큼 주기적으로 먹어줘야 한다는 우스갯소리예요. 마라탕, 마라샹궈에 빼놓을 수 없는 재료가 ‘숙주’예요. 녹두(초록색 콩)의 싹을 숙주라고 하는데, 이 이름이 조선시대 집현전 학자였던 신숙주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어요. 어쩌다가 채소 이름에 선비 이름이 붙게 된 것인지. 오늘의 디저트에서 알아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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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주나물. /사진=국립국어원 |
신숙주는 조선 초기 천재 중 천재로 통한 선비였어요. 22세 때 장원급제했고, 45세에 영의정(오늘날 총리) 자리에 올랐어요. 역대 최연소 영의정이었죠. 당시 임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종대왕인데, 성군에게도 신임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위인이었어요. 집현전에서 매일 밤늦게까지 책을 읽을 정도로 지독한 독서광이기도 했어요. 세종대왕이 집현전에서 잠든 신숙주에게 곤룡포(임금의 웃옷)를 덮어준 일화도 유명해요. 훈민정음 창제에도 신숙주를 썼고, 아들 문종에게도 “신숙주는 크게 쓸 인물이다”라고 치켜세웠어요. 같은 집현전 학자인 성삼문과 함께 세종에 가장 애정을 받은 인물이었죠. 세종이 죽고 왕위를 이은 건 아들 문종. 그러나 문종의 삶은 길지 못했어요. 즉위한 지 2년만에 승하한 거였어요. 그에게 남은 건 10살 아들 단종이었어요.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삼촌인 세조가 왕좌를 빼앗기 위해 호시탐탐 노렸어요. 조정의 신하들은 파가 두 가지로 갈렸어요. 세조를 새로운 임금으로 지지하는 현실파 쪽(AKA 배신자)과 단종을 끝까지 지키자는 충성파 쪽이었죠. 단종을 위해 싸우고, 세조가 임금에 오른 뒤에도 단종을 다시 복위(復位·폐위되었던 제왕이 다시 그 자리에 오름)시키기 위해 노력한 충신들이 있었죠. 성삼문이 대표적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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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초상화. 당대 양반의 초상화가 희귀한 탓에 보물로 지정돼 있는 작품이다. |
그는 세종과 문종에 입은 승은(임금에게 받은 은혜)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단종을 버릴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결국 세조에 의해 역모죄로 처형당했죠. 이때 죽은 여섯 명의 신하를 가리켜 ‘사육신’(死六臣)이라고 불렀어요. 단종도 유배지 강원도 영월에서 결국 사약을 받으면서 열 여섯 한 많은 삶을 마감했어요. 새 임금 세조에 줄을 댄 신하들은 승승장구했어요.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죠. 그 중 한명이 신숙주였어요. 신숙주는 세종과 문종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새로운 권력으로 바로 돌아섰죠. 사람들이 신숙주를 두고 ‘변절자’라고 비난한 이유였어요. 당시 조선 사람들은 녹두나물을 즐겨 먹었어요. 녹두나물은 쉽게 상하는 음식이었는데, 이를 “신숙주 같다”면서 ‘숙주나물’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설이 있어요. 녹두나물이 악취를 풍기며 상하듯이, 신숙주도 더러운 행동으로 임금을 배신했다는 거였죠. 또 다른 해석도 있어요. 당대에 녹두를 짓이겨 만두소를 만들었어요. 이 나물에 숙주로 이름 붙여 짓이겨 뭉개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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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야, 꼭 이래야만 하겠느냐?" 단종의 초상화. |
숙주나물-신숙주 기원설은 명확히 확인된 사실은 아니에요. 이 설이 나온 게 신숙주가 죽고 한참 지나서인 1924년 문헌으로 처음 확인되기 때문이에요. 신숙주의 배신행위가 일제강점기에 크게 회자하면서 이 기원설이 나왔다는 반론도 있죠. 신숙주 기원설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신숙주 가문인 고령 신씨는 현재까지 숙주나물을 녹두나물로만 부르는 것으로 알려졌어요. 차례상이나 제사상에는 절대로 숙주나물도 안 올린다고 해요. 조상의 존함(추정이지만)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마뜩잖다는 의미겠죠. 마라탕의 숙주를 씹으면서, 세상을 떠난 단종과 성삼문을 위로해보시기를요. P.S. 단종 복위를 시도한 성삼문은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했어요. 아버지, 아들, 동생까지 모두 같은 형을 받았죠. 세조는 성삼문의 어머니, 아내, 딸을 모두 노비로 만들었어요.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해요. ‘난신(亂臣)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노비로 주고···’ 그런데 19년 뒤인 1475년 5월 7일. 실록에 차산과 효옥이 재등장해요 ‘…차산과 효옥을 석방했다.’ 두 문장의 행간에 효옥의 처절한 삶이 녹아있어요. 그 고난의 시간을 문학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 소설 ‘효옥’(전군표 지음, 난다 펴냄)이에요. 지난 주말 ‘효옥’을 읽고 이번 디저트를 소개하게 됐어요. 책 광고는 아니니, 역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길. 책은 언제나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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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성상문의 묘. /사진=국가유산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