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도약하려면… ‘반말’을 許하라

엄주엽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 / 김미경 지음/소명출판존댓말,어른 모시기도 하지만반말 통해 아랫사람 짓밟기도한국에 서열중심 인간관 고착소통 막고 사회를 늙게 만들어

“항상 ‘아니오(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어릴 때부터 키워야 비판적 사고가 자라날 수 있다.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해도 노벨상의 22%를 차지한 유대인. 2016년 한국을 방문한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대의 페레츠 라비 총장이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라는 질문에 대해 꺼낸 말이다.
한국을 몇 차례 방문한 그는 교수가 학생을 이름으로 부르고 학생은 깍듯이 ‘교수님’이라고 구분하는, 한국 대학에 만연한 서열 문화를 유심히 보았다.
그는 “한국 학생들의 우수함은 이스라엘 학생들보다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한국에서는 지나치게 커 창의적인 사고를 가로막고 있다”고 진단했다. ‘평등한 언어’의 소통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본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대학에서 학생과 교수는 서로 이름을 부르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게 일상”이라고 덧붙였다.
2010년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기자회견에서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질문이 없는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그래도 침묵이 이어지자 “누구 없나요?”라고 여러 차례 재촉했고 끝내 한국 기자들의 질문은 없었다.
대통령이 윗사람으로 인식되고 윗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이 버릇없는 행동으로 이해되는 문화, 대통령 기자회견을 만들어진 시나리오대로 진행해온 한국 기자들에게 ‘평등한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 책의 저자 김미경 대덕대 교양과 교수는 말한다.
영어학 박사지만 오히려 한글의 우수성을 설파하는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한글’(2006),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한국어의 힘’(2011, 이상 소명출판) 등으로 이름을 알린 저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존대법을 가진 한국어의 문제를 이 책에서 다룬다.
한국 사회가 또 한 번 비약하기 위해서는 “계급주의적인 존대법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수적”이라고 파격적으로 제안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천 년 동안 한반도의 양반과 지식인들은 존대법의 가치를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이미 천 년도 전에 중국어에 존대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다른 것은 모두 중국을 따라 하면서도 존대법만은 지켜왔다.
그들은 항상 존대법의 수혜자였기 때문이다.
존대법은 지금도 한국인들의 잠재의식을 장악하고 있다.
19세기 말 한반도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 처음 존대법에 대해 의심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쉬운 민주적인 문자인 한글과, 가장 비민주적이고 계급차별적인 존대법을 가진 한국어의 양면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선교사들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수많은 언어에서는 없었던 ‘예수 존대법’의 혼란을 겪었고 그 논란은 지금도 여전하다.
인류에게 ‘만인 평등’을 심어준 혁명적 예수는 한국어를 만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존댓말을 하거나 반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한국의 ‘성경’에서만 사람들을 하대(下待)한다.
존대법은 서열 중심의 인간관을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정서 속에 고착화하는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장치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을 운운하며 자랑하지만, 세계 7000여 개 언어 중에 한국어처럼 존대법 이상으로 상대를 낮추는 하대법, 즉 반말이 발달한 언어도 없다.
존댓말로 웃어른을 모시기도 하지만, 반말로 아랫사람을 짓밟는 ‘갑질’이 난무하는 두 얼굴의, 이율배반적 어법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존대법에 익숙한 한국인은 위아래가 정해지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어한다.
중국에 간 여섯 살짜리 한국 남자아이가 네 살짜리 중국 아이의 반말에 주먹을 휘두른 일이 있었다.
반말 때문에 살인까지 벌어진다.
존대법 때문에 한국인들은 만나자마자 나이를 먼저 묻고, 서로 이름보다는 직위로 부른다.
한국어 존대법은 이 나라 구석구석 어디에서나 나이와 계급에 대한 우선권을 강요한다.
중학생까지 세계 최고의 학업 성적을 자랑하지만, 대학생이 되면 최하의 경쟁력을 갖는다.
21세기 글로벌 사회에서 뒤처지게 하고 사회를 늙게 한다.
저자는 “존대법으로부터의 해방은 단지 문법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며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미래 한국의 생존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잠재의식마저 장악한 존대법을 어떻게 벗어버릴 수 있을까. 2002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신화는 히딩크의 ‘반말 전략’이 주효했다.
히딩크는 그라운드라는 공식적인 영역에서 말의 평등을 실현하며 경기력을 향상시켰다.
기업에서도 이를 본받아 한때 호칭 파괴 바람이 불었으나 종국에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저자는 존대 문화의 극복을 위해서는 먼저 “존대법의 숨은 논리를 우리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바탕에 깔린 비합리적 요소와 오랜 폐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아래위 모두 ‘상호존대’를 하든지 ‘께, 께서’ ‘-시’ ‘-요’ 등을 생략하는, 아예 규칙이 없는 ‘평등어로서의 짧은 말’ 등을 제안한다.
너무 필요하지만 너무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래도 한국어 존댓말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논의돼야 한다.
241쪽, 1만5000원.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반말에 대한 고찰 [반말 주의]

안녕? 지난번 우리의 탄생기에 보내준 보팅, 팔로우, 댓글 그리고 리스팀 너무너무 고마워:)

팀 계정@teamdust의 첫 글인 <생산1팀> 탄생기의 반응을보고 먼지들은 한동안 매우 고무되었었어. 우려했던 바와 달리 스티밋의 가능성을 본 것 같아서 기쁘고 흥분되었었지.
그런데, 바로 생산물을 쏟아내게 될 줄 알았던 우리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어. 우리를 기대하는 독자들이 생긴다는 점이 그 고민의 시작이이었고, 그 기대에 부응할만한 생산물의 퀄리티 그리고 정기성 이런것들을 고민하게 되었거든. '독립러'로 자석처럼 끌렸던 우리는 이제 막 서로에 대해 흥미롭게 알아가는 시기여서 조심스럽기도 했어. 그래서 이 글을 쓰기전까지 몇번의 만남이 있었고, 4월30일 모임에서 너무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게 되었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방향을 정하기도 했고, 구체적인 목록을 만들었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진행할 이벤트까지 상상했던 시간이었거든.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어. 우리 이런 에너지들이 앞으로 글에 잘 녹아나길 바라며, 첫 이야기로 '반말'에대해 이야기해볼까해.


반말에 대한 고찰

반말
'반말'을 주제로 정한 이유는 스티밋의 #kr-gazua에서 반말로 올라오는 포스팅 때문이었어. 존댓말로 쓰인 글과 반말로 쓰인글의 온도차를 느낀거지.

아름다운(@armdown) 철학자님과 반말로 소통해보니 '그래, 이거야!' 라는 느낌이 들었어. 말하는 방법을 바꿨을 뿐인데 평등해지는 기분이 든다.
먼지 @oh-really

아그래요 : (형) 나도 사고 싶어서 거래소 들렀는데 전용번호 발급불가래 ㅜㅜ

일단은 용기내어 반말을 써봤어. 반말 댓글 하나가 나를 엄청 고민하게 하더군. 형이라는 호칭부터가 망설여졌어. 가즈아에 형만 있어서 일단 형이라고 적었다가 결국에는 호칭을 빼는 것으로 수정했어. 먼지 @oh-really

현실의 아그래요는 아름다운 철학자님 강의를 공개든 청강이든간에 언젠간 접해보려고 노리고 있는 존댓말이 매우 익숙한 학습러야 . 인터넷 세계에서 '형'이 친근한 용어로 사용되곤 하는데, 남성 유저들에게는 아무렇지 않겠지만 여성 유저들에겐 늘, 저기에 낄 수 없는 존재인가 망설이게 했어. (아마 굳이 여성임을 드러내지 않고 '형'이라고 쓰는 여성 유저들도 있을 거라고 봐. 남성중심적인 커뮤니티에서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에서든 여성임을 드러내는 건 피곤한 일이거든.)

아름다운철학자 : 아래 좌표 참고해. 나도 거래소 지갑 없어.

오~ 그런데 반말로 좌표까지 찍어서 대답이 오는거야. 뭔가 이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인데 선생님에게 반말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의외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게 신기했어. 물론 사이버 공간이니까 가능한 일인것을 아주 잘 알면서도 말이지.
먼지 @oh-really

아그래요: 고마워 도전해볼게.

그리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대화를 마무리 했어. 이 반말 경험으로 몇가지 떠오르는 생각을 말해보려고해. 갑자기 또 나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지만 가정에서는 반말, 일터에서는 존댓말, 학교에서는 나보다 나이많은 사람에겐 존댓말 나이적은 사람에게 반말을 사용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 무의식적으로 '나이'를 작동시키는 나를 발견한거지.
학교의 문화가 그런거도 아닌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사용해왔더라고. 놀라웠어. 그렇다고 나는 늘 '나이'를 작동시키는 사람도 아니야. 존댓말로 시작된 관계인 친구와 말 놓자고 한 후에 다시 존댓말로 돌아갔던 경험도 여러번 있었거든(아 이 경우는 동갑인 친구네?). 생각해보니 특별한 사이가 아닌이상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반말을 사용해 본적이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가즈아에서 생각이 무척 많아졌구나 싶어. 그렇다면 내게 반말은 '친밀함'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디시인사이드'가 떠오르더라. 유일하게 내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인터넷 문화의 시조세 같은 존재지.
'일베'나 '메갈'과 같은 커뮤니티도 다 디시인사이드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거든. 이 커뮤니티는 스티밋처럼 보상을 주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콘텐츠들이 쏟아지고 있고, 수많은 인터랙션이 이루어지고 있어. 아직도 이렇게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커뮤니티라는게 놀라울 정도야. 나는 '익명'이 주는 평등성이 이렇게 활성화하게 하는 이유일거라고 생각해. 물론 혐오의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주요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야. 이런 '익명'기반인 커뮤니티는 '솔직함'이 있는 거 같아. 굳이 거짓말 할 이유가 없는거지.
반말을 하든 패드립을 하던 또라이짓을 하던지 상관 안해. 먼지 @oh-really

언어학적 고찰

국어학자들은 반말이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는 말'이라고 해. 그러니까 반말은 중립적인 위치에서 하는 말이지, 듣는 사람을 하대하는 말이 아니라는 거지(이유기,2011). 국어에는 높임:안높임 체계만 있지, 상대를 낮추는 말은 없대.

역사적 고찰

그런데 반말을 쓰면 공손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한국어가 '높임말 평준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 김광식(2014)이라는 철학자는 한국 사회 말의 역사는 높임말과 반말 싸움의 역사였다고 하면서 모두가 평등했을 때는 반말을 썼지만,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계급이 생기면서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여전히 반말을 하지만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높임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 높임말을 썼잖아. 꼬마 도령에게 나이 많은 종이 높임말을 썼어. 어린 왕에게 나이많은 신하는 존대를 했지.
꼬마 신랑에게 연상의 아내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어. 과거엔 신분, 성별에 따른 위계질서를 만드는 게 높임말이었던 거야.

모두가 높임말을 쓰게 되면서 봉건적 신분제를 깨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해.

그럼 신분이 없어진 지금은 누가 높임말을 쓸까? 나이에 따라, 회사에선 직급에 따라, 학교에선 학번에 따라 철저하게 높임말을 쓰잖아. 스물 한 살이 스무 두 살한테 꼬박꼬박 존대하며 '선배님'이라 하는 거, 우리는 그게 무슨 동방예의지국 전통인 줄 알잖아? 채현국에 따르면, 후배에게 하대하는 문화는 일제시대 때 왜놈들 문화에서 왔대. 퇴계는 스물여섯살이나 어린 기대승과 논쟁을 벌이면서도 하대하지 않고 '~하게'라고 예우해서 말했다는 거야.
채현국,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 두어라. 

사회학적 고찰

김광식(2014)이란 학자는 모두가 높임말을 쓰기로 하니까 아랫사람만 높임말을 쓰고, 윗사람은 자기 편할 대로 반말을 쓰니까 아직 언어적 불평등이 남아있다고 했어. 그래서 그는 모두가 높임말을 쓰기보다,
모두가 반말을 쓰자고 주장했지.
아랫사람도 반말을 쓰게 해야 결국 평등해 진다는 거지.

반말로 맞서는 아래사람이 잃을 것은 순종 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모든 아랫사람들이여, 반말로 단결하라. (김광식, 2014)

은밀하거나 공공연하게 반말과 높임말이 존재하는 관계는 인권침해가 일어날 수 있는 관계래. 공감이야.

<생산 1팀>은 사용자에게 보상이 가는 플랫폼인 이곳에서 콘텐츠를 생산해보기로 했잖아. 생산 방식을 '구어체' + '반말(비격식체)'로 하려고 해. 물론 첫글부터 반말로 시작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쭉 반말을 사용할 것이고 댓글도 반말로 해줬으면 해. 연구 같은 문어체의 딱딱한 글을 친근한 언어로 풀어보면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이 있기도하고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답게 평등하게 우리가 표현하고 소통해보면 놀라운 표현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끝내며, 닷페이스에서 제작한 영상하나를 소개할게. 현실에서 반말 소통이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컨텐츠야.
20살 차이나는 선생님에게 반말하기


이유기 (2011). 반말의 성격과 청자대우체계의 실상. 동악어문학, 57, 49-82.
김광식 (2014). 한국사회에 반말공용화를 묻는다 - 인지문화철학자의 반말 선언. 사회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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