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만에 풀린 뭉크 '절규'의 비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에 연필로 적힌 글씨. 사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Børre Høstland 제공

에드바르 뭉크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20세기 모나리자로 불리는 작품 ‘절규’에는 연필로 쓴 글씨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신가요?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절규’(1893년) 이야기입니다. 글씨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그림’

뒤늦게 발견된 이 글씨를 누가 썼느냐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미스터리인데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연구팀이 재개관을 준비하며 그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글씨를 쓴 범인은 바로 뭉크였습니다.
'나는 미친 사람인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1938). 사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제공
이 글씨가 뭉크의 필적이라는 여러 가지 근거 중 하나는 1895년 어느 모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뭉크는 이 때 ‘절규’를 오슬로의 갤러리에 전시합니다. 전시에 관해 학생 토론회가 열린 밤, 한 의대생이 뭉크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그린 사람의 정신 상태가 의심됩니다.”

뭉크는 이 말에 큰 상처를 받습니다. 몇 십년이 지났을 때도 이 때 일을 곱씹으며 일기에 적었을 정도로 말이죠.

자신의 그림을 폄하하는 말을 듣고 난 뒤 어느 시점에 뭉크가 직접 글씨를 새겨 넣었다는 것입니다.
뭉크가 쓴 글씨의 적외선 촬영본. 사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Børre Høstland 제공
이밖에 그림을 적외선 촬영하고, 뭉크의 일기 속 필체와 대조한 결과 그가 쓴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미술관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뭉크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상상을 해보면 홧김에 적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나는 미친 사람인가?’ 고민하며 슬퍼서 적었겠다고 짐작할 수도 있죠.

저는 뭉크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불안을 평생 곱씹은 화가
뭉크는 ‘미친 사람’ 일화 말고도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여러 차례 떠올리며 그 때의 감정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누나 요한네 소피(1862~1877)의 죽음이죠.

어린 시절 결핵으로 어머니에 이어 누나까지 잃은 뭉크는 22세였던 1885년 처음으로 병상에 있는 소피를 담은 ‘아픈 아이’(The Sick Child)를 그린 뒤 40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같은 주제를 반복해 그립니다.
에드바르 뭉크, 아픈 아이(The Sick Child), 1885~1885, 사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 Børre Høstland
뭉크가 이 기억을 그린 이유는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느껴지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아픈 아이'에 대해 남긴 말입니다.

"처음엔 인상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나의 요동치는 감정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아픈 아이'를 그리며 내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뭉크 이전의 화가들이 이상적인 상상의 세계를 그리다가(아카데미 역사화),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표현하기를 시도(인상주의)했는데 뭉크의 시대에 이르러 미술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뭉크의 작품은 결국 나를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과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곱씹은 결과물입입니다.

그러니 ‘미친 사람’이라는 비난을 글로 새긴 것은, 그 말을 들었을 때 흔들린 나 자신과 거기서 일어나는 감정을 관찰하기 위한 일종의 화두였을 것입니다.
'절규'가 아이콘이 된 이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뭉크가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화가들은 여러 감정을 표현했지만 그것은 성경 속 일화나 역사적인 사건, 신화에 빗대어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뭉크는 가족의 죽음, 연인과의 다툼, 관객의 비난, 실연의 고통 등 아주 개인적인 삶에서 겪는 감정을 파고 듭니다.

 

‘절규’ 역시 어느 날 친구와 오슬로의 다리를 건너다 불현듯 휘몰아치는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뭉크가 글로 쓴 ‘절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895년 만든 '절규'의 리소그래피 판화.

나는 두 친구와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갑자기 하늘이 피로 물들었다.

나는 지쳐서 잠시 멈춰 울타리에 몸을 기대었다.


검푸른 바닷가와 도시 위에 피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화염이 치솟았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불안에 떨며 혼자 서 있었다. 그 때 온 세상을 찢을 듯한 끝없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제가 오늘 ‘절규’에 대해 쓰게 된 것은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취재를 갔다가 보고 느낀 것 때문인데요.

이 미술관에서 ‘절규’ 옆은 늘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으며, 미술관 중심에 전시돼 노르웨이 미술을 소개하는 관문 역할도 하고 있었습니다.

문화재 급으로 중요한 대접을 받는 ‘절규’. 그만큼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뭉크가 1906년에 그린 철학가 니체의 초상. 사진 노르웨이 뭉크미술관
그것은 뭉크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역사나 예술이 외면했던 개인의 불안, 슬픔, 고통을 곱씹으며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혼자일 수 밖에 없다는 외로움, 언젠간 맞아야 할 결말인 죽음,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 라는 의문 같은 것들.

살면서 느끼는 이런 감정들은 종교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묻혀 좀처럼 생각되지 않는 것들이었죠.

그러나 20세기 전환기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처럼 개인을 중심에 두고 오래된 이데올로기를 부수는 학술적 결과는 물론 과학, 기술, 사회에서 많은 것이 변화하며 터져 나오는 개인의 감정, 욕망, 불안, 이런 것을 ‘절규’는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절규'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작품이 되었죠. 여기에 새겨진 '미친 사람이 그릴 그림'이라는 글씨, 자신이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대면하려 했던 예술가의 흔적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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