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와 복기의 차이


성적, 승진은 물론이고 가위바위보에 져도 화가 치밀고, 남들이 못 사는 한정판은 꼭 사야 만족한다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성공하고 쟁취한 순간은 짜릿하지만 곧 허탈해지고, 졌을 때는 상황을 반추하며 뒤척이다 밤을 새기도 한다.
그들의 반추는 언뜻 바둑의 복기를 연상시킨다.
문득 조훈현 9단의 “이기는 기쁨에 비해 지는 고통이 너무 커서 결국 이기기 위해 복기한다”는 인터뷰가 떠올랐다.

반추와 복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반추는 이미 끝난 나쁜 상황을 곱씹고 곱씹는 것으로 심리학자들이 최악의 감정적 습관이라 부르는 것이다.
반추가 반복되면 나빴던 과거가 몸과 육체에 들러붙어 끝없이 악영향을 끼친다.
바둑의 복기 역시 경기가 끝난 후 이어진다.
바둑기사들은 경기 후, 자신이 둔 한 수 한 수를 분석해 무엇이 좋고 나쁨을 분석하고 더 좋은 다음을 준비하는데, 그것이 복기다.

반추와 달리 복기는 ‘이기든 지든’ 무조건 한다.
복기의 기능은 승리와 패배 모두에서 배운다는 대원칙에 있다.
조훈현은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패배한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아플수록 더 철저히 복기하는 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2016년, 이세돌 9단은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를 이기기 위해 평소라면 절대 두지 않을 ‘악수’를 둔다.
패배를 예견하면서도 ‘그 수’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전략적 후퇴였다.
바둑 기사에게 이미 지난 승부보다 중요한 건 그 승부를 통해 더 나은 수를 두는 것이다.
그것이 바둑 기사의 진화다.
결국 이세돌은 알파고를 이겨 본 인간 유일의 바둑 기사가 된다.

당장 이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지는 게 두려워 회피하거나 반칙, 꼼수를 쓰게 된다.
지혜로운 교육자가 아이의 성적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자체를 평가하는 이유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지는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해도 질 수 있다.
중요한 건 승리든 실패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행복과 쾌락이 다르듯 성장과 성공 역시 다르다.

이명이 찾아왔을 때

이명(耳鳴) 때문에 청력을 검사했다.
청력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고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더니, 의사가 백색 소음이 수면에 도움이 될 거라며 몇 가지 소리를 추천했다.
그는 사람의 목소리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꼭 침대맡에 오디오북이나 팟캐스트를 틀어 놓고 자는 오랜 버릇을 들킨 것 같았다.

활동하는 낮에는 크게 느끼지 못하다가, 자려고 누우면 선명해지는 이명은 높낮이와 볼륨을 달리하며 나를 괴롭혔다.
추천받은 빗소리·비행기 소음, 극저음 싱잉볼 등 다양한 백색 소음을 들었다.
그러다 점점 그냥 빗소리가 아니라 천둥이 섞인 빗소리나 폭우가 쏟아지는 대륙 횡단열차, 런던행 브리티시 에어라인의 밤 비행기 소리 같은 걸 찾아 들었다.
오른쪽 귓속에서 시작된 웅웅대는 이명의 주파수와 꼭 맞는 소리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 같았다.

실제 눈을 감고 누우면 2만피트 상공의 밤하늘을 날거나, 오리엔탈 특급열차에 올라탄 기분이 들었다.
이코노미 중간석이 아닌, 일등석에 앉아 풍경을 보는 것 같은 안락함은 덤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매미 소리를 틀고 잔 어느 밤에는 잊혔던 어린 기억이 떠올라 배시시 웃었다.
나만 모를까 봐 불안해서 습관적으로 켰던 지식 콘텐츠가 사라지자 밤의 상상들이 찾아왔다.
창밖은 봄, 방 안은 장마철 한여름, 어긋난 계절의 시차도 싫지 않았다.
그리고 꼬리를 무는 상상은 내 수면에 도움이 됐다.

의사는 이명에 가장 안 좋은 게 너무 조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소란스러운 카페에서 쓴 원고가 몇 권의 책이 됐던 일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로나 이후, 더 위생적으로 키워진 요즘 아이들이 비염이나 아토피에 취약해진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명과 비문증이 생긴 후, 나는 더 이상 조용하지 않고 또렷하지 않은 세상에 적응 중이다.
다만 시끄럽고 흐릿하니 나에 대한 악담은 덜 들리고, 남에 관한 허물은 덜 보이길 기도한다.
‘적응하면 괜찮아진다’는 말은 결국 사라짐이 아닌, 받아들임과 익숙함에 관한 이야기다.

꽃과 잎새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벚꽃이 비처럼 내리던 날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프러포즈하는 연인을 보았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각자의 연인이 있는 두 남녀가 붐비는 뉴욕의 백화점에서 딱 하나 남은 장갑을 동시에 잡은 채, 한눈에 반해 서로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 반나절을 함께 보낸 후, 끌림과 죄책감 사이에서 여자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그녀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은 후 남자에게 책을 헌책방에 팔겠다고 말한다.
책이 돌고 돌아 당신에게 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세렌디피티’는 우연한 발견이나 행운을 뜻한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각자의 연인과 헤어진다.
남자는 이후 7년이나 책을 찾아 헤매는데 엉뚱하게 이 책을 누군가에게 우연히 선물받는다.
“우리가 함께 책방에 갈 때마다 당신이 이 책을 찾는 걸 봤어!”라는 말과 함께. 문제는 선물을 건넨 사람이 남자의 약혼녀라는 사실이다.
남자는 운명을 다시 찾기로 결심하며 일이 꼬인다.

이 문제의 책은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다.
소설에서 부유한 상인의 딸 페르미나를 사랑한 가난한 청년 플로렌티노는 그녀를 잊지 못해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 큰 부를 이룬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그녀를 만나는데 그것은 페르미나의 남편 장례식장에서였다.
그는 마침내 그녀에게 오랜 마음을 고백한다.
무려 51년 9개월 4일 만이었다.

운명적 사랑을 믿는다는 말은 허황된 걸까. 처음 남자에게 그 여자는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연을 우연으로 놔두지 않고 7년이나 책방을 뒤졌고, 그런 행동이 결국 이 책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수없는 엇갈림 속에 서로를 찾아내는 기적은 그들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 앞에 놓여야 할 말은 신의 선물인 ‘우연’이 아니라 노력해온 인간의 ‘의지’다.
벚꽃 아래에서 맺어지는 연인을 보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부디 기억해야 할 건 꽃으로 사는 시간은 짧다는 것. ‘꽃’이 진 후, ‘잎’으로 사는 시간이 진짜 인생이다.

어제 우리가 한 일

큰 성취를 한 이들에게 정체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물으면 “어떻게 하긴요, 그냥 해요”라고 답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냥’이란 말에는 그들 특 의 루틴이 있는데, 이것을 정리한 책이 댄 애리얼리의 ‘루틴의 힘’이다.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이 ‘내 기타가 조용히 우는 동안’을 작곡한 건 어머니 집에 머물 때였다.
극도로 지쳐 있던 그는 집에서 아무 책이나 펼쳐서 나오는 단어로 곡을 만들기로 했고, 그때 눈에 들어온 문장이 ‘조용히 울다’였다.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는 그렇게 탄생했다.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는 매일 아침 떠오르는 단어를 적었다.
호수, 군중, 밤 열차 같은 단어를 적으며 그는 그 단어와 반대되거나 비슷한 단어를 재배치해 자기 삶과 연관시켰다.
그러면 재밌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창작이 막혔을 때 많은 예술가들의 탈출구는 산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예 걸어 다니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의 학파를 ‘소요학파’라 부르는 이유다.
내 경우 아무 버스나 타고 낯선 동네를 걷는 루틴이 있는데, 그렇게 길을 걷다가 ‘실연의 기념품 가게’ 같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의 일정표에는 독특하게 ‘일정 없는 일정’이 있었다.
빌 게이츠도 1년에 두 차례 호숫가 통나무집에서 자신에게 생각 주간을 선물했다.
여행 가방에 가장 유용한 게 물건이 아니라, 새로운 걸 채워 넣을 ‘빈 공간’이란 걸 그들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시인 김용택을 키운 건 8할이 심심함이었다.
그는 텅 빈 시간에 늘 나무와 꽃을 관찰했는데 그것은 종종 시가 됐다.

오래전, 방송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추운 겨울 바다로 몸을 던지는 해녀 할머니에게 피디가 바다에 해산물이 많냐고 묻자 별로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당황한 피디가 “근데 왜 들어가세요?”라고 묻자 해녀가 답한다.
“어제도 했었거든!” 힘들고 지친 그 순간에도 반복적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 그것이 나를 만든다.
결국 삶은 내 습관의 총합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사람들이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져보지 못한, 받아보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한 회한이다.
여기에 후회보다 무거운 ‘회한’이란 말을 쓰는 건 해본 것보다 해보지 못한 것을 오래 기억하는 우리의 심리 구조 때문이다.

심리학에는 ‘재양육’이라는 말이 있다.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를 불러내 다시 양육하는 것인데,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스스로 채우는 것이다.
중요한 건 거짓된 반응 없이, 솔직하게 받고 싶었던 사랑을 어른이 된 지금, ‘내가 나에게 주는 것’이다.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진심 어린 사과, 성적이나 성취에 상관없는 지지와 자유, 부족하고 모자란 나로도 사랑받고 있다는 굳건한 믿음 같은 것 말이다.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기에 우리 중 누구도 100%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다.
자식도 자식이 처음이듯 인생은 편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우리를 채울 사람은 그러므로 결국 나 자신뿐이다.
그러니 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때, 등대 같은 삶의 주문 하나는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안전지대라 부른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10년 된 반려견이나 30년 지기 친구일 수 있고, 옛 동네 놀이터의 벤치나 자물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일 수도 있다.

우울할 때, ‘My favorite things’를 부른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수녀가 천둥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불러주던 노래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장미 꽃잎과 크림색 조랑말, 바삭한 사과 과자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열해 개사해 부른다.
따뜻한 밀크 티와 오트밀 쿠키, 모닥불 타는 냄새와 4월의 벚꽃 비, “내일은 아직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요?”같은 빨간 머리 앤이 한 말들을 적는다.

우리가 좋아했던 것을 애써 기억하고 기록하는 건 깊은 개울 위에 돌덩이를 내려놓는 것과 같다.
폭우가 쏟아져 물살이 거세졌을 때, 미리 내려놓은 그 돌덩이 하나하나가 어둠 속 반딧불이처럼 길이 되어줄 것이므로.

관점에 대하여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갑자기 날씨가 변해서 비를 맞게 되는 경우가 있다.
비를 피해 카페의 2층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았다.
문득 산속 홀로 서 있는 웅장한 소나무를 볼 때, 화가와 목수의 시선이 다르다는 스님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림의 소재인 멋진 노송을 무참히 베는 목수가 화가의 눈에는 ‘악’이지만, 목수에겐 튼튼한 집의 기둥이 되는 것이 ‘선’이니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관점의 차이로 가까웠던 사이가 소원해지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정치·경제·젠더·세대·환경 등 다양한 이유로 관점이 달라 심지어 서로를 증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익명성 뒤에 숨는 온라인과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SNS와 유튜브에서는 동종 교배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동종 교배가 위험한 건 필연적으로 열성 인자를 만들기 때문이다.
열성 인자가 지속되면 결국 그 종은 멸종에 이른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은 대가는 크다.
무엇보다 관점이 다르다는 게 곧 틀림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태평양도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동해이지만, 미국인의 관점에선 서해이다.
같은 바다를 두고도 보는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부르지만, 바다의 본질은 결국 바다인 것이다.

이해를 뜻하는 영어의 Understand는 Under와 Stand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낮은 위치에 서 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신이 늘 우월하다는 자만심으로는 서로 갈등만 증폭되고 오해만 축적될 뿐이다.
머릿속의 오해가 가슴속의 이해로 가는 길은 이처럼 멀다.

우리는 화가인가, 목수인가. 삶의 현자는 아름다운 그림과 튼튼한 집 모두를 보는 사람일 것이다.
한 시간을 오도 가도 못한 채 카페에 갇혀 비를 보는 일은 분명 효율적 관점에서 낭비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떠도는 생각을 붙잡아 원고 쓸 아이디어를 얻었으니 내겐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똥은 방에 있으면 오물이지만, 밭에 있으면 훌륭한 거름이다.
인식의 틀부터 만들어 나를 가둬 두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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