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나온 책 『유전자 로또』는 여전히 회자하는 ‘문제작’이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 만 2~3세 때부터 맹렬히 학습하는 한국 사회에서 “공부 잘하려면 타고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캐스린 페이지 하든(심리학과)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교수는 “공부 잘하는 유전자를 타고나야 공부도 잘하고 사회적 지위뿐 아니라 부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책에서 주장하는 말이 맞다면, ‘7세 고시’로 모자라 ‘4세 고시’를 치르는 한국의 유별난 교육열은 소용없는 짓이다. 공부 잘하는 유전자를 물려주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그 어떤 것도 기대해선 안 되는 걸까? 설령 그렇더라도 아이의 성공을 위해 양육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도발적인 주장을 하는 미국의 행동유전학자 하든 교수를 인터뷰하기로 한 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러 경로로 그를 접촉한 끝에 지난달 이메일 인터뷰에 성공했다.
Intro 4세 고시, 소용없다?
Part 1 어머님, 공부는 타고나는 겁니다
Part 2 그래도 환경은 힘이 셉니다
Part 3 그런데 공부 잘해야만 성공하나요?
아이에게 피겨스케이팅이나 축구를 가르치면서 김연아 선수 혹은 손흥민 선수처럼 되길 바라는 양육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학습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 일찌감치 서둘러 열심히 시키면 소위 명문대에 들어가는 게 불가능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 1등도 아니고, 한국에서 비슷한 또래 사이에서 상위 10% 안에 드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하든 교수는 “유전자가 시험 성적, 대학 진학 등 학업 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이 가진 각각의 유전자가 학업성취도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지 통계적으로 예측하는 ‘교육 다유전자 지수’를 만들어냈다. 하든 교수는 “이 지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벽하게 예측하진 못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지수인 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 199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닌 백인 1000명의 교육 다유전자 지수를 산출했는데, 이 지수가 높을수록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이 높았습니다. 지수가 높을수록 고학력자도 많았어요. 교육 다유전자 지수가 가장 낮은 그룹의 경우 10명 중 1명(11%)만 대학을 졸업했는데, 이 지수가 가장 높은 그룹은 10명 중 5명(55%)이 대학을 졸업했을 정도예요. 차이가 상당하죠? 그리고 이 지수가 낮은 학생들은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가 될 가능성도 높았어요.
- 1994~95년에 고등학생이었던 미국인 약 3000명을 대상으로 연구했는데, 교육 다유전자 지수가 높으면 수학 과목에서 더 높은 성취도를 보였어요. 고등학교에선 미적분 같은 고급 수학을 배우는데요, 이때 수학을 잘한 학생들이 이후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요. 반면에 교육 다유전자 지수가 낮은 학생들은 수학을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그러니까 유전자가 수학 학습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 부모가 공부를 잘하면 아이도 공부를 잘하겠네요? 유전자는 결국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거니까요.
- 다른 유전학자나 경제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교육 다유전자 지수가 높은 아이일수록 부모의 학력이 높은 경향이 있었어요. 학력이 높은 부모는 관련 유전자를 갖고 있을 거잖아요. 이 유전자가 자녀에게도 영향을 주는 거죠. 흥미로운 사실은 이 유전자가 부(富), 그러니까 경제적인 성취와도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 연구 결과는 그래요. 교육 다유전자 지수가 높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은퇴 시점 기준으로 25% 정도 더 많은 자산을 보유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거든요. 결국 공부 잘하는 유전자를 타고나면 더 높은 교육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그 결과 더 높은 소득을 얻어 더 많은 자산을 축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 타고난 공부머리가 없더라도 노력을 통해 학업 성취도를 끌어올릴 수는 없을까요?
- 노력, 끈기, 자기조절, 동기부여 같은 것들은 비인지 기술이죠. 지능지수(IQ)나 언어 능력, 수리 추론력 등은 인지 기술이고요. 사람들은 인지 기술은 유전된다고 생각하지만, 비인지 기술은 후천적인 거로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란성 쌍둥이와 이란성 쌍둥이를 비교해서 유전과 환경 영향을 비교하는 연구가 있어요. 이 연구 결과 비인지 기술 역시 유전 가능성이 60% 정도였어요. IQ의 유전 가능성(50~80%)과 비슷한 수준이었죠. 결국 타고나야 노력도 한다는 얘깁니다.
- 비슷한 그룹에서 결혼하는 동질혼이 늘면서, 공부 유전자도 양극화되는 것 같아요.
- 고학력자는 고학력자와, 저학력자는 저학력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죠. 이를 부르는 말도 있어요. ‘선택적 짝짓기(assortative mating)’라고요. 고학력자 부부의 아이는 유전적으로 공부를 잘할 확률이 높겠죠. 결과적으로 학업 성취도에서 유전적 격차가 커지는 겁니다. 그럼 사회적 계층 이동도 더 어려워지겠죠. 유전적 우위와 경제적 우위가 결합하면서 불평등은 더 심화하고요.
하든 교수는 "유전학은 예상보다 학교 성적이 낮을 수 있는 학생을 식별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면서 "그걸 바탕으로 그 학생에게 맞는 교육 환경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진 인텔리전스 스퀘어드
하든 교수가 서면으로 보내온 답변을 읽고 있자니 암담해졌다. 타고난 머리가 있어야 학업적 성취와 사회적 성취, 나아가 경제적 성취까지 얻을 수 있다니, 게다가 노력마저 타고나는 것이라니 그럴 만도 하다. 타고난 머리도, 노력하는 유전자도 물려주지 못했다면 아이의 성취를 꿈도 꿀 수 없는 걸까? 타고난 머리도, 노력하는 유전자도 타고나지 못했다면 나의 성취 역시 물 건너간 걸까? 이 질문에 하든 교수는 “유전의 영향이 크다곤 하지만 그 영향력이 100%는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환경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했다.
- 유전의 영향을 그렇게 강조하시더니, 말을 바꾸시는 건가요?(웃음)
- 유전적 영향이 큰 건 맞아요. 하지만 부모의 교육 다유전자 지수가 높다고 모든 자녀가 다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닙니다. 저의 두 아이도 그렇습니다. 저는 미국 대학입학시험(SAT)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고, 전액 장학생으로 퍼먼대에 들어갔어요. 버지니아대에서 임상심리학 석박사를 마치고 30대 초반에 택사스대에 임용됐고요. 전 남편 역시 같은 공부를 한 박사입니다. 그런데 첫째는 두 돌이 되도록 단어를 몇 개밖에 말하지 않아서 애를 태웠습니다. 반면에 둘째는 청산유수고요. 유전자의 영향이 100%는 아니라는 겁니다.
- 유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나머지는 그럼 환경의 영향인가요?
- 맞아요. 공부를 잘하는 유전자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유전자가 어떤 환경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그만큼 환경도 중요하단 거죠.
- 그렇다면 어떤 환경을 조성해 주면, 공부에 도움이 될까요?
- 공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 그리고 학습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아무래도 도움이 되겠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은 환경도 좋습니다. 실제로 교육 다유전자 지수가 낮아도 학업성취도가 높은 학교, 소위 명문학교 학생들은 수포자가 적었어요. 유전적으로 수학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도,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환경에 처하면 그만큼 성취도도 높아지는 거죠.
- 학군지에서 공부하는 게 학업 성취도 측면에서 더 효과적인 선택일까요?
-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체스든, 테니스든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 자신보다 조금 더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 연습하면 더 빨리 잘할 수 있잖아요. 학습도 마찬가지죠. 잘하는 친구가 많은 환경에선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어요. 다만 여기에서 빠져선 안 되는 게 있어요. 도전할 수 있는 분위기, 그리고 도전해서 실패하더라도 응원하는 분위기가 있어야 해요.
- 한국의 교육열은 긍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네요.
- 학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열심히 할 수 있게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건 분명 장점입니다. 하지만 응원하는 분위기는 부족한 것 같아요. 강의실에서 종종 한국 학생들을 만나요. 이 친구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성적에 대한 압박이 엄청나다는 겁니다. 경쟁에서 이기려고 해요. 많은 한국 부모들은 높은 성적을 받아 명문 학교에 진학해 특정 직업을 얻어야만 성공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국 학생들이 도전하고 응원하는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 한국에선 만 2~3세 무렵부터 학습을 시작해요. 만 4세에 유명 기관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치르기도 하고요. 이렇게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게 효과가 있을까요?
- 공부 유전자가 있는데, 환경까지 갖춰지면 확실히 효과가 있어요. 교육 다유전자 지수가 높은 아이들은 세 살이 채 되기 전에 말을 시작하고, 다섯 살 무렵이면 IQ 측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요. 그럼 양육자는 더 많은 인지 자극을 주고, 이게 선순환을 일으켜서 학업 성취도도 더 높아지고요. 공부 유전자가 없어도, 교육 환경은 중요해요. 일찍부터 인지 능력을 발달시키는 환경에 노출돼야 유전적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거든요. 그렇다고 어려서부터 외우고 쓰는 학습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발달 단계에 맞는 자극, 그리고 무엇보다 양육자의 지지가 핵심이에요.
하든 교수는 "공부 잘하는 유전자는 있지만, 환경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면서 "인간은 환경, 문화 등을 통해 자신과 자녀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사진 브레인바 콘퍼런스
하든 교수에 따르면 교육 다유전자 지수는 학업 성취도로, 학업 성취도는 다시 사회적 지위와 부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양육자들이 아이가 공부를 잘하도록 교육하는 건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히든 교수는 “공부를 잘해야만 사회적 지위와 부를 얻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학습에 있어 유전의 영향이 중요하지만 100%가 아니듯, 성공에 있어 교육 다유전자 지수의 영향은 크지만 100%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개인의 DNA는 다 다르고, 능력과 관심사도 다르다”며 “공부 외에도 사회에 기여하고 일정 수준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분야는 많다”고 말했다.
- 그래도 사람들은 공부가 성공에 이르는 가장 가성비 높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 사람들이 공부를 잘해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공부를 잘해야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사람들이 우생학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 같아요. 특정 유전자를 가져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유전자라는 게 무작위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개개인의 특질은 결국 출생 로또의 결과인 거죠.
- 무작위성이 있다곤 하지만, 로또 당첨 확률만큼 희박한 건 아니지 않나요?
- 부모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아이의 유전자형 조합은 무려 70조 가지가 넘어요. 70조 가지가 넘는 조합 중 하나의 조합으로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거죠. 그래서 제가 로또라고 표현한 거예요. 70조분의 1의 확률로 공부 잘하는 유전자를 받기도 하고, 70조분의 1의 확률로 키가 큰 유전자를 받기도 하고요. 그러니 아이가 공부 못한다고 나 닮은 거 아닌가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공부 잘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세요. 부자 중에 공부 못한 사람도 있잖아요.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았든,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고, 또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어요.
- 하지만 교수님은 공부 잘하는 유전자를 가지면 더 성공한다고 연구해서 밝혀내셨잖아요.
- 교육 다유전자 지수가 높으면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이 둘의 관계가 절대적인 인과관계는 아닙니다. 제가 반복해서 말씀드렸듯, 100%는 아니라는 겁니다. 성공적인 삶으로 가는 길은 교육적 성공 말고도 정말 많아요. 우리가 양육자로서 아이에게 제공해야 할 건 성공으로 가는 다양한 경로 아닐까요? 특히 한국은 교육적 환경 측면에선 이미 충분한 것 같아요. 반면에 다양성은 부족하고요. 더 좋은 교육적 환경을 제공하려고 애쓰기보다 다양한 성공의 경로를 알려주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든 교수는 저서 『유전자 로또』에서 "유전자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가 더 공정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개인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페이지 뉴턴
힙합 그룹인 에픽하이가 웹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다. 미국의 명문 스탠퍼드대를 나온 리더 타블로가 동료 멤버인 투컷을 ‘대치동 아빠’로 소개하며 “(투컷이) 애들한테 공부를 강요하는 걸 보면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슬프다”고 말했다. 그러자 투컷이 발끈하며 “그렇게 공부해서 결국 스탠퍼드 갔잖아” 하고 반박했다. 타블로는 바로 “그래서 지금 (대학교 중퇴한) 너랑 N분의 1 하잖아!”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게 이 예능의 백미다. “공부 잘해야만 성공하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하든 교수의 이메일 위로 이 예능 장면이 겹쳤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만 해도 하든 교수가 하려는 얘기는 결국 “다 타고나는 것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세 차례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그가 정말 강조하고 싶었던 건 유전의 영향력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한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는 유전자 조합이 70조 가지인 것처럼, 세상엔 70조 가지의 다양성이 존재해야 한다는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