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슈타트/dpa 연합뉴스
김상균 | 인지과학자·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어떤 사람이 챗지피티 같은 생성형 에이아이(AI)를 잘 쓸까?
2년간 다양한 사람과 협업하며 관찰한 끝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정밀한 실험을 거친 학술적 연구 결론은 아니다.
그저 주관적 경험에 따른 깃털만큼 가벼운 분석일 뿐이다.
먼저, 사회성이 높은 사람이 생성형 에이아이를 더 잘 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성이란 타인을 깊이 이해하고 관계를 조율하는 능력을 뜻한다.
반면 사교성은 넓은 인간관계, 낯선 이와의 즉흥적인 상호작용을 편하게 여기는 성향이다.
흥미롭게도 사교성만 높은 사람은 생성형 에이아이를 잘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성이 높은 사람은 대체로 인간관계에 신중하고 섬세하다.
사람과의 대화에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오해받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단계별로 접근한다.
그래서인지 에이아이를 대할 때도 차분하게, 자기 생각을 정리해 조금씩 풀어낸다.
마치 낯선 이와 처음 대화할 때처럼 말이다.
반면, 사교성 중심의 사람은 에이아이에도
바로 답을 달라고 직진하는 경향이 있다.
답이 기대에 못 미치면 에이아이 탓을 하기도 한다.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성향이 에이아이 활용에도 나타나는 셈이다.
두번째는 직급과 관련이 있다.
대체로 고위 직급자가 하위직보다 생성형 에이아이를 잘 못 쓴다.
이유는 단순하다.
평소 자기 직원에게 대충 말해도 결과물이 나오는 환경에 익숙해서다.
하지만 에이아이는 직급을 따지지 않으며, 직원처럼 오랫동안 내 눈치를 봐오지도 않았다.
내 설명, 요청이 엉성하면 결과도 엉성하게
제시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위 직급자는 에이아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 지점에서 한가지 자각이 필요하다.
그간 자신이 내린 애매한 지시를 직원이 얼마나 힘들게 해석하고 처리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간 성과가 잘 나온 것은 자신의 역량, 리더십이 좋아서가 아니라 엉성한 지시, 다시 말해 뒤죽박죽인 프롬프트(명령어)도 찰떡같이 이해하고 해결해 온 직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생성형 에이아이를 쓰는 모습을 잠시 관찰하면, 구성원을 대하는 그 사람의 리더십이 그대로 보인다.
세번째는 전공과 관련된 흥미로운 경향이다.
많은 이들이 공학 전공자가 생성형 에이아이에 더 능하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문사회계열, 특히 철학이나 어문학 전공자가 더 유연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공학 전공자는 명확한 입력과 결과를 기대하며, 에이아이의 비결정적이고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답변을 답답해한다.
반면, 인문사회 전공자들은 반복되고 섬세한 토론, 열린 질문에 익숙하다.
에이아이를 사람처럼 대하고, 맥락을 쌓아가며 대화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특성이 있다고 해서 사회성 높은 인문사회계열 신입사원이 생성형 에이아이를 가장 잘 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실제 현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다만 이 관찰이 의미 있는 것은 기술 활용 능력이 꼭 기술 지식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람을 이해하고, 맥락을 읽고, 성실하게 설명하는
힘이 생성형 에이아이를 다루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된다는 의미다.
생성형 에이아이 시대, 중요한 능력이 조금 달라졌다.
말을 시원시원하게 하는 것보다 섬세하게 설명하는 능력이, 단순히 관계를 넓히는 것보다 깊은 관계를 맺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
어쩌면 이건 사람 사이의 관계, 소통에서도 우리가 좀 더 배워야 할 부분일지도 모른다.
은둔 중년, 누가 밀어냈나 [김상균의 메타버스]
김상균 | 인지과학자·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최근 한국방송 ‘추적 60분’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그늘, 은둔 중년의 현실을 조명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고립 속에 살아가는 중년들의 삶을 보여줬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은둔의 삶을 택하게 되었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단면을 비추었다.
다큐멘터리는 은둔 중년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 심리적 위축감, 그리고 가족 관계의 단절 등 복합적인 문제들을 보여주며, 이 현상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시사했다.
정확한 통계는 부족하지만,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에 적게는 수만명에서 많게는 수십만명에 이르는 은둔 중년이 존재한다고 추정한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은둔하는 사람들을, 특히 중년층에서 그러한 삶을 선택한 이들을 무능력하다, 열정이 없다, 게으르다, 책임감이 부족하다,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식으로 예단했다.
문제의
원인을 당사자에게 돌리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시각은 고착화된 편견으로 작용하여 은둔 중년들이 사회로 다시 나올 기회를 박탈하고, 그들을 더욱더 깊은 고립으로 밀어 넣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그러나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접한 은둔 중년들은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과는 사뭇 다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결코 무능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뛰어난 능력과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경우가 적잖았으며, 사회와 타인에 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품고 있었다.
필자가 접한 사례를 소개하자면, 40대 후반의 한 은둔자는 오랜
기간 대기업에서 전략기획 업무를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조직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고자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할 때마다 조직 내 갈등이 심화하였고, 결국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떠났다.
개인이나 부서가 아니라 조직 전체의 성장을 위해 냈던 혁신안이 자신의 자리를 무너트린 셈이다.
인간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는 낯선 것을 위협으로 인지하고 피하려는 인지 편향 중 하나이다.
사회가 규정한 일반적 삶의 궤도를 벗어난 은둔 중년의 존재는 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인지적 불편함을 야기하고, 결국 그들을 비정상적이거나 문제가 있는 존재로 낙인찍는다.
은둔
중년은 무능력하다는 사회적 믿음이 형성되면, 우리는 그들의 다른 면모를 보려 하지 않고, 기존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이 고립되는 진짜 이유는 사회가 그들을 밀어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기존의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의도적으로 도태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진정으로 변해야 할 것은 은둔하는 개인이 아니라, 그들을 은둔자로 몰아세우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과 문화, 조직의 구조와 업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경직된 고용 시스템, 단기적 성과 지상주의의 조직 문화, 그리고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그들을 그림자 속으로 내몰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은둔 중년들을 단순히 사회의 문제아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잠재력을 우리 사회의 새로운 동력으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은둔 중년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과 사회 시스템이 변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림자 속에 숨겨진 귀중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들을 우리 사회의 빛 속으로 초대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