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전 신라의 금관…'정상의 자리'를 빛내다

서봉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구본창  작가  제공

서봉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구본창 작가 제공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불린다.
땅만 파도 귀걸이와 허리띠 등 화려하고 정교한 황금 유물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당대에도 신라의 황금 문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아랍 지리학자들이 “신라에는 황금이 너무 흔해 밥그릇까지 황금으로 만든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최고의 기술력과 미감이 집약된 금관이다.
왕족이 머리 위에 썼을 때 금관은 최고 권력의 신성성과 정통성을 뽐내는 찬란한 상징이었고, 죽은 뒤에는 내세에서도 권위가 영원히 이어질 수 있도록 얼굴 위에 덮어주는 ‘데스마스크’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은 총 6점. 예술성 높고 보존이 잘된 금관 유물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는 왕조는 전 세계를 통틀어 신라뿐이다.

이 귀중한 금관들이 다음달 2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개막하는 특별 전시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앞으로도 100년 동안은 다시 볼 일이 없을, 생애 한 번 있는 전시”(김대환 경주박물관 학예사)다.
계기는 오는 31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다.
신라 금관이 경주를 찾는 전 세계 핵심 인사에게 선보일 전통문화의 ‘얼굴’이 된 것이다.

백남준의 '고대기마인상', 1991, Mixed media, 340x192x107cm

백남준의 '고대기마인상', 1991, Mixed media, 340x192x107cm

경주가 보여주는 한국 문화는 ‘고대 기마인상’을 통해 전통에서 현대로 이어진다.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이 신라시대 유물 ‘말 탄 사람 토기’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이다.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서 만날 수 있다.
미술사에 위대한 작가는 많아도 ‘장르를 창시한 작가’는 극히 드물다.
백남준이 그런 작가다.
전시장에서는 수리 및 복원을 거쳐 30여 년 만에 일반에 공개된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 등 거장의 선견지명이 빛나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솔거미술관에서는 경주를 대표하는 한국 화가 박대성, 현대적인 불교 회화를 그린 송천 스님 등의 작품을 선보인다.
아름다운 ‘왕릉뷰’ 건축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오아르미술관에서는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 등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나왔다.
구본창 작가가 찍은 사진으로 보는 금관부터 공연과 드론쇼까지, APEC 정상회의 기간을 전후해 경주에서 펼쳐지는 우리 예술의 향연을 정리했다.

사슴뿔·나무 빼닮은 '出자 장식'…신라 시대 문화·예술의 집대성'권력의 상징' 금관 6개에 얽힌 이야기

오는 28일 경주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역사관에서 개막하는 특별전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은 현존하는 신라 금관 6점을 사상 처음으로 한곳에 모은 전시다.
금관이 나온 경주의 유적지와 관련 유물을 함께 감상하며 1500년 전 신라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다.
이번 전시에 나온 금관에 얽힌 이야기를 출토 순서대로 간략히 소개한다.
일반 관람은 11월 2일부터 12월 14일까지 가능하다.

금관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구본창 작가 제공

금관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구본창 작가 제공


◆ 금관총 금관(국보)

1921년 9월 경주 중심가였던 노서동에서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구슬이 나왔다.
동네 아이들이 구슬을 주워서 갖고 놀고 있는데, 지나가던 일본인 경찰 하나가 그 광경에 주목했다.
흙을 더 파보니 무덤이 드러났고 그 안에서 금관 등이 나왔다.
무덤에는 금관이 발견됐다는 뜻의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발견은 일제가 신라 고분 조사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됐다.

5세기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가장 전형적인 신라 금관으로 꼽힌다.
금판을 오려서 만든 출(出)자 장식은 사슴뿔이나 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금령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구본창 작가 제공

금령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구본창 작가 제공


◆ 금령총 금관(보물)

3년 뒤인 1924년 발굴된 금령총에서 나온 금관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 중 가장 작고, 장식도 곡옥이 없는 간소한 형태다.

금관의 주인은 6세기 초 사망한 열 살배기 왕자로 추정된다.
금관의 크기와 함께 나온 금 허리띠의 길이(74㎝) 등이 어린아이에게 맞는 치수이기 때문이다.
무덤 이름은 출토된 금방울(金鈴)에서 이름을 따 금령총으로 지었다.

역사 교과서에 사진이 자주 등장하는 국보 제91호 ‘기마인물형 토기’ 한 쌍도 이곳에서 나왔다.
저승에 간 어린 왕자를 수행하는 역할로 추정된다.

서봉총 금관 세부.

서봉총 금관 세부.


◆ 서봉총 금관(보물)

1926년 발굴된 5세기 금관이다.
일제가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붙인 계기가 다소 황당하다.
당시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스웨덴의 한자 표현 서전(瑞典)에서 ‘서’를, 금관의 봉황 장식에서 ‘봉’을 땄다.

다른 관들과 달리 관 내부에 띠 모양 금판을 십자형으로 교차시켰고, 그 위에 봉황 세 마리 모양의 장식물을 얹은 게 특징이다.

천마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구본창 작가 제공

천마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구본창 작가 제공


◆ 천마총 금관(국보)

가장 크고 화려한 신라 금관이자 해방 후 우리 힘으로 발굴해낸 첫 금관이다.
그 시작은 ‘연습’이었다.

1973년 정부는 당시 황남동 일대를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가장 큰 무덤인 황남대총을 조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예행연습을 위해 그 옆에 있는 무덤을 시험 삼아 발굴해 봤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 하늘을 나는 듯한 천마(天馬)와 함께 금관이 나왔다.

6세기 초 제작된 이 금관은 신라 금관 여섯 점 중 머리띠부터 세움 장식까지의 높이가 가장 높고, 전체적인 폭도 가장 넓다.
더 화려하게 만들기 위해 장식을 더 많이 달았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뼈대가 되는 금판을 더 두껍고 크게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구본창 작가 제공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구본창 작가 제공

왕비가 썼던 금관이다.
5세기에 제작됐다.
함께 묻혀 있던 왕의 관보다 훨씬 화려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 금관은 1974년 남북으로 붙은 황남대총의 두 개 무덤 중 북쪽 무덤(북분)에서 나왔다.
먼저 만들어진 건 왕이 묻힌 남쪽 무덤(남분)인데, 왕의 관은 금관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박한 금동관이었다.
북분에서는 금관과 함께 ‘부인대(夫人帶)’라는 허리띠가 나왔고, 당시 신라에 여왕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 주인을 왕비로 특정할 수 있었다.

다만 왕비의 관이 왕의 관보다 더 화려한 이유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북분에 묻힌 왕비는 공주였고 남분에 묻힌 왕은 부마여서 왕족의 격이 달랐다는 설 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교동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구본창 작가 제공

교동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구본창 작가 제공


◆ 교동금관

한때 도굴당하는 수모를 겪었던 금관이다.
크기가 작은 점으로 미뤄볼 때 어린아이의 금관일 가능성이 있다.

5세기 초 금관으로, 여섯 금관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시기에 제작된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出’자 모양에 비해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이 사실적이다.
경주 교동의 한 무덤에서 도굴꾼이 파냈다가 1972년 국가에 압수됐다.
신라 금관 중 순도(21.4K)가 가장 높지만 도굴품이다 보니 관련 정보가 적고, 국가지정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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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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