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나다의 황홀한 오로라 /
블래치포드 레이크 롯지별을 가장 잘 보는 법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별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선 최소 450개 이상의 별을 한꺼번에 봐야 하는데, 우리의 눈이 도시의 빛에 오염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에 적응하면 비로소 하늘이 무너질 듯 박힌 별이 또렷해지며, 옅은 구름처럼 넓게 퍼진 것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2025년 10월 1일 새벽 1시, 알래스카의 ‘캐치칸’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나는 처음 ‘오로라’를 봤다.
그것이 오로라라는 걸 안 건, 캐나다의 ‘옐로 나이프’까지 가서 그것을 본 친구의 증언 때문이었다.
친구는 두 눈으로 본 오로라에 실망했다.
카메라로 본 그것이 더 선명하고 아름다워서였다.
그 사실은 내게도 당혹스러웠다.
마치 자연보다 인공이 더 아름답다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직접 보는 것과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에는 늘
차이가 생긴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자, 점점 더 선명한 빛들이 너울대며 춤추기 시작했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자 빛이 더 생생히 살아났다.
초록과 푸름 그리고 노란 선들이 하늘을 가르며 일렁였다.
알래스카 밤하늘에 물든 그 오로라는 내게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고 말한 프루스트의 문장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함께 보여 주었다.

일러스트=조 디자인랩·Midjourney
나는 줄곧 이별을 다루는 글을 써 왔는데, 이 칼럼 역시 ‘헤어져야 만난다’는 주제로 시작된 긴 여정이었음을 깨달았다.
429주간의 여정이었다.
좋았던 일, 뿌듯한 일, ‘코로나19’나
‘핼러윈 참사’처럼 가슴 미어지던 일들까지, 그 긴 시간을 함께한 분들에게 어떤 감사를 전해야 할까. 곁에 있다면 다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인사하고 싶다.
‘말과 글’을 함께한 모든 분들께 다정한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 나도 침묵을 연습하고 다시 독자로 돌아가 더 좋은 글을 읽고 쓰고 싶다.
오로라도 별도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다시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잠시 눈을 감을 뿐.
식욕 없는 시대

일러스트=조 디자인랩·Midjourney
요즘 위고비를 맞고 몇 kg을 감량할지 내기하는 사람을 자주 본다.
주위에선 30㎏ 넘게 감량했다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들의 공통된 말은 “먹고 싶지가 않다”였다.
습관적으로 커다란 과자 한 통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던 사람들이 이제 몇 개만 먹어도 배부르다고 한다.
최형진과 김대수의 책 ‘먹는 욕망’에 따르면 배고픔은 생리적 현상이 아니라 감정이다.
식품 회사들이 수많은 시즈닝과 화학첨가물을 배합해 배가 부른데도 더 먹게 만드는 것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식욕은 고정된 세팅값이 아니라 조작 가능한 감정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훌륭한 에너지 사냥꾼”이라는 저자의 표현처럼 우리 뇌는 생존을 위해 필요보다 많은 에너지를 얻으려 한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고 믿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쯔양 같은 먹방러가 되는 것도 위대(胃大)하게 태어난 게 아니라 꾸준한 훈련의 결과란 뜻이다.
그렇다면 식욕 억제가 아니라 아예 먹고 싶지 않게 만든다는 건 어떤 뜻일까. GLP-1 호르몬이 뇌에 작용해 음식 냄새만 맡아도 식욕을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호르몬은 체중 감량을 넘어 당뇨, 고혈압, 심장병 위험까지 줄인다.
이런 연구 결과 때문에 미국에선 심혈관 질환 환자들을 대상으로 건강보험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식욕 억제가 아니라 식욕 자체를 바꾸는 시대가 왔다.
그런데 이게 꼭 좋기만 할까. SNS에 운동으로 체중 감량 인증샷을 남기며 자부심을 느끼던 문화가 사라지면, 대신 그 자리에 약물 사용 경험이 공유될지 모른다.
질병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수전 손택의 말처럼, 비만도 ‘게으르다’는 도덕적 낙인이 아닌 치료의 영역이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약물로 간단히 해결된다면 운동과 절제의 의미는 무엇일까. “절제가 최고의 즐거움”이라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은 점점 시대착오적이 되는 걸까. 의지력의 시대가 점점 저물고 있다.
우리는 더 자유로워진 것일까, 아니면 더 나약해진
걸까.
운전본심 취중진담

일러스트=조 디자인랩·Midjourney
평소 별명이 ‘보살’이던 선배가 운전대를 잡자 욕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순간 운전 중에 남편과 대화만 하면 대판 싸우게 된다는 친구 얘기가 떠올랐다.
평상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술만 마시면 하고 싶은 말이 방언처럼 터지는 친구도 떠올랐다.
운전 본심, 취중진담, 이것이 과연 원래 성격인 걸까.뇌는 한 번에 한 가지 기능에만 몰두한다는 특징이 있다.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셈이다.
문제는 전두엽이다.
전두엽은 뇌의 브레이크로 공격성, 성욕, 식욕 같은 본능을 억제한다.
그러나 운전처럼 다양한 감각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뇌 기능이 위험 회피로 쏠리며 이 브레이크가 풀린다.
뇌가 한 번에 여러 기능을
처리하다 보니 전두엽의 기능이 약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끼어드는 차에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는 건 성격이 아니라 뇌 구조 때문이다.
술의 전두엽 해제 기능은 훨씬 더 극적이다.
뇌과학자 김대수는 ‘취중진담’을 ‘취중 본능’이라 고쳐 말했다.
술김에 한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조언이다.
술은 마음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일 뿐, 진심을 드러내는 거울은 아니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나온 말은 잊고, 열기가 식도록
서랍 속에 넣어두는 편이 낫다.
하지만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는 ‘술김’에 한 행동에 특별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술자리의 실수가 함께한 사람들만의 기억으로 끝난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는 취해서 보낸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유튜브 라이브 방송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박제되어 남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사람은
평온할 때보다 위기에서 진짜 성품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화한 뇌과학은 “평온할 때 성품이 드러나고, 위기에서는 뇌의 구조가 드러난다”고 수정한다.
“문명은 우리가 서로를 찢어 죽이지 않게 붙여놓은 얇은 페인트층”이라고 한 윌리엄 골딩의 말은 또 어떤가. 과학은 그 페인트층이 전두엽임을 밝혔다.
운전대와 술잔은 그 얇은 층을 쏜살같이 벗겨내는 두 개의 손잡이다.
불완전함 속의 아름다움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리자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공포스러웠다.
내가 나임을 증명할 모든 게 사라진 기분이었다.
마셜
매클루언이 말했듯 미디어는 인간 신체의 확장이 됐고, 이제 스마트폰은 우리 손의 일부가 됐다.
그런데 이 확장된 신체는 완벽하다.
한 번의 터치로 모든 게 작동한다.
현실 세계에는 없는 이 부자연스러운 매끄러움이 문제의 시작이다.
현실은 울퉁불퉁하다.
신발 끈은 이유 없이 풀리고, 우산은 바람에 뒤집어지고, 지퍼가 중간에 걸리는 게 우리가 사는 진짜 세계다.
그런데 디지털은 마찰을 제거하는 게 목표다.
옛날에는
편지를 쓰려면 펜을 찾고 종이를 꺼내 쓸 말을 고민했다.
이 모든 과정이 마찰이지만 그 덕분에 더 신중하게 썼다.
지금은 카톡으로 “ㅋㅋ”을 보내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으니 별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매끄러움은 뇌에 비정상적인 도파민을 분비시킨다.
우리가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건 그 안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안락한 편리함이 있기 때문이다.
해법은 없을까. 의도적으로 디지털에 현실의 불완전함을
이식하면 어떨까. 가끔 앱이 2~3초 지연되게 하고, 버튼을 꾹 눌러야만 작동하게 하고, 검색할 때 ‘정말 이게 필요한가요?’라고 3초간 멈춰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완벽한 추천 대신 “다른 것도 시도해 볼까요?”라고 제안하는 알고리즘은 어떨까. 아이들에게는 ‘AI에 도움받기 전에 세 번 틀리기 챌린지’를 주고, 실패를 포켓몬처럼 수집하는 게임을 만들면 어떨까.
기술을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술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는 있다.
불완전함 속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본의 ‘와비사비(侘寂)’ 철학이나 역경을 통한 성장인 핀란드의 ‘시수(sisu)’처럼 디지털이 없애고 있는 우연, 실패, 마찰, 기다림을 다시 새겨 넣는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혁신은 모든 걸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울퉁불퉁함을 되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놓친 물고기가 더 커보인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친구가 주식을 샀다가 크게 하락해 낙심했다.
다행히 실적이 잘 나와 주가가 올라 겨우 본전을 찾았고, 약간의 이익까지 보고 팔았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자신이 팔자마자 그 주식이 상한가를 치며 끝없이 오른 것이다.
친구는 허탈해했고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얘기했다.
주식을 샀을 때 내려가는 고통과 팔았을 때 올라가는 고통 중, 어느 쪽이 더 클까.인간은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손실에서 두세 배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손실 회피 편향’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주식이 ‘하락하는 고통’이 훨씬 크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 사람들은 팔고 난 뒤의 폭등을 더 오래 기억한다.
사라진 기회를 바라보는 후회는 실제 손실보다 더 집요하다.
사고로 절단 수술을 겪은 환자의 60% 이상이 일정 기간, 혹은 평생 ‘환지통’을 겪는다고 한다.
사라진 팔과 다리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아픈 것이다.
후회의 감각은 환지통처럼 실제 없는데도 우리를 괴롭힌다.
나심 탈레브의 ‘행운에 속지 마라’에는 흥미로운 실험이 소개된다.
은퇴한 치과 의사가 주식에 투자해 매일 수익률을 확인하면, 그는 기쁨보다 고통을 더
자주 느끼며 심리적 적자 상태에 빠진다.
손실에서 오는 부정적 효과는 이익에서 오는 긍정적 효과보다 2.5배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인 주기를 바꾸면 결과는 달라진다.
월별이나 연간 단위로만 성과를 확인하면 그는 훨씬 적은 고통과 더 많은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시간의 척도가 변하면 운의 속성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주식이든 인생이든 우리는 ‘수익’이 아니라 ‘변동성’을 더 자주 목격한다.
그래서 실제 손실보다
사라진 기회에 대한 환지통에 더 크게 시달린다.
얻은 것보다 놓친 걸 더 아프게 기억하는 뇌의 습성이 그렇다.
친구의 경험은 단순한 재테크 실패담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선택과 후회의 축소판이다.
중요한 건 ‘언제 사고팔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시간의 눈금으로 내 삶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질문일지 모른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바람난 애인과 헤어진 후배가 그의 집을 마구 부수는 상상을 하다가 같이 키우는 고양이가 불쌍해 그 녀석만 빼오는 계획을 세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친구가 “상상으로 뭔들 못해!”라는 말을 던지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적 복수에 대한 상상이 펼쳐졌다.
이어서 한 남성이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힌 형을 떠올리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상상을 하게 된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다.
우리는 “내가 미쳤지, 걱정도 팔자, 배부른 소리!”라며 자신의 마음을 쉽게 재단한다.
그러나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감정은 마음속에 찾아오는 손님 같아서 불쑥 왔다가, 할 말만 하고 떠난다.
감정은 몸과 마음이 보내는 중요한 신호다.
감정이 상할 때 쓰는 ‘속상하다’는 말은 우리 몸 안의 장기들이 실제로 상하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감정을 계속
참으면 결국 탈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자신의 감정에만 냉정한 판사가 된다.
분노하면 ‘성격 더러운 놈’, 슬퍼하면 ‘약한 놈’, 두려워하면 ‘비겁한 놈’이라고 판결한다.
감정을 느끼는 것과 실제 행동하는 게 전혀 다른 일인데 말이다.
중요한 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감정은 내면의 날씨와 비슷하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나쁜 날씨라고 하지 않듯, 분노나 두려움을 나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비가 씨앗을 키우듯, 분노는 부당함을 바꾸는 힘이 되고, 두려움은 조심성을 길러준다.
엄마도 아이가 미울 수 있고, 아이도 엄마가 싫어질 때가 있다.
그런 감정을 품는다고 나쁜 엄마나 나쁜 자식이 되는 건 아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읽다가 각성한 순간이 있다.
소설 속 ‘안녕’이 굿바이(goodbye)가 아니라, 봉주르(bonjour)였다는 충격 때문이다.
결국 ‘안녕’은 슬픔을 떠나보내겠다는 결별이 아니라 어서 오라는 환대의 인사였다.
나도 내 안의 모든 감정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잘 머물다가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타인의 취향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심리학자 김경일의 강연에서 놀이공원에 간 딸이 풍선을 사달라고 졸라대 어쩔 수 없이 비싼 풍선을 사준 일화를 들었다.
잠시 후,
팔이 아프다며 투정하던 딸이 결국 풍선을 놓쳐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는 그제야 풍선을 사기 직전 주위에 풍선을 든 아이들이 많았는데, 30분 뒤에는 딸 이외에 풍선을 든 아이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딸이 원한 건 풍선이 아니라, 풍선을 든 수많은 아이들 중 하나가 되고 싶은 ‘동일성 욕망’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원하는 것(Want)’과 ‘좋아하는
것(Like)’을 구별하지 못한다.
특히 한국인은 타인의 욕망을 자기화하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비슷한 꿈을 꾸며 살아간다.
책도 베스트셀러만 팔리고, 영화도 천만 관객 영화만 살아남는 식이다.
모두 ‘Like’보다 ‘Want’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Like’가 빠진 ‘Want’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허무하게 바람에 날아간 풍선처럼 쓸려 다니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요즘은 ‘새로운 Like’를 발견할
가능성이 좁아지고 있다.
알고리즘 때문에 반복적으로 접하는 것만 선택하게 되고, 이전에는 호기심이었을 새로운 경험과 취향의 시도는 점점 배제된다.
취향은 단순히 물건을 사 모으는 행위가 아니다.
타인과 나를 구별하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명확히 하는 자기 경계선이다.
세상이 별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에 기꺼이 시간을 들여 ‘무용함의 쓸모’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거 돈이 돼?” 같은 관성적 질문에서 벗어나 나의
고유성을 되찾는 일 말이다.
타인이 원하는 것만 좇는 삶은 이미 정류장을 떠난 버스를 잡기 위해 뛰는 것처럼 허무하다.
반대로 정말 좋아하고 몰입할 수 있는 걸 아는 순간, 삶은 내 것이 된다.
그제야 세상의 소음 속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림이든, 뜨개질이든, 작은 몰입 속에서 나만의 자리를 찾는 것. 나를 흔드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취향을 갖는 건 공허함에 맞서는 태도다.
단순함의 힘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멜 로빈스의 책 ‘렛뎀(Let Them) 이론’에서 ‘아침에 거울 속 자신에게 하이파이브 하기’를 읽다가 노희경 작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뺨을 치고, “빨리 써. 게으름 피우지 마. 너는 작가잖아!” 외친다고 했다.
인터뷰를 읽고 난 후, 나 역시 뺨을 치며 게으른 나를 각성시켜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었다.
뺨 때리기와 하이파이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다.
핵심은 단순함이다.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때, 내가 일부러 왼손을 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마우스를 왼손으로 쓰면 잘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툰 왼손을 쓰면, 습관에서 벗어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제3의 시선을 얻게 된다.
5, 4, 3, 2, 1. 숫자를 거꾸로 센 후, 바로 행동하는 것 역시 뇌에 자극을 준다.
이처럼 단순한 동작들은 우리를 ‘오토 파일럿 모드’에서 벗어나 더 나은
택을 하게 돕는다.
칫솔모의 색이 변하는 기능 하나로 사람들의 칫솔질 습관을 바꾼 덴마크 기업 ‘조르단’이나, 복잡한 PC 경험을 직관적인 ‘아이폰’으로 단순화해 사람들의 삶을 바꾼 애플처럼 말이다.
책 속의 ‘렛뎀(Let Them)’, 즉 ‘남들이 뭘 하든 내버려두라’는
이론 역시 복잡한 인간 관계를 두 단어로 해결한다.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복잡한 이론을 사람들이 쉽게 기억하고 행동할 수 있게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노희경 작가의 ‘뺨 때리기’가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한 결기와 진정성이라면, 멜 로빈스의 ‘하이파이브’와 ‘렛뎀’은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기 확신을 심어준다.
전자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방식을, 후자는 단순한 효율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방법은 달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는 같다.
세상의 소음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복잡한 계획이 아닌, 삶의 본질을 꿰뚫는 단순함이다.
결국 성공의 비결은 언제나 행동에 있기 때문이다.
단순함은 그 행동을 이끈다.
약속의 힘
종영된 ‘다큐 3일’에서 특별히 편성한 방송을 보았다.
10년 전, 여행을 하던 두 명의 청춘과 촬영진 셋이 얼결에 10년 후 같은 시간, 안동역에서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한 후에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과연 그들은 만났을까. 10년 후 그날, 촬영 시간이 종료될 즈음 카메라가 꺼지자 안동역에 한 여성이 다가왔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잘 살았냐고, 잘 살아줘서 기쁘다는 안부가 서로 오고 갔다.
그러나 다큐를 보는 내내 내 마음은 청춘을 관통하며 나눈 수많은 약속들을 향해 달려갔다.
대학 때, 한 미술 평론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한 달간의 교생 실습을 마치고 헤어지던 날, 아쉬움에 우는 여고생들에게 말했다.
그 시절 유행하던 행운의 날, 1977년 7월 7일 7시에,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나자는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이루어졌을까. 강의를 듣던 많은
학생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에 의하면, 7시 정각에 어른이 된 여학생들이 하나둘씩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했던 여학생 대부분이 한자리에 모였다.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약속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내 약속도 아닌, 타인의 10년 전 약속이 그토록 마음을 흔든 이유는 무엇일까. 2025년 8월 15일, 오전 7시 48분, 안동역, 만남의 기적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이른 아침부터 서 있는 수많은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나눈 약속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지켜지지 않은 약속일지라도 그 약속 덕분에 우리는 더 간절히 살았고, 더 애틋하게 사랑했으며, 더 깊이 그리워했다는 걸 말이다.
약속의 진정한 의미는 만남에 있는 게 아니라,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 모든 시간들에 있는지 모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들, 실망하고 좌절했던 매 시간이 모여 지금의 우리가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약속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진짜 마법이 아닐까. 안동역에 선 저 많은 사람이 증명하듯,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의 약속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램프 증후군’을 막으려면
‘램프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알라딘이 램프의 요정을 불러내듯이 현대인들이 근심과 걱정을 불러내 자신을 괴롭히는 현상을 말한다.
과거의 선조들이 주로 현재의 생존을 위해 걱정했다면, 우리의 걱정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많다.
AI가
일상에 스며들고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에, 행복은 역설적으로 더 멀어져 버렸다.
24시간 연결된 초연결 사회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벽이 사라지고 모든 문이 열린다는 뜻이다.
불안은 알지 않아도 되는 걸 너무 많이 아는 데서 온다.
과도한 연결은 오히려 소외감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초연결은 ‘모르고 사는 즐거움’이 있다는 우리의 감각을 점차 훼손시켰다.
나만의 소박한 행복을 위해 적당한 울타리와 담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현생 인류에게는 이제 스마트폰 안과 밖, 두 가지 삶이 존재한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에서의 삶은 조명이 달린 투명한 어항 같아서 아주 작은 것까지 환하게 비춘다.
호텔 패키지, 유명한 맛집, 명품 선물 같은 일상은 그곳에서 사진 몇 장으로 압축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초라해진다.
타인의 기쁨이 곧 나의 근심으로 바뀐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이 완벽해 보이는 건 힘든 ‘노동’을 치우고 ‘여유’를 확대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개한
꽃만 전시하고, 뒤편의 거름과 가지치기의 흔적을 치우는 정원사처럼 말이다.
비교는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남의 숫자가 더 작아 보이는 고장 난 체중계와 같다.
세계 둘째 부자조차 첫째의 무게에 짓눌린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선택적 무지의 지혜다.
그것이 불통과 차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를 불행하게 한다면 비교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알라딘의 램프는 스마트폰이다.
잠들기 전 어두운 방에서, 저마다의 작은 화면이 램프처럼 빛난다.
문제는 우리가 램프에서 요정이 아니라 괴물을 불러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부르고 있는가. 희망의 요정인가. 불안의 괴물인가. 그 램프를 켜는 것도, 끄는 것도 결국 나다.
멀리서 보기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후 겪는 ‘조망 효과’라는 현상이 있다.
그들은 우주에서 파란 구슬처럼 떠 있는 지구를 보며 인류에 대한 연민과 공동체 의식을 느낀다고 한다.
국경, 종족, 이념도 보이지 않는 그 작은 행성에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깨달음 말이다.
한 우주비행사는 먼 지구를
향해 “그만 싸우고 정신 좀 차려라!” 소리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이 조망 효과가 때로는 우리가 ‘광대한 것’을 봐야 하는 이유다.
사막의 끝없는 모래언덕, 거대하고 우람한 협곡들, 몇 시간을 달려도 끝나지 않는 밀밭, 이런 광대함 앞에서 우리는 나의 작음을 깨닫고 동시에 그 작은 존재들이 모인 공동체의 소중함을 느낀다.
2002년 월드컵 때 광장에 모인 붉은 악마들의 무리 속에서 내가 이 나라의 일원임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매일 스마트폰 화면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이런 경험은 필수적이다.
애덤 그랜트의 책 ‘싱크 어게인’(Think Again)에 따르면, 야구팬들에게 자신이 응원하는 팀과 경쟁팀의 ‘공통점’을 쓰게 한 후, 상대편 유니폼을 입은 사람을 도울 확률을 조사했더니 70%가 도움을
주었다.
반면 자기 팀을 사랑하는 이유만 쓰게 한 집단에서는 30%만이 도움을 주었다.
공통점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도 편견은 줄고 연민이 커진다는 증거다.
“중국인 같지 않군” “무슬림치고는 괜찮아”라는 말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칼 세이건은 지구를 가리켜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불렀다.
그곳이 우리 집이고, 그 위에서 우리가 아는, 들어본, 역사상 존재한 모든 인간이 삶을 보냈다고 말이다.
정보의 바다가 아닌 실제의 바다, 푸른 모니터가 아닌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건 결국 내 안의 목소리다.
광대함은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의미를 성찰할 여유를 준다.
모니터 속 픽셀 단위로 쪼개진 세상만 바라보던 눈이 거대한 지평선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기억한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사람은 위기 앞에서 새 길을 찾기보다 익숙한 길을 먼저 찾는다.
건물에 화재가 나면 자신이 들어온 문으로 나가려 한다.
더 빠르고 안전한 출구가 있어도 그렇다.
일이나 인간관계에 부딪칠 때도 그렇다.
잠을 줄여 성과를 냈거나, 사과보다 침묵으로 갈등을 피했던 사람은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려 든다.
수전 데이비드는 이것을 ‘감정의 경직성’이라 부른다.
이는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고 안내해도 익숙한 길을 고집하는 운전자와 같다.
더 멀고, 교통 체증이 심한데도 본래 가던 길을 고집하는 것이다.
말 두 마리의 폭과 마차 바퀴 간격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유럽 도로 폭의 기준이 되었다.
이후에도 사람들은 도로를 새로 설계하지 않고 기존 도로에 맞춰 살았다.
유럽에 유독 경차가 많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를 ‘경로 의존성’ 이라고 한다.
사람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먼저 사과하면 지는 거야’ ‘사람은 변하지 않아’ 같은 감정의 경직성은 과거의 직관을 당연시하는 습관에서 생긴다.
닫힌 벽만 보며 열린 문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고 말하며, 그 공간에서 우리는 행동을 선택할 힘을 갖는다고 했다.
그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
나는 마음이 유독 불안한 날, 일부러 왼손을 많이 쓴다.
왼손으로 문을 열고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한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낯선 동작을 하면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던 감정적 습관을 깨뜨릴 수 있다.
왼손 설거지가 움직이는 명상이 될 수 있듯 왼손을 쓰는 것 역시 요가가 될 수 있다.
이 작은 변화가 우리의 고정된 반응 패턴을 깨고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만든다.
화가 날 때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던 사람이 산책을 나가거나, 슬플 때 침대에 누워만 있던 사람이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는 것도 방법이다.
몸도 마음도 세상도 끝없이 변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변화에 대한 반응뿐이다.
그 첫걸음은 왼손을 쓰는 것처럼 작고 단순한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사라지는 우연의 가치
하루에 한 가지 직업을 체험하는 영상을 보다가 멈칫했다.
출판사 편집자를 따라다니던 진행자가 길에서 만난 초등학생에게 “서점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아이는 서점에서 책을 사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순간 나는 뭔가 거대한 것들이 빙하처럼 가라앉고 있다고 느꼈다.
한때 나는 수십 개의 전화번호를 기억했다.
지금은 스마트폰 때문에 서너 개도 못 외운다.
내비게이션이 길 찾는 능력을 지운 것처럼 책을 요약 정리해 주는 인공지능은 독서와 사색의 기능을 약화시킬 것이다.
기술은 빠르고 매끄럽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미국 역사학자 크리스틴 로젠은 ‘경험의 멸종’에서 사라진 우연성을 말하며 “파스퇴르는 우연한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온다고 말했지만 과잉 설계의 시대에는 우연한 기회가 누구에게도
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우연에 맡겨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알고리즘은 취향을 반영한 콘텐츠만 보여준다.
라디오나 매장에서 흘러나온 음악에 끌려 낯선 음악을 사볼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검색과 구매 데이터 기반의 추천 시스템은 사고와 소비 취향을 강화시킨다.
굳어진 생각은 나와 다른 사람을 점차 배제시킨다.
다양성과 창의성이 강조되는 시대의 아이러니다.
AI로 숙제를 하는 요즘, 아이들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기가 힘들어졌다.
오답에서 배우는 게 때로 정답보다 값진 배움인데 말이다.
구글맵이 없던 시절, 길을 잃어 뜻밖의 사람을 만나고 우연히 맛집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런 것들이다.
‘뜻밖에 우연히’라는 말은 모든 인간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단어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실패한 실험을 정리하다가 페니실린을 발견했듯 위대한 발견은 종종 계획되지 않은 순간에 찾아왔다.
그러나 많은 것이 알고리즘으로 최적화된 지금, 우리는 그런 아름다운 실수를 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때로는 잘못 들어선 길이 새로운 지도가 되기도 한다.
가속과 감속의 세계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유튜브의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일상을 보면 무력해질 때가 있다.
아침
명상과 요가, 직접 만든 디톡스 주스를 마시며, 매일 헬스장에 가는 일상이 완벽해서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그들의 루틴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배달 음식을 좋아하는 게으른 느림보가 된다.
소셜미디어의 여행 사진, 친구의 승진 소식, 후배의 결혼 발표까지 우리는 누군가와 내 속도를 비교하며 수시로 초조하고 조급해한다.
독일 작가 엘케 하이덴라이히의 ‘나로 늙어간다는 것’에는 “나는 뭐든 가짓수를 줄이고 집중하려 애쓴다”는
문장이 있다.
저자는 신문 전체를 급히 훑지 않고, 읽고 싶은 기사를 끝까지 읽고, 리모컨을 이리저리 누르지 않고 영화를 끝까지 본다.
이것이 속도에 맞서는 자신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해 현기증 나게 빨라진다.
나 역시 이제 많이 읽기보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다.
양보다 깊이를 파고든다.
비문증과 노안이 생긴 뒤, 점점 느려진 내 세계를 안경 닦듯 조율하는 방식이다.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는
노년을 ‘학살’이자 ‘끝없는 박탈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것’만을 한탄하며 과거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진짜 노인이 될 뿐이다.
이 상황의 유일한 해독제는 바로 ‘지금’이다.
전력 질주는 힘들어도 빠르게 걷기는 가능하고, 흰머리는 늘었지만 심각한 탈모가 아닌 것에 감사하는 마음. 연애는 어렵지만 돋보기를 쓴 채 연애 소설을 읽는 지금의 고요하고 적요한 시간. 저자가 ‘쾌활한 체념’이라고 부르는 이런 태도가 바로 온전히 현재를 사는 지혜이다.
누구도 살아보지 않은 나이를 함부로 예측할 수 없다.
달리는 자동차에서 보는 풍경과 천천히 걸으며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이 다르듯, 어떤 삶의 속도가 더 좋은지 나쁜지 말할 수도 없다.
그러니 자신의 보폭에 맞는 적당한 가속과 감속이 필요할 뿐이다.
타인과의 비교 버튼을 끄고 나만의 쾌적한 온도와 속도를 찾아야 한다.
더우면 벗고, 추우면 입고, 때로는 힘내고, 힘들면 쉬어가면서.
지루함의 가치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까꿍 놀이를 해본 어른은 알 것이다.
아이가 얼마나 반복을 좋아하는지.
같은 동화책을 몇 번씩 읽어도 지루해하기는커녕 새 이야기를 만난 듯 심취하는지 말이다.
아이들의 뇌에는 정말 리셋 버튼이라도 달린 걸까.내가 어렵게 알아낸 ‘행복의 비밀’은 ‘지루함을 편안함으로, 불행을 다행으로’ 바꿔 부르는 능력이다.
아이들은 이 능력을 타고났다.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 매번 기뻐한다.
어른에게는 지겨운 반복이 아이에게는 안정감을 준다.
뇌 과학자들에 의하면 반복은 뇌의 시냅스
연결을 강화해 전전(前前)두엽을 발달시킨다.
어른은 크면서 효율을 위해 삶을 패턴으로 이해하지만, 아이는 발달 과정에서 작은 차이를 찾는 데 천부적이다.
그 차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몬테소리는 “아이는 반복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반복은 예측 가능성을 만들고 안정감을 주며, 미지의 것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고, 세상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이때 아이는 학습과 탐색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다.
오히려 새로운 놀이공원, 키즈 카페, 게임 등에 집착하면 아이의 도파민 시스템은 망가진다.
계속 더 강한 자극만 찾고, 소소한 독서나 산책엔 흥미를 잃는다.
어쩌면 우리는 실수하고 있는 게 아닐까. 뇌 발달에 꼭 필요한 아이의 반복적 요구는 힘들어하면서, 아이에게 새로운 걸 경험시키는 데만 몰두하는 건 아닐까. 아이가 같은 동화책을 읽자고 말할 때, 같은 동작을 몇 번이고 해달라며 조를 때, 귀찮아하지 말고
아이의 뇌가 자라고 있다는 신호로 이해하면 어떨까. 모든 반복은 특유의 리듬을 만든다.
불행을 다행으로 호명하는 순간 매사가 감사의 은총이 된다.
반복과 지루함을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릴 적 잃어버린 순수한 기쁨을 되찾을 수 있다.
그렇게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른의 그것에 비해 얼마나 아득히 낮은가. 그러나 감사와 기쁨은 가장 작고 약한 것들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놓여 있다.
기쁨을 느끼기 힘든 이유
원하는 것을 이룬 밤, 문득 이 기쁨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불길함이 그림자처럼 스친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마음 가면’에서
우리가 가장 취약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벅찬 기쁨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이 가득 찬다면, 그 기쁨이 온전한 나의 것일 수 있을까. 행복은 은행 통장처럼 저축해 두었다 언제든 인출해 쓸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행복은 늘 ‘순간’이다.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누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금세 다른 감정이 끼어든다.
침습적인 슬픔과 달리 기쁨은 왜 지속되지 않을까. 인간은 생존을 위해 위험을 감지하고 불안을 느끼는 능력을 진화시켰다.
불행에 대비하는 게 종족 보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은 서서히 퇴화했다.
더 기이한 건 우리 내면에서 작동하는 기괴한 밸런스 게임이다.
기쁨을 감추면 고통도 적게 느낄 것이라는 인생 총량의 법칙 같은 것으로 “기쁨을 적게 누리는 대신 고통도 덜 느끼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쾌락으로 기쁨을 대체한다.
‘빨간 머리 앤’에게 기쁨은 “진주알들이 하나씩 한 줄로 꿰어지듯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파민 같은 자극에 익숙해져 소소한 기쁨을 자주 놓친다.
저자는 감사가 ‘기쁨 차단하기’의 해독제라고 말한다.
기쁨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감사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살거나,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거나.” 우리에게는 후자가 필요하다.
유지되기 힘든 기쁨을 고집스레 키우는 능력 말이다.
‘나는 늘 부족하다!’는 마음속 불안을 내려놓고, 기쁨을 차단하는 두려움과 맞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삶은 무의미로 가득할 것이다.
기쁨과 행복도 용기가 필요하다.
마음 가면을 벗고, 맨얼굴로 내게 온 기쁨과 행복을 마주할 용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