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2-08:46 권병선, 김성완: 문체부 장관님이 장흥 방문 → 원래라면 장흥군수가 영접할 일인데, 일정이 겹쳤다는 얘기
10:54 김우일: 기념관 관련 유튜브 링크 공유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앞 들녘)
11:08-12:24 본격 논쟁: 안성강대희님이 "저 들판이 3만 동학군 vs 조·일 연합군 석대들 전투터인데, 당시 장흥 사람들은 석대'뜰'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석대뜰 전투라 해야 맞지 않나" 제기
김상록님: "우리는 집 앞뒤 작은 터를 뜰이라 하고, 너른 벌판은 들이라 하니 들이 맞다"
이근호님: "석대 자체가 비석거리, 비석 많은 곳을 한자화한 지명 같다 / 혹은 볏섬 단위인 석(石)이랑 관련 있나"
안성강대희님: "검색해보니 石坮(석대) - 돌로 쌓은 높은 곳·넓은 반석 뜻"
김상록님: "성종 때 납작한 돌(박석)을 여기서 캐서 가져갔다고 해서 석대라 붙었다더라"
→ 박석이 귀했고 궁궐·종묘 뜰에 깔던 돌, 종묘 박석은 강화도에서 가져왔다는 얘기로 마무리
석대들 전투가 뭐길래?
단톡에서 말한 그 자리 맞습니다.
공식 명칭: 장흥 석대들 전적(長興 石臺들 戰蹟) - 사적 제498호, 2009년 지정. 주소는 장흥읍 남외리 일원
역사적 위치: 정읍 황토현, 공주 우금치, 장성 황룡과 함께 동학농민전쟁 4대 전적지 중 하나
시기: 1894년 12월 1일~15일 보름간. 장흥읍 남외리 국도변 석대 앞 들판에서 벌어졌습니다. 농민군과 일본군 및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의미: 전봉준 등 지도부가 체포된 이후에도 항전이 계속됐다는 걸 보여주는 전투로, 동학농민혁명의 전체 현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유적지이자 반외세·반봉건을 지향한 민족·민주운동의 역사적 장소로 평가됩니다
현재도 장흥 일대에 2,000여 기의 무명 동학군 묘지가 남아있을 정도로 희생이 컸던 곳입니다.
그래서 문체부 장관이 기념관에 온 겁니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기념관 사업이 문체부 소관이거든요.
뜰 vs 들 논쟁, 둘 다 일리 있습니다
이게 오늘 논쟁의 하이라이트죠.
1. 김상록님 주장 - 현대 표준어 기준으론 '들'이 맞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기준:
- 뜰 = 집에 딸린, 울타리 안의 작은 마당
- 들 = 집 밖의 넓은 벌판
기념관 앞처럼 탁 트인 평야면 '석대들'이 사전적으론 정확합니다.
2. 안성강대희님 주장 - 역사적·방언적으론 '뜰'이 맞을 수 있다
이것도 틀리지 않습니다.
- 전라도·충청도 방언에서 넓은 들판을 '뜰'이라고 부르던 용법이 오래 남아있었습니다.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이전 문헌엔 '들'을 '뜰'로 적는 경우가 흔하고요.
- 실제로 위키에도 '장흥 석대들 전적'과 '장흥 석대뜰 전터' 두 문서가 따로 있을 정도로 혼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석대뜰' 쪽은 현재 "사람의 검토를 거치지 않은 LLM 생성 문서"로 삭제 신청이 걸려있는 상태라, 공식 국가유산 명칭은 '석대들'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결론: 행정·학술 공식 명칭은 석대들, 마을 어르신들 구술이나 옛 책에 나오는 토박이말은 석대뜰로 기억되는 것 — 두 분 말씀이 시대를 달리 보면 둘 다 맞습니다.
석대 지명 유래는?
단톡에서 나온 3가지 설이 전부 문헌에 등장하는 설들입니다.
1. 박석 설 (가장 유력): 김상록님 말대로 성종 때 궁궐이나 종묘 바닥에 까는 납작돌(박석)을 여기서 캐서 운반했다고 해서 石臺라 붙었다는 설. 안성강대희님이 말한 "궁궐·종묘 뜰에 박석 깔았다"는 게 정확히 그 돌입니다.
2. 돌로 쌓은 대(臺) 설: 검색 결과대로 石坮, 坮는 臺의 옛 글자로 돌로 쌓은 높은 곳, 넓은 반석을 뜻합니다.
3. 비석거리 설: 이근호님 추측처럼 비석이 많은 거리를 억지로 한자화한 지명도 전국에 많습니다. 부산 해운대 석대동도 조선시대부터 썼지만 정확한 유래는 모른다고 할 정도라, 단일 유래로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동네 지명은 하나만으로 설명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박석을 캐던 돌 대(臺)가 있는 들" 정도로 이해하시면 제일 무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