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와 잘 지내기 위한 최고의 방법
부부라는 관계는 인간 존재가
타자와 맺을 수 있는 가장 긴밀하고 일상적인 동맹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밀함은 종종 가장 격렬한 갈등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부부는 삶을 함께 나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거울이 되지만, 그 거울은 이상적으로 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거울은 왜곡되고, 기울어 있고, 종종 깨진다.
갈등은 그 깨진 조각 사이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갈등을 줄인다는 것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깊은 내적 작업이다.
부부
사이의 갈등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보다 '어떻게' 싸우는가가 더 중요하다.
감정의 내용보다 감정의 방식이 더 본질적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소한 문제로 다툰다고 말하지만, 그 사소함 속에 감정의 전달, 말의 습관, 눈빛의 해석, 침묵의 의미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갈등을 줄인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 방식'을 허용하는 연습이다.
배우자가 나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졌다는 사실을, 나와는 전혀 다른 해석 체계를 지닌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수용하는 데서부터 갈등의 전환은 시작된다.
사랑은 이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는 사랑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부는 이해를 사랑의 전제조건으로 삼으려 한다.
‘너를 이해할 수 없어, 그래서 너를 사랑할 수 없어’라는 논리는, 사실상 ‘너는 나와 같지 않다’는 선언이다.
하지만 누구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되지 않는 타자를 견디는 힘, 그 견딤 안에서 사랑이 자란다.
갈등을 줄인다는 것은 이 견딤을 가능하게 하는 감정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해석을
보류하는’ 태도, 상대의 말을 내 언어로 바로 번역하려 들지 않는 인내에서 비롯된다.
부부는 종종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상대를 압박한다.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것, 이것은 지식의 목소리다.
그러나 지혜는 말한다.
옳음은 관계를 지탱하는 힘이 아니라, 관계를 파괴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무기일 수 있다고. 부부 관계는 승패의 게임이 아니다.
누군가가 이기면, 두 사람이 함께 지는 구조다.
갈등을 줄인다는 것은 상대를 이기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더 집중하는 전환이다.
그것은 논리의 전쟁에서 물러나
관계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감각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공감과 맥락의 직관 속에서만 가능하다.
침묵
또한 갈등의 중요한 요소다.
사람들은 말을 아껴야 싸움이 줄어든다고 믿지만, 그 침묵이 감정을 억누른 결과라면 오히려 더 큰 폭발로 이어진다.
부부 사이에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마음의 거리를 뜻한다.
갈등은 때때로 표현되지 않았던 감정들의 축적된 흔적이다.
따라서 갈등을 줄인다는 것은,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방식, 말하면서도 다치지 않는 언어를 개발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언어의 윤리를 확장하는 일이며, 이 또한 복원의 작업이다.
기억의 작용도 중요하다.
부부는 함께한 시간만큼 서로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억은 사실을 저장하지 않는다.
기억은 해석이며, 감정이 덧붙은 재구성이다.
부부는 종종 과거의 사건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며, 그 차이가 갈등의 근거가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누가 맞느냐가 아니라, 서로가 ‘각자의 진실’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음은 절대적 진실보다 다중의 진실을 더 섬세하게 다룬다.
갈등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도, 자신의 진실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진실을 ‘가능한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일상의
반복성도 갈등에 영향을 미친다.
부부는 일상이라는 구조 안에서 반복되는 피로를 겪는다.
반복은 안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루함과 권태라는 자동적 반응을 불러온다.
반복 속에서 사람은 상대방을 하나의 패턴으로만 보게 되고, 그 고정된 시선이 갈등을 일으킨다.
갈등을 줄인다는 것은, 매일 같은 얼굴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훈련이기도 하다.
그것은 익숙함 속에서 낯설음을 보는 능력,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사람을 다시 발견하는 시도이다.
반복의 구조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훈련이다.
궁극적으로,
부부 사이의 갈등을 줄인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제한성과 상호성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누구도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성 덕분에 우리는 타자를 통해 성장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존재를 향해 열릴 수 있다.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갈등을 다루는 방식에서 삶의 품격이 드러난다.
부부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상처를 다루는 존재이기도 하다.
갈등을 줄인다는 것은 상처를 주지 않는 기술이 아니라, 상처를 함께 다루는 방식의 전환이다.
이는 결국,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으로 귀결된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태도이며,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다.
갈등을 줄인다는 것은 사랑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상대가 실망스럽고, 때로는 나 자신이 지쳐 있을 때에도, 이 관계를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 사랑은 그렇게 실천이 된다.
그리고 이 실천은, 그 어떤 기법이나 기술보다도 깊은 사유의 열매다.
부부의 갈등을 줄인다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의 타자성
앞에서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야말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장 순수한 체험이 된다.
정신분석으로
진짜 '나'를 찾다.
19세기 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인간의 행동과 감정 뒤에는 무의식적인 동기와 갈등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해요.
정신분석은 이러한 문제들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무의식이란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 억압된 감정,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자리한 곳입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어떤 상처가 무의식에 남아 있다면, 그것이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의 행동과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던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지를 깨닫는 과정이죠.
정신분석은 이러한 반복적인 패턴이 우연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형성된 특정한 감정이나 기대 때문일 수 있다고 봅니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애착 방식이나, 과거에 겪은 감정적 경험이 현재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불안이나 두려움을 직면해야 하고, 과거의 아픈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자신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고, 더 나아가 반복되는 감정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게 됩니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완벽한 자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의식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 자신과 가까워지는 것, 그것이 바로 정신분석이 주는 가장 큰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일상에서 혼자서 해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이 방법들은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간소화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무의식의 신호를 포착하고 자신의 감정과 행동 뒤에 숨은 이유를 조금씩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씩 시도해 보세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도록 유도하며, 무의식
속 억압된 기억이나 감정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데 사용됩니다.
중요한 건 낯설고, 비논리적이고, 부끄럽고, 이상한 생각이라 하더라도 검열하거나 억누르지 않는 거예요. 그냥 흐름에 맡기세요.
그렇게 마음의 문이 열리면, 미처 알지 못했던 내면의 세계, 즉 무의식의 입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관심사와 감정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분석해 내면의 갈등을 이해합니다.
이 방법을 통해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는지 패턴을
발견할 수 있어요.
그는 꿈을 "무의식으로 가는 왕도"라고 부르며, 꿈속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상징이 억압된 욕망이나 내면의 갈등을 반영한다고 생각했죠. 이 방법은 그 해석을 개인적으로 간소화한 버젼입니다.
그 다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적어보세요. (1) 꿈에서 가장 강렬했던 감정 (2) 꿈 속 장소, 인물, 사건의 의미 (3) 최근 삶과의 연관성. 이 내용을 바탕으로 꿈이 자신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세요.
프로이트는 이를 통해 내담자의 무의식 속 관계 패턴을 분석하고, 과거의 경험이 현재 인간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치료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특정한 사람에게 이유 없이 강한 호감이나 반감을 느끼는 경우, 그것이
전이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어린 시절 부모나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가 지금의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과도한 의존을 느낀다면, 과거에 버림받을까 봐 걱정했던 경험이 반영된 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일상 속에서 감정이 흔들리거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들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의 신호를 포착하고, 감정과 행동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은 때로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더 진솔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과정입니다.
거창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하루 동안 느낀 감정들을 돌아보고, 반복되는 행동의 패턴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유독 불안해지는지, 어떤 관계에서 감정이 예민해지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다 보면, 무의식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발만 떼면 됩니다.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오죠. 작은 깨달음이 쌓여 큰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더 나은 삶을 위한 통찰과 변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
오늘은 많은 분들이 고민하시는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정말
쉽지 않은 주제죠. 하지만 살펴봐야할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결혼의 전제로 믿고 있죠.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결혼은 사랑이 사라진 뒤에도 지속됩니다.
심지어 어떤 결혼은 애초에 사랑 없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이 사실은 냉소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식의 다층성과 복합성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결혼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원동력이 아니에요.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종종 의무, 책임, 정서적 계약, 혹은 아주 단단하고 납작한 ‘관습’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실존적 조건이자, 어떤 형태의 철학적 체념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를 바라보지 않지만, 여전히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같은 지붕 아래 잠을 잡니다.
감정은 멈췄지만 삶은 계속되죠. 사랑이 결혼의 이유였다면, 이토록 많은 부부가 왜 이별하지 않는 걸까요? 사랑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는 감정이지만, 결혼은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휘발되지만, 제도는 지속을 요구합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그 지속성에 대해 묻는 철학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관계를 이어가는 걸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감정의 부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상태라는 점이에요. 어떤 이들은 사랑 없는 관계 속에서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혹은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자유를 느끼기도 하죠.
그것은 때로는 피로감의 종식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평온한 절망이 주는 안정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애정의 종말이자, 동시에 어떤 새로운 존재 방식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감정이 아닌 역할로 살아가죠. 부모로서, 혹은 공동생활자로서, 혹은 경제적 동반자로서 말이죠. 여기서 감정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오히려 효율과 기능, 관습과 책임이 관계를 지탱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랑 없는 결혼을 기능주의의 틀 안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감정이 사라졌음에도 구조가 유지되는 이유는, 구조가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의 결혼과도 관련됩니다.
감정은 비용이 들지만, 구조는 이득을 줍니다.
사랑은 언제나 손실의 위험이 있지만, 결혼 제도는 안정이라는 환상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감정의 부재를 감당하고, 그 빈자리에 습관을 채워 넣는 데 능숙합니다.
아침에 마주치는 인사, 반복되는 가족 행사, 명절의 의례들이 바로 그것이죠. 이 모든 반복은 감정이 빠져나간 틈을 메웁니다.
그리고 이 반복은 두 사람을 갈라놓기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리듬으로 묶어줍니다.
사랑이 사라진 후에도 ‘패턴’은 남기 때문이죠. 우리는 그 패턴을 통해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마치 사계절처럼,
변화 없는 반복이 관계를 지속되게 만듭니다.
이 반복 속에서 우리는 덜 다치고, 덜 기대하며 더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삶의 의미가 사랑이 아니라 책임이거나, 자녀이거나, 혹은 생존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바로 그런 삶의 우선순위가 재배치된 상태이기도 하죠. 우리는 사랑이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사랑이 반드시 삶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랑이 파괴적이기도 하고, 불안정하기도 하죠. 반면
사랑 없는 결혼은 정서적 스릴은 없지만, 대신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줍니다.
그것은 인간이 감정보다 질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그것은 인간 존재가 감정에 지배되지 않으며, 때로는 감정을 초월한 구조 안에서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존의 한 양태일 뿐입니다.
이 결혼은 애정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지속 가능성을 입증하는 구조이며, 우리는 그 구조 속에서 감정의 비움조차도 하나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법을 익힙니다.
그것은 어쩌면 한 인간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감정 너머의 윤리적 태도나 생존 전략으로 삶을 이끌어 가는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함께 사는 걸까요? 사랑 없이도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질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그 질문을 껴안고,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들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 없는
결혼생활의 철학이에요.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양한 조건에서 삶을 견디고, 구성하고, 유지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현실적인 풍경입니다.
이 풍경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잃었지만, 삶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존재의 이유가 됩니다.
외모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괴로운 감정을 넘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결정짓는 세계의 시선에 스스로를 맞춰 살아가려는 존재론적 고통이다.
따라서 ‘못생겼다’, ‘뚱뚱하다’는 평가는 순전한 외형의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낙인이고, 존재 자체를 결핍으로 규정하는 말이다.
그런 평가 속에서 자라난 사람은 타인의 눈을 통해 자기 얼굴을 인식하게 된다.
거울은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도구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내재된 기계가 된다.
그 순간부터 사람은 자기 얼굴을 ‘사랑할 수 없는 대상’으로 보게 되고, 자신의 몸을 ‘수치스러운 껍데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열등감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문제이며, 따라서 존재의
문제다.
세상은 외모를 평가하는 기준을 ‘객관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객관성이라는 말에는 권력이
숨어 있다.
그것은 어떤 얼굴이 ‘정상’이고 어떤 몸이 ‘정상’이 아닌지를 결정하는 이데올로기다.
‘예쁘다’는 말은 곧 ‘이래야 한다’는 말이며, ‘뚱뚱하다’는 말은 ‘그래선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기준이 내면화되면, 사람은 타인 앞에서 자신을 감추려 들고, 스스로를 설명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마치 존재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 자신을 합리화하고 포장하고 비웃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 오늘 화장을 안 해서...”라는 말은 그 자체로 슬프다.
존재를 해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에서, 외모 열등감은 결국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사회적 수치심이다.
못생겼다는 말에는 미적 기준을 넘어서는 잔혹함이 있다.
그것은 “너는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너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예언에 가깝다.
뚱뚱하다는 말 역시 생물학적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추방의 코드다.
‘지금 너는 이 무대에서 설 자격이 없다’는 선언이다.
그러므로 외모 열등감은 단순히 외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가치가 외면당했다고 느끼는 절망에서 비롯된다.
이 감정은 깊고 날카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다’는 무의식적 메시지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 반복은 사람을 침묵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왜곡시킨다.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삶 전체를 미워하게 된다.
외모 열등감은 종종 자기 비하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먼저 타인이 자신을 공격하기
전에, 자기가 자신을 먼저 무너뜨려버리려는 방어 전략이다.
타인의 조롱보다 더 아픈 것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그 조롱을 맞는 일이다.
그래서 외모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먼저 비하함으로써 마음의 방패를 만든다.
그러나 이 방패는 결국 칼이 되어 자신을 찌른다.
매 순간 자기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모욕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은 외모 열등감이 개인의 내면 전체를 잠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징표다.
이것은 미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자기 존재를 보호하고 싶은 절박한 심리의 구조다.
이 열등감은 타인의 인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누군가 “예쁘다”, “괜찮다”, “살 좀 쪘다고 어때?”라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말들은 세계가 강요하는 기준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모 열등감은 단순히 누군가의 말로 치료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자기 몸과 맺는 방식, 자기 얼굴에 대한 태도, 나아가 자기 삶을 살아가는 감각을 통째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래서 외모 열등감의 극복은 결국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는 왜 내 얼굴을 감추고 싶어하는가? 나는 왜 이 몸이 존재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가? 나는 왜 타인의 기준을 내 삶의 절대 기준으로 삼고 살아왔는가? 이 질문은 고통스럽지만, 이 질문 없이는
극복도 없다.
외모 열등감을 극복한다는 말은 어쩌면 잘못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가며 계속 협상해야 할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괜찮다가도,
어떤 날은 다시 무너지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눈물을 참아야 할 수도 있다.
이 반복 속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나다’라는 조용한 문장을 되새기는 힘이다.
이 말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선언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안에서 되뇌어야 하는 진술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기준이 강요되어도, 나라는 존재의 고유성을 지워지지 않게 붙잡는 것. 외모 열등감은 이 문장을 지키는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나를 단단히 붙잡아주는 것은 가끔 나 자신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내 존재를 온전히 바라봐주는 단 한 사람, 내 얼굴이 이상하다는 말 대신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 내 몸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주는 사람, 나를 '외모'라는 프레임으로 가두지 않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은 꼭 연인이 아니어도 된다.
친구, 가족, 혹은 지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외모 열등감이라는 감옥에 갇힌 나에게 “문은 열려 있다”고 말해줄 누군가의 시선이다.
그 시선은 외모의 기준을 뒤흔들지 않더라도, 내가 존재할 수 있는 다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외모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며,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어떤 관계, 그것이 회복의 실마리가 된다.
끝으로, 외모 열등감, 못생기고 뚱뚱하다고 느끼는 그 감정은 사실, ‘나는 사랑받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거야’라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그 두려움을 꺼내어, 외부의
기준이 아닌 자기 삶의 감각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 때, 사람은 자기 존재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세울 수 있다.
나는 이 얼굴로 살아간다.
나는 이 몸으로 살아간다.
나의 존재는 나의 것이다.
이 선언은 외로울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외로움 속에서 비로소 자기 삶이 시작된다.
외모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을 껴안고 살아가는 방식은 분명 달라질 수 있다.
그 변화는 아름다움보다 더 깊고, 더 단단한 삶의 형식으로 남는다.
뇌과학으로 보는 사랑의 유효기간
사랑은 폭발적으로 시작된다.
뇌 속에서는 도파민이 분출되고, 세로토닌은 비정상적으로 낮아지고, 옥시토신은 둘 사이를 붙잡아놓는다.
연애 초기, 우리는 일종의 생물학적 황홀경에 빠진다.
도파민은 기대와 보상의 회로를 자극해 사랑을 마치 마약처럼 느끼게 만들고, 낮아진 세로토닌은 강박적으로 상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은 생존의 문제로 포장된 진화적 트릭이다.
‘이 사람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착각을 일으켜야 종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뇌가 작정하고
우리를 속이는 일종의 착시다.
하지만
이 황홀경은 오래가지 않는다.
신경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도파민 기반의 초기 사랑이 평균 1년 반에서 3년 사이에 꺼진다고 말한다.
우리의 뇌는 흥분과 보상에 익숙해지고, 자극에 대한 민감도는 점점 떨어진다.
처음에는 상대의 손끝만 스쳐도 심장이 뛰지만, 어느 순간 옆에 누워도 아무 감흥이 없다.
이는 뇌가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가려는 자연스러운 생리 작용이다.
낯섦은 열광을 낳고, 익숙함은 무감각을 낳는다.
사랑의 열기는 이른바 ‘신경의 중독 상태’이고, 그 중독은 결국 해소된다.
이 시점에서 사랑은 분기점을 맞는다.
뇌의 열광이 꺼졌을 때, 그 자리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때 중요한 건 ‘애착’이다.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관계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호르몬들은 섹스나 스킨십, 정서적 유대 속에서 분비되며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는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이 역시 영원하지 않다.
애착도 돌봄과 반복적 교류가 없으면 줄어든다.
결국 인간의
뇌는 ‘지속적인 돌봄’에만 충실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 되어야 지속될 수 있다.
유효기간은 곧, 돌봄의 지속 여부다.
신경과학은 냉정하다.
감정은 일시적이며, 뇌는 그것을 분비하고 줄이고 없애는 생물학적 장치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주 “마음이 식었어”라는 표현을 쓰지만, 정확히 말하면 뇌가 식은 것이다.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뇌는 더 이상 그 자극을 추구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슬프게도 ‘사랑이 끝났다’고 느낀다.
그러나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은 끝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다.
사랑은 오래 지속되도록 설계된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빠르게 행동으로 전환되어야만 생존에
유리한 감정이었다.
그렇다고 사랑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유효기간을 알기에, 우리는 사랑을 더욱 정성껏 다뤄야 한다.
처음의 불꽃은 반드시 사그라지며, 그 이후엔 불씨를 지키기 위한 다른 방식의 애씀이 필요하다.
감정에 의존하기보다, ‘지속 가능한 돌봄’을 실행해야 한다.
말보다는 행동, 흥분보다는 반복, 설렘보다는 안정. 이것이 뇌가 진짜 원하는 사랑의 방식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감정의 깊이’로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돌봄의 빈도’가 훨씬 더 중요한 지표다.
뇌는 꾸준히 돌보는
관계에 충성한다.
결국 사랑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 이후는 관계가 지속될 것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새로운 게임의 시작이다.
뇌는 늘 새로움을 원하고, 보상을 계산하며, 피로한 감정은 정리하려 든다.
우리는 그것을 ‘실망’이나 ‘권태’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의 문제다.
시스템은 늘 같은 자극을 버리려 하고, 더 강한 자극을 찾아 헤맨다.
이것은 뇌의 이기심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유지하는 일은, 그
본능과 싸우는 일이다.
뇌가 도파민을 포기해도, 나는 관계를 선택하겠다는 선언이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랑은 습관이다.
신경과학은 이 말에 가장 냉정한 근거를 부여한다.
감정은 떨어지고, 습관만이 남는다.
사랑이라는 습관을 지속할 때, 뇌는 다시 새로운 회로를 만들고, 새로운 호르몬을 분비한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열정보다는 깊이를 배운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는 묻는다.
“나는 여전히 이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가?” 그 물음에 ‘예’라고 답할 수 있다면, 사랑의 유효기간은 연장된다.
유효기간이란 관계가 숨 쉬는 시간이며, 마음이 이어지는
시간이다.
뇌는 그렇게 사랑을 다시 학습한다.
부부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정신분석적 실천법
부부 관계란 단순히 함께 사는 두 사람의 생활 방식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개의 무의식이 함께 살아가는 독특하고도 복잡한 구조물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바라볼 때, 부부 관계는 두 개인의 어린 시절 상처, 부모와의 동일시, 욕망의 흔적, 억압된 기억, 결핍에 대한 무의식적 기대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심리적 장場'이다.
이 관계 안에서는 과거에 말해지지 못한 욕망이 현재의 삶을 왜곡하고, 반복되며, 다시 재현된다.
따라서 부부 관계를 개선하는 정신분석적 방법은 현재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의 무의식을 탐색하고 언어화하여 서로의 상처와 반복을 인식하고, 그것을 조금씩 수정해가는 깊고도 섬세한 작업이다.
정신분석적 접근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지금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이미 벌어졌던 일의 반복이다”라는 점이다.
이를 ‘반복 강박’이라
하는데, 부부 싸움에서 반복되는 패턴, 예를 들어 ‘항상 나를 무시한다’, ‘늘 혼자라고 느낀다’, ‘그 사람은 날 통제하려고 든다’는 식의 감정은 종종 현재의 배우자보다 과거의 누군가에게 더 가까운 무의식적 반응이다.
이는 흔히 유년기의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애착 방식이 현재의 관계 속에서 재현되는 양상이다.
이러한 반복을 의식화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다.
내가 배우자에게 느끼는 어떤 감정은 사실 내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감정일 수 있으며, 이 감정이 지금 이 순간 왜 그렇게 격렬하게 발현되는지를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복을 ‘관찰’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꼈을 때, 나는 상대에게 무엇을 기대했나?”, “그 기대는 어디서 왔고, 지금도 유효한가?”, “나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들은 그동안 간과했던 우리의 내면을 바라보게
해준다.
이는 부부가 서로를 ‘상처 주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도와주며, 관계를 살아 있는 장場으로, 계속해서 수정 가능한 무의식적 작업장으로 바꾸는 힘이 된다.
정신분석은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언어는 단순히 ‘대화’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억압되었던 감정, 금지되었던 생각, 감추어진 욕망을 말로 꺼내는 작업이다.
부부 상담에서 종종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말하면 파국이 날까 봐, 혹은 나조차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몰라서 등을 조심스럽게 꺼내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원망이나 분노, 실망이나 질투 같은 형태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들의 이면에는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결핍이 반복되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단서가 들어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타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반응과 해석을 다르게 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투사(projection)’다.
투사는 마음속에 있는 불편한 감정이나 욕망을 상대방 탓으로 돌리는 방어기제다.
예를 들어, 내가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느낄 때,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저 사람은 나를 무시해"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경향을 갖고 있다.
부부 관계는 이러한 투사와 투사의 교환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심리적 무대다.
따라서 부부가 서로를 비난하고 방어하기보다, 내가 상대에게 무의식적으로 떠넘긴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상대방이 드러내는 분노는 어쩌면 내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업은 종종 고통스럽지만, 그것 없이는 관계는 진정한 변화에 도달하지 못한다.
정신분석은 궁극적으로 ‘나도 모르게 반복되었던 방식’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천천히 수정하며, 더 나은 형태로 욕망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다.
부부 관계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 이것은 곧 ‘서로를
고치려는 노력’을 내려놓고, ‘서로를 통해 나 자신을 이해하는 노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화나게 했을 때, 그것이 단지 그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무의식적 상처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반응 너머에 있는 ‘말해지지 않은 고통’을 듣고 말하게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친밀함의 시작이다.
이러한 작업은 상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무의식적 근력 운동’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아니고, 감정에 함몰되는 것도 아닌, 감정을 관찰하고 언어화하는 힘이다.
“지금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그것은 나의 어떤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가?”,
“그 감정을 이 관계 안에서 어떻게 반복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은 가능한가?” 이 질문들을 반복적으로 던지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조금씩, 아주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부부 관계를 개선한다는 것은 단순히 잘 지내는 법 이상이다.
그것은 내 안의 상처와 반복을 마주하고, 그것을 통해 나와 타인 모두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그것을 ‘치유’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이며, ‘언어화’이고, ‘인식’이다.
치유는 그 다음에 온다.
말해질 수 있을 때, 이해받을 수 있을 때, 반복을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덜 잔인해질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