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아병원장이 가리키는 의료의 길


경기 의정부 소재 튼튼어린이병원 최용재 원장(대한소아청소년병원협회장)


 겨울의 한복판이었던 지난해 12월 어느 날 밤. 호흡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상태가 위중한 생후 5개월의 환아를 마주한 의사는 꼬박 두 시간을 전화통이랑 씨름했다.

중환자실을 갖추지 못 한 터라 응급처치 말고는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돌이켜보니 전화를 건 병원이 수 십 군데였다고 한다.
가까스로 아이를 받아주겠다는 상급종합병원을 찾아 전원 시킨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응급 환아가 골든타임을 놓쳐 목숨을 잃는 일이 여기에서도 곧 벌어질 수 있겠구나.' 

은 그 날의 일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최 원장이 이후로 몇 개월에 걸쳐 사재 등 20억원 가량을 끌어 모아 병원에 소아중환자실을 구축한 건 이처럼 "억장 무너지는" 경험이 누적된 데 따른 것이다.
최근 본격 가동하기 시작한 이 병원의 소아중환자실은 모두 3개의 병상을 갖추고 있다.
어차피 하는 거 제대로 해 보자는 생각에 값비싼 최첨단 장비를 두루 들여놓았다.

어지간한 대형 병원도 부담스러워하는 게 응급의료다.
현행 의료 규정상 정부 지원은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튼튼어린이병원 같은 작은 병원이 중환자실을 운영하면 적자는 불 보듯 뻔하다.
그는 이런 결단이 "소아 의료체계의 붕괴로 열악해진 진료 환경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긴급처방"이라면서 "의사 개인의 선의에만 어린 생명을 맡기는 사회가 너무 무책임하다"고 본지에 말했다.
환아 30~40명 보는 것보다 필러 시술 1명 하는 게 더 이득인 것이 우리 의료시장의 구조다.
코로나19 시기에 폐업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들 가운데 약 35%만이 이후로도 그 분야에서 진료를 계속 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돈 되는' 다른 분야로 빠지거나 의사 일을 아예 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는 우리 소아청소년 의료 체계의 단면이자 '소아과 오픈런'이라는 웃지 못 할 조어의 이면이다.
지난해 전국 50개 대학병원 가운데 38곳은 소아청소년과에 지원한 전공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소아청소년의료의 현재 뿐 아니라 미래도 이처럼 암울하다.
의대생들이 온전히 '복귀했다 치고' 내년도 의대 모집인원을 동결하는 것으로 정부가 사실상 항복했음에도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약 2만5000명(주최측 추산)을 거리로 데리고 나와 위력행사를 했다.
소아 대상 의료체계 등을 조금이나마 강화하는 내용이 담긴 필수의료패키지를 의대 정원 2000명 증원과 무리하게 연계해 곳곳에 커다란 상처만을 남긴 채 손을 놓아버린 정부가 무능하다면, 모집인원 동결이라는 양보를 받아내고서는 필수의료패키지를 포함한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리라고 압박하는 이들은 무시무시하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밑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저 병원장의 분투가 의료체계와 의사들의 나아갈 방향이 어딘지를 웅변하지만 의사집단은 보통사람이 도무지 알아듣기 어려운 논리를 앞세워 판을 뒤흔드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 후보는 ▲사회적 합의를 통한 의대 정원의 합리화 ▲공공의대 설립 등을 담은 의료정책 구상을 내놓았다.
일부 대목에서의 각론과 취지는 현 정부가 제시했던 그것과 비슷하며, 공공의대 등 일부는 더 예민하고 논쟁적이다.
다른 후보들이 제시할 청사진 또한 의사집단에게 흔쾌할 가능성은 낮다.
의협의 궐기는 2차전 또는 연장전의 승기를 잡기 위한 으름장이자 자신들이 생각하는 합리의 기준은 전혀 다르다는 외침으로 들린다.
결기와 지혜가 동시에 요구되는 과제다.
다른 걸 다 떠난 원포인트 정책연대 같은 정치적 상상력과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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