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거품을 먹고 자란다

이용관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대표
이용관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대표게임의 법칙이 변했다.
한국을 10대 경제 강국의 위치로 끌어올린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은 한계에 봉착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IT 산업 전환기에 기민하게 대처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산업 재편이 시작됐고, 여기에 좁은 국토로 인한 초고속 인터넷망 설치의 용이함, 정부의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와 국민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맞물리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AI(인공지능)가 새로운 산업 질서를 이끄는 지금, 국내 투자 생태계 전반에 '열패감(劣敗感)'이 감돈다.
따라가기도 벅차다는 현실인식이 배경이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은 이제 선도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버리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의 게임을 요구한다.
 HBM(고대역폭메모리)과 파운드리 등 핵심 기술 경쟁력 확보에 소홀하며 전사적 위기를 맞이한 삼성전자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반도체 분야의 명실상부한 1위 기업이 한순간에 경쟁사들의 뒤편으로 저만치 밀려난 모양새다.
AI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오픈AI에서 챗GPT가 출시된 지 단 1년 반만에 기술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졌다.
딥시크를 위시한 중국이 후발주자의 위치에서 빠르게 추격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그 중국과의 기술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이야 말로 AI의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2016년 3월 '알파고-이세돌 대국'이 눈앞에서 벌어졌는데도, 이를 '일회성 이벤트'로 소비하는 데 그쳤다.
해당 사건 이후 전세계에선 AI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시작했으며, AI의 응용 가능성을 모든 산업에 확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세돌의 '신의 한수'에만 주목했다.
 AI가 보여준 가능성의 미래는 온데간데 사라졌다.
이어진 근 10년의 세월에서 AI 스피커의 엉뚱한 대답을 유희하는 수준에서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처럼 산업이 요동치는 시점에 '거품'조차 없다는 것이다.
'자본'과 '인재'의 부족은 부차적 문제에 불과하다.
산업이 안정화되고 성장 경로가 명확한 시기에는 계획적이고 보수적인 투자가 타당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술의 불확실성이 크고 파괴적 혁신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시기에는 예측보다 신속한 대응이 중요하다.
격동기에는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과감한 시도와 실험이 장려되어야 한다.
비록 외형상 거품처럼 보일 수 있어도, 이는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한 필연적 비용이자 성장의 동력이다.
앞서 한국이 누려온 IT 강국의 영광은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의 유산이었다는 값비싼 경험에도 여전히 정부와 시장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반면 중국은 과감한 투자와 실패에 대한 관용이 어우러지며 기술적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그들이 만든 로봇은 이미 걸음마를 떼고 마라톤에 도전하고, 자동차는 운전자 없이 도시 전체를 누빈다.
드릴로 뚫고 전기톱으로 잘라도 불이 붙지 않는 값싼 소금(나트륨) 배터리마저 내놨다.
새롭게 판을 짜고 독점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시도가 산업 전반에서 이뤄지고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혁신을 위한 씨앗을 심어야 한다.
 AI 분야는 다양한 서비스가 태동 중이고, 휴머노이드나 양자컴퓨팅 등 아직 글로벌 리더가 정립되지 않은 분야는 여전히 많다.
한국이 보유한 제조업 경쟁력과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는 여전히 강력한 무기다.
이를 글로벌 시장과 연결하는 전략과 함께 무모해 보일 정도의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의 전설적인 벤처투자자 피터 틸이 '가장 큰 위험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품은 거품대로 필요하다.
혁신은 안전지대 밖에서 싹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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