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미 통상협상에서 미국이 환율 문제를 전면에 꺼내 들면서, 양국 간 협상 구도가 크게 달라졌습니다.
매우 민감할 수 있는 환율과 통화정책 문제를 테이블에 올림으로써, 더 유리한 협상 결과를 이끌어내려는 미국의 전략이 본격화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번 환율 압박은 한국 경제에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변화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어, 대응 전략 마련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오늘은 미국이 환율 문제를 꺼낸 배경과 전략, 과거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 벌였던 주요 환율 협상 사례를 살펴보고, 이번에 한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환율로 한국 압박 시작한 미국
1) 베센트 장관, 왜 환율 이야기를 꺼냈을까
이번 한미 2+2 통상협의에서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이 '환율' 문제를 주요 의제로 전격 포함시키면서 한미 협상 테이블이 예상보다 복잡해졌습니다.
통상협상은 원래 관세, 비관세장벽, 투자 규제 완화 등 두 나라 간 교역과 관련된 의제를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고, 통화가치나 환율, 외환시장 개입 문제는 보통 양국 중앙은행과 국제기구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이 환율 문제를 통상협상 카드로 본격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공식화한 겁니다.
비관세장벽: 비관세장벽이란 직접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관세 대신, 수입품에 다양한 규제를 적용해 해외 제품의 진입을 어렵게 만드는 조치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복잡한 안전 인증, 환경 기준, 기술 규격, 행정 절차 등을 통해 사실상 수입을 제한하는 방식이 이에 해당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기 행정부 출범 이후부터 한국 원화가 다른 주요국 통화 대비 유독 약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아 왔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원화 약세가 한국 수출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이는 미국의 관세 정책 효과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라고 보고 있는데요. 아직 정확한 논의 사항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베센트 장관은 원화 약세가 무역의 공정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인식에 따라 이번 한미 통상협상에서 환율
문제를 별도로 제기한 것을 보입니다.
원화 약세와 수출 경쟁력: 원화가 약해진다는 것은 같은 금액의 달러로 더 많은 원화를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 제품을 구매하려는 해외 소비자 입장에서는 한국 상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싸게 느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국내에서 100만 원에 판매하는 제품이 있다고 가정할 때, 환율이 1달러에 1,000원이면 해외 소비자는 1,000달러를 내야 이 제품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율이 올라
1달러에 1,200원이 되면, 같은 100만 원짜리 제품을 이제는 약 833달러만 내고 구매할 수 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해외 시장에서 한국 제품은 가격이 내려간 것처럼 보이게 되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특히 베센트 장관이 환율 문제를 의제화한 것은 미국이 한미 통상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점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됩니다.
미국은 올해 7월까지 한미 간 주요 경제 현안을 일괄 타결하는 '패키지딜'을 추진하고 있는데, 환율을 이 협상의 주요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거죠.
관세 인하나 투자 확대와 같은 분야에서 한국의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환율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테이블에 올려 협상력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입니다.
2) 강달러를 유지한다면서, 왜 환율을 문제 삼지?
트럼프 행정부 2기는 공식적으로는 '강달러'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베센트 재무장관 역시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는 강력한 달러를 지지한다"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강달러 정책은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 압박을 최소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수입품 가격이 달러 강세 덕분에 상대적으로 낮아지기 때문에, 소비자 물가가 급등하는 현상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는데요. 또한 강달러는 미국
국채와 금융자산의 투자 매력을 높여, 글로벌 자본을 지속적으로 미국으로 끌어들이는 데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다만 실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나 최근 흐름을 보면, 강달러 방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약달러를 선호하는 듯한 신호도 함께 나오는 모습입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엔화와 위안화가 지나치게 약세를 보이고 있다"라고 비판하거나, "달러가 너무 강해 수출에 불리하다"라며 지적하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트럼프 행정부는 강달러를 유지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내세우면서도, 필요에 따라 약달러 지향적
메시지를 활용하는 이중적인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달러를 강조하는 미국이 낮은 원화 가치(=상대적으로 높은 달러 가치)를 문제 삼는 것도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정교한 전략이 숨겨져 있습니다.
미국은 자국 통화가 강하더라도, 동맹국들이 자국 통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춰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려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강달러를 감수하는 대신, 동맹국 통화 약세를 차단해 미국 제조업이 경쟁에서 밀리는
것을 막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즉, 미국은 자국 경제를 위해 '공식적으로는 강달러', '비공식적으로는 동맹국 통화 절하 차단'이라는 이중 전략을 펼치고 있는 셈입니다.
3) 일본은 다르게 대한다고?
흥미로운 점은 미국이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는 환율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센트 장관은 일본과의 협상에서 "환율 목표는 없다"라고 명확히 밝혔으며, 일본이 과거 G7 합의에서 약속했던 '시장에 의한 환율 결정' 원칙을 준수하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습니다.
다만, 이는 일본의 외환시장 정책을 긍정했다기보다는, 미국이 전략적 판단에 따라 일본에 대해 보다 신중한 접근을 선택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G7 합의: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등 주요 7개국이 외환시장에 대한 공동 원칙을 정한 것으로, 환율은 시장의 힘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돼야 하며, 각국 정부가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통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은 과거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 급등으로 수출 경쟁력이 약화하고 장기 불황에 빠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일본은 이번에도 미국이 엔화 절상 압박을 가할지 긴장했지만, 베센트 장관은 환율에 관한 구체적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가토 가쓰노부 일본 재무상도 "미국 측에서 환율 수준이나 목표, 환율을 관리하는 체제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라고 밝혔는데요.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이번 회담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당분간 미국으로부터 환율 조정 요구를 받을 가능성은 낮아졌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이는 단순히 일본이 G7 합의를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일본과의 협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최근 금융시장 불안 등 국내 경제 상황을 감안해 외환시장 불확실성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미국은 일본과의 경제·외교적 관계를 중시하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환율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은 것이죠.
2. 미국의 환율 전략 40년 변천사
1) 1980~1990년대, 환율 조정에서 강달러 정책으로
1980년대 초 미국은 고금리 정책의 여파로 달러 가치가 급등하고 제조업 기반이 약화하면서 심각한 무역적자에 직면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85년 미국은 플라자 합의를 주도하여 달러 약세를 유도했습니다.
주요국들과 함께 외환시장에 개입해 인위적으로 달러 가치를 낮추는 방식으로 수출 경쟁력을 회복하려 했죠.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가치는 급락했고, 미국의 무역수지는 개선되었지만, 동맹국들, 특히 일본에는 예상치 못한
경제적 충격을 안겼습니다.
플라자 합의: 1985년 미국과 주요국들이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여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기로 합의한 사건입니다.
당시 미국은 달러 강세로 무역적자가 심화하자 이 조정을 추진했으며, 그 결과 일본 엔화가 급격히 절상되었고, 일본 경제는 이후 버블 붕괴와 장기 불황을 겪게 되는 부작용을 맞았습니다.
달러 약세가 과도하게 진행되자, 미국은 1987년 루브르 합의를 통해 환율 변동을 진정시키려 했습니다.
이후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방향을 바꿔 '강한 달러는 미국의 국익'이라는 공식 노선을 채택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강달러 정책은 세계 자본을 미국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IT 붐과 함께 미국 경제는 빠른 성장세를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의 미국 환율 전략은 직접적인 시장 개입보다는 시장 신뢰를 기반으로 금융패권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루브르 합의: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약세가 지나치게 심화하자, 1987년 미국과 주요국들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모여 환율 변동을 안정시키기로 다시 합의한 사건입니다.
이 합의는 플라자 합의로 시작된 통화시장의 급격한 변동성을 억제하고, 환율을 보다 안정적인 범위 안에 두자는 취지로 이루어졌습니다.
2) 2000~2010년대, 환율에 대한 간접 관리 강화
2000년대 초반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시장에 맡기는 환율 결정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주요 통화국들의 환율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며 간접적 압박을 강화해나갔습니다.
중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과 무역 흑자 확대가 본격화하면서, 미국은 위안화 환율 문제를 지속적으로 문제 삼았는데요. 2005년 무렵, 미국은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일부러 낮게 유지해 무역에서 이익을 보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위안화 가치를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지만, 이후에도 미국은 '환율조작국' 지정을 무기로 삼아 중국에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했습니다.
중국 환율조작국 지정: 중국은 2000년대 후반부터 위안화 가치를 낮게 유지해 수출 경쟁력을 높이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이 환율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무역흑자를 확대하고 있다고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습니다.
결국 2019년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공식 지정했는데, 이는 미중 무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급격히 낮춘 데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다만 이후 미중 1단계 무역합의가 이뤄지면서
2020년 초 중국은 환율조작국 지위에서 해제되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달러 강세 현상이 다시 강화됐고, 미국은 환율에 대한 직접 개입보다는 금융정책과 국제적인 규범 설정을 통해 우회적으로 달러 지위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 시기의 미국 환율 전략은 강달러를 표방하면서도 신흥국 통화가 과도하게 약세를 보일 경우에는 경계심을 드러내는 식으로 유연하게 조정됐죠.
명시적 조정보다는 금융 규범과 제도적 틀을 통해 달러 중심 체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전략이 진화한 것입니다.
3) 2020년대, 강달러 유지와 선택적 환율 압박 병행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환율 전략은 보다 다층적이고 실용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2기는 명확히 강달러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주요 교역 상대국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환율 압박을 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외환시장 개입에 대해 경고하고 환율을 협상 의제에 포함시킨 게 대표적인데요. 일본에 대해서는 외교적 이유로 직접적 환율 조정 요구를 하지 않는 대신, G7 시장결정 원칙 준수를 요구하며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은 자국 통화가 강세를 유지하는 한편, 동맹국과 경쟁국들이 통화 약세를 통해 무역 우위를 점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이중 전략을 펴고 있습니다.
과거 플라자 합의처럼 다자간 조정이 아니라 양자 협상을 통한 개별 압박이 중심이 됐고, 필요에 따라 통화 정책을 무역 협상의 카드로 활용하는 경향이 뚜렷해진 건데요. 결과적으로 미국의 환율 전략은 40년 동안 달러 패권 강화를 축으로 하되, 시대별 환경에 맞춰 방법과 강도를
조절하는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3.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1) 조용히 들어오는 압박
시장에서는 과거 플라자 합의처럼 여러 나라가 한꺼번에 모여 환율을 조정하는 방식은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신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별장인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주요 나라들과 각각 따로 만나 환율 문제를 조율할 가능성이 거론되는데요. 이른바 '마러라고 합의'입니다.
트럼프 행정부 2기는 다자주의보다는 양자 협상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이런 방식은 과거 플라자 합의처럼 공식적인 공동 발표
없이, 조용히 개별 국가를 압박하는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만약 미국이 원화 가치를 끌어올리라고 직접 요구할 경우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협상은 양측 합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국이 동의하지 않는 한 환율 조정이 공식 합의문에 포함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관세 인하나 투자 협력 같은 다른 주요 의제와 환율 문제를 연계해, 결과적으로 환율 조정이나 외환시장 개입 투명성 확대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공식 문서에는 환율에 대한 조항이 명시되지 않더라도, 다른 협상 조건과 맞물려 사실상 환율 문제를 부담으로 떠안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건데요. 따라서 한국은 환율 이슈가 협상의 다른 부분에 은근히 얽히지 않도록, 별도의 협상력을 키우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조선업이라는 비교우위 활용
하지만 단순히 환율 이슈만 방어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한국은 이번 협상에서 조선업 같은 전략산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협상력을 높여야 합니다.
한국은 고부가가치 선박, 특히 LNG 운반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이 에너지 수출을 확대하려면 한국 조선업체들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협상 카드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미국 경제안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환율
문제에서는 한국 입장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번 협상을 단순한 방어전이 아니라, 한국의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기회로 삼는 시각 전환이 중요한 시점이죠.
3) 원화 가치가 높아지면 어떻게 될까?
만약 미국의 압박에 따라 한국이 외환시장 개입을 크게 줄이거나 원화 가치를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가장 먼저 수출기업들이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동차, 전자, 철강처럼 가격에 민감한 산업은 원화 강세로 인해 해외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글로벌 경기 둔화가 이미 진행 중인 상황에서 추가적인 환율 부담은 기업들의 수익성과 투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금융시장에도 불안이 퍼질 수 있습니다.
원화 강세가 급격하게 진행되면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과 채권 매매 움직임이 요동칠 수 있고, 금리 인하 압력도 다시 커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은 단순히 환율 방어에 머물지 않고, 내수 시장을 키우고 수출 제품의 품질을 높이는 등 경제 전반의 체력을 강화하는 중장기 대응이 필요합니다.
환율은 국가 경제의 체력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번 통상협상에서 한국은 미국의 환율 압박에 대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 반도체, 에너지 산업 등 비교우위 분야를 적극 활용해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단기적 방어를 넘어서 장기적인 경제 체질 개선과 글로벌 협력 확대까지 꾀하는 '공격적 방어' 전략이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