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류한욱·김경일의 책 ‘적절한 좌절’에서 ‘정서적 비만’이란 표현을 보았다.
조너선 하이트의 책 ‘나쁜 교육’의 “오프라인의 과보호”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했다.
이 말은 ‘온라인의 과소 보호’란 말과 비교할 때 더 강력해진다.
요즘은 아이에게 벌어지는 온갖 갈등과 장애물을 부모가 미리 제거하곤
하는데, 이런 행동은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방해한다.
최근AI열풍을 보며 내가 가장 염려하는 건, 인간을 능가하는 발전 속도가 아니라AI의 태도다.
인공지능 특유의 과도한 칭찬과 공감이 요철처럼 울퉁불퉁한 실제 인간관계를 오히려 두렵게 하는 역설적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AI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인터뷰한 방송이 나왔고, 샘 올트먼은 챗GPT최신 버전의 ‘아첨꾼 기질’을 인정하고 이를 수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좋아요’만 있던 시절의 페이스북처럼 사용자의 긍정 반응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학습하다 보니 생긴 과도한 친절과 동조 현상의 부작용이었다.
2013년 개봉한 영화 ‘Her’에는 인공지능 여성과 사랑에 빠져 혼란을 느끼는 남자가 등장한다.
재미있는 건 영화 배경이 2025년이라는 설정이다.
영화적 상상이 현실이 된 셈이다.
인간의 성장은 공감, 경청, 배려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성장은 갈등, 불협화음, 실패를 이겨나가는 과정에서 더 잘 이뤄진다.
하지만 과잉 애정에 따른 정서적 비만은 작은 갈등조차 트라우마로 확대 해석해 절망하는 나쁜 심리적 습관으로 굳어질 수 있다.
과보호한 아이는 내면의 불편이나 작은 마찰도 견디지 못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집으로 가출한다”는 역설적 표현이 등장한 이유다.
AI시대, 아이에게 필요한 건 오히려 공감이 아닌 적절한 좌절일지 모르겠다.
실패에서 배우는 법,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경험,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배우는 것.AI가 몰고 올 ‘과도한 공감’ 시대에 가장 큰 경쟁력이 회복 탄력성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
요즘 눈에 띄는 미남 미녀 연예인이 참 많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우리 곁에 남아 따뜻한 웃음과 눈물을 안겨줄 얼굴이 누구일까 생각하면 전혀 다른 얼굴이 떠오른다.
찰나의 반짝임보다 긴 시간 우리 곁을 지켜온 얼굴들. 이순재, 신구, 김영옥, 나문희, 윤여정 같은 배우 말이다.
그들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소위 ‘만찢남녀’나 전형적 미남 미녀 계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어쩌면 그들의 시작은 눈에 확 띄는 화려함보다는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평범한 풍경에 가까웠을지 모르겠다.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듯한 얼굴 주름과 자연스러움. 그것은 폭발적인 스타성과는 다른 차원의 ‘아우라’로, 보통 재능을 가진 이가 끝없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서서히 구축해 나가는 성장 서사에 가깝다.
젊은 날 우리는 종종 조급해진다.
빨리 인정받고 남들보다 반짝이고 싶어서 그런다.
‘나는 왜 저들처럼 특별하지 않을까’ ‘언제쯤 내게도 화려한 순간이 올까’ 하는 초조함에 밤잠을 설친다.
그러나 이 거장들의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삶이라는 긴 무대에서 중요한 건 어쩌면 폭죽처럼 터지는 화려함이 아니라, 은은하지만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꾸준한 노력과 체력이라는 지혜 말이다.
젊은 날의 불안과 방황을 지나온 노년이 건네는 삶의 경륜은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이 있다.
청춘이 이들의 삶에서 배워야 할 건 그 과정의 가치다.
꽃의 화려함은 눈부시게 짧고, 봄의 꽃만큼 늦가을의 단풍도 깊고 아름답다.
뮤지컬을 좋아하지만 요 몇 년 일부러 연극을 많이 봤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이들의 공연이 유독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건강 문제로 연극을 전면 취소한 이순재 배우의 무대는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나는 그의 무대를 ‘다시’ 기다린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말을 이 아름다운 노배우에게 남긴다.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다.
보통의 기준
오래전, 유학 가기 싫다는 딸과 통화하는 선배를 본 적이 있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를 외치던 딸에게 “평범하게 살라고 유학 보내는 거야.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기가 쉬운 줄 알아?”라고 답하던 선배의 말이 여전히 기억난다.
아이가 어떻게 자라길 바라냐는 질문에 부모들의 가장 흔한 답은 뭔가 특별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함정이 있다.
‘특별하지 않아도 좋으니 평범하게’ 속에는 아이가 유별나지 않길
바라는 역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학교, 받아야 할 연봉, 살아야 할 동네와 아파트가 있다.
상급지, 대장 아파트란 표현은 그 방증이다.
입시, 취업, 결혼, 자가 마련처럼 단계별 과업도 존재한다.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 정서 속에는 ‘남들 보기에’란 행간이 있고, 이것이 곧 평범의 기준이 된다.
베트남의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높다는 말에 놀랐는데, 눈에 띈 항목에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공무원 열풍, 의대 광풍, ‘의치한약수’에 가기 위한 직장인의
사표 행렬을 보며 이 땅에서 직업 선택의 자유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평범함이 본래의 말값을 찾으려면 어떤 전환이 필요할까. 이때 안 들리면 보청기를 쓰고, 안 보이면 안경을 바꾸는 노년의 지혜가 유용하다.
대충 살자는 말이 아니다.
‘그럭저럭’의 정신으로 나에게 좀 너그러워지자는 뜻이다.
남들이 말하는 꽃길만 답이 아니다.
비가 내리면 나무가 자라고, 어둠 속에서 별이 보인다는 걸 깨달아야 남과 조금 다른 길, 느린 속도를 견딜 수 있다.
아이들의 정신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SNS의 과도한 사용과 1980년대생 부모들의 과보호를 원인으로 진단한 분석 기사였다.
자꾸 수학 문제를 틀리는 아이를 다그치는 카페 안 엄마가 안타까운 건 결국 엄마가 우는 걸 봤기 때문이다.
내가 본 희망은 그런 엄마를 위로하는 아이의 걱정 어린 얼굴이다.
진심으로 묻고 싶다.
평범과 보통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몇 년 걸리는 신약 급여,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급여 통과 2년이면 짧다고 기뻐하게 된 우리들… 환자에겐 시간이 없다
"회사에서 급여 신청 후 2년이라는 빠른 시간 내트로델비라고
하는 혁신 치료제를 국내에 도입할 수 있었다고 기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2년이나 걸린 것이다.
글로벌 학회에서 기존 치료제 대비 생존기간 혜택을 입증해 해외에서는 이미 사용되고 있는 약제를, 우리는 사용하기까지 수년이 걸린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11일 '트로델비(성분 사시투주맙 고비테칸)'가 전이성 삼중음성유방암 3차 이상 치료제로 급여 적용 받게된 것을기념하는 기자 간담회가 개최됐다.
행사에 소개된 어느 내용보다 발표 연자로 나선 손주혁 연세암병원 종양내과 교수의 시작 멘트는 강렬했다.
뒤이어 삼중음성유방암 환자 단체 '우리두리구슬하나'박지연 대표가 "효과적인 약제가 존재함에도 급여 등재를 기다리다가 끝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환자도 존재한다.
회원들은 '치료도 힘들지만 돈 때문에 좋은 약을 쓰지 못하는 게 더 힘들다'고 표현하기도 한다"고 말하면서 손교수의 말에 무게가 더 실렸다.
트로델비는 2020년 유럽종양학회에서 3상 임상 ASCENT 연구의 첫 중간 결과에서 기존 표준요법인 의사가 선택한 항암화학요법(TPC) 대비 사망
위험을 52%, 질병 진행 또는 사망 위험을 57% 낮추는 등 새로운 삼중음성유방암 치료 옵션으로 떠올랐다.
이 경향은 최종 분석까지 이어졌다.
뇌 전이 환자를 포함한 트로델비 치료군의 전체생존기간(OS) 중앙값은 11.8개월로 대조군 6.9개월 대비
약 2배 연장을 보였으며, PFS 중앙값에서 또한 5.6개월 대 1.7개월로 3배에 가까운 개선을 보였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트로델비는 급여 신청 3개월 만에 중증(암)질환심의위원회를 통과했다.
이후 한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2년 만인 지난
2월 약제급여평가위원회를 통과하고, 6월부터 급여 적용됐다.
이는 트로델비가 점증적 비용 효과비(ICER) 임계값을 탄력 적용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트로델비는 기존 항암제의 ICER 임계값을 상회하는
ICER 값을 가진 고비용 약제였기 때문에, 탄력 적용이 없었다면 급여 등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현재 정부는 혁신성을 인정받은 일부 신약에 한해 ICER 임계값을 탄력 적용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엔허투(HER2 양성 유방암 2차 치료,
위암 3차 치료) △캄지오스(증상성 폐색성 비대성 심근병증) △빈다맥스(트랜스티레틴 아밀로이드 심근병증) △오페브(섬유성 간질성 폐질환)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다행히도 탄력적 ICER 임계값을 적용받아 급여 등재에 성공했지만, 그렇지 못한 약제들이 더욱 많다.
과학 기술은 점점 빠르게 발전하고,
기존 표준요법을 빠르게 대체해 나가고 있음에도, 신약(또는 신규 요법)의 비용-효과성을 입증하기 위한 급여 심사 속도는 여전히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보험 재정은 영리하고, 알뜰히 사용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생존율을 2배 혹은 그 이상 개선해 치료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약제가 있음에도 비용 문제로 기존 치료제를 사용해야 하는 현실이 과연 국민의 건강을 수호해야 할 보험당국이 바란 그림인지는 의구심이 든다.
최근 약가 제도의 개편을 두고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 중에는 탄력적 ICER 임계값 부여 대상 확대, 부분 급여, 약제별
환자 본인 부담률 차등화 등 빠른 급여 등재와 보험 재정 절약을 위한 안건들이 다양하다.
물론 이 중에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업계와 보험당국이 '환자'를 중심에 놓고 제일효율적으로 보험 재정을 절약하면서
빠른 치료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