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믿을 수밖에 없다

성공의 제물로 전락한
정직이라는 낡은 가치
번번이 배신당하지만
포기해선 안 되는 가치

세계 최고 명문 하버드대에서 ‘정직성’(honesty)을 연구하던 스타 교수가 데이터 조작 등의 부정 행위 혐의로 지난달 면직 처분을 당했다.
하버드가 소속 교수의 테뉴어를 취소한 건 학문의 자유를 위해 정년 보장 등의 원칙을 공식화한 1940년 이래 처음.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뜻이다.
논란의 주인공 프란체스카 지노는 인간의 정직함을 좌우하는 조건에 대한 여러 실험으로 명성을 얻어왔다.
이를테면 계약서상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서명란이 맨 앞 혹은 맨 뒤에 위치할 때 달라지는 거짓말의 확률 같은 것이다.

정직함이라니, 이런 세상물정 어두운 얘기를 꺼낼 때마다 처참한 기분이 된다.
하버드 교수씩이나 되는, 그것도 주구장창 정직함을 연구하고 가르쳐 온 양반도 이럴진대, 정직에 대해 논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더 있겠는가? 교육의 방향은 계속 난감해지고 있다.
정직은 정직(停職) 상태다.
그리고 이런 연구에 대한 내 개인적 의견은 ‘거짓말할 놈은 서명란이 앞에 있든 뒤에 있든 결국엔 한다’는 쪽이다.

“정직은 정말이지 고독한 단어”라고 가수 빌리 조엘은 노래했다.
정직성에 대한 이 곡(‘Honesty’)은 1978년 세상에 나왔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하야하고 지미 카터 대통령이 취임한 이듬해다.
세태 비판이자 정치적 경고로도 곧잘 해석되는 이유다.
“예쁜 얼굴을 지닌 사람의 예쁜 거짓말을 원치 않아요.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믿을 수 있는 누군가죠.”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팝송으로 자주 꼽히는 연유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정직을 신용으로 바꿔 부르면 경제 용어가 된다.
확신에 찬 공약이어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심은 스텔스 인플레이션(Stealth Inflation), 즉 보이지 않는 비용으로 전가되고 있다.
불확실성의 위험 부담 때문이다.
윤리의 경량화가 ‘뉴 노멀’이 돼 갈수록 계약서는 두꺼워지고, 더 비싼 담보가 요구된다.
문제는 교언영색도 진화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형사 공판 사건 33만7536건 중 압도적 1위가 사기·공갈죄였다.

서로 속고 속인다.
믿기 어렵지만 1인당 하루 200번 정도 거짓말을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저잣거리에서는 그럴 수 있다.
배운 사람이라면, 고관대작이라면 그래도 달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법을 가르치던 전 법무부 장관은 지금 교도소에 있다.
가훈이 정직이라고 밝혔던 기업가 출신 대통령도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은 “거짓말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은 다르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야말로 하버드에서 철학적으로 깊이 연구해볼 만한 문제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고 말했을 때는 1796년이었다.
세상은 변했다.
정직하다고 사랑받는 시대는 진즉에 갔다.
“그럴듯한 말하는 그럴듯한 얼굴. 그 누구를 믿어야 하나.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혼탁한 이 세상에서….” 요절한 전위예술가 박이소는 노래 ‘정직성’을 발표한 적이 있다.
빌리 조엘의 ‘Honesty’를 한국말로 번안한 것이다.
미국 유학 당시 사흘간 굶은 상태로 무쇠 밥솥을 끌고 다니며 정직하게 먹고살기의 퍼포먼스를 벌이던 그의 목소리, 공염불로 끝나지는 않았다.
훗날 이 노래를 듣고 감화된 한 후배 화가(정혜정)가 자신의 필명을 ‘정직성’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계속 믿을 수밖에. 정직하라고 가르칠 수밖에. 숱하게 배신당하고 매번 패배하는 심정이어도, 거짓을 신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

요즘 눈에 띄는 미남 미녀 연예인이 참 많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우리 곁에 남아 따뜻한 웃음과 눈물을 안겨줄 얼굴이 누구일까 생각하면 전혀 다른 얼굴이 떠오른다.
찰나의 반짝임보다 긴 시간 우리 곁을 지켜온 얼굴들. 이순재, 신구, 김영옥, 나문희, 윤여정 같은 배우 말이다.

그들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소위 ‘만찢남녀’나 전형적 미남 미녀 계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어쩌면 그들의 시작은 눈에 확 띄는 화려함보다는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평범한 풍경에 가까웠을지 모르겠다.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듯한 얼굴 주름과 자연스러움. 그것은 폭발적인 스타성과는 다른 차원의 ‘아우라’로, 보통 재능을 가진 이가 끝없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서서히 구축해 나가는 성장 서사에 가깝다.

젊은 날 우리는 종종 조급해진다.
빨리 인정받고 남들보다 반짝이고 싶어서 그런다.
‘나는 왜 저들처럼 특별하지 않을까’ ‘언제쯤 내게도 화려한 순간이 올까’ 하는 초조함에 밤잠을 설친다.
그러나 이 거장들의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삶이라는 긴 무대에서 중요한 건 어쩌면 폭죽처럼 터지는 화려함이 아니라, 은은하지만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꾸준한 노력과 체력이라는 지혜 말이다.
젊은 날의 불안과 방황을 지나온 노년이 건네는 삶의 경륜은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이 있다.
청춘이 이들의 삶에서 배워야 할 건 그 과정의 가치다.
꽃의 화려함은 눈부시게 짧고, 봄의 꽃만큼 늦가을의 단풍도 깊고 아름답다.

뮤지컬을 좋아하지만 요 몇 년 일부러 연극을 많이 봤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이들의 공연이 유독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건강 문제로 연극을 전면 취소한 이순재 배우의 무대는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나는 그의 무대를 ‘다시’ 기다린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말을 이 아름다운 노배우에게 남긴다.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다.

보통의 기준

오래전, 유학 가기 싫다는 딸과 통화하는 선배를 본 적이 있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를 외치던 딸에게 “평범하게 살라고 유학 보내는 거야.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기가 쉬운 줄 알아?”라고 답하던 선배의 말이 여전히 기억난다.
아이가 어떻게 자라길 바라냐는 질문에 부모들의 가장 흔한 답은 뭔가 특별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함정이 있다.
‘특별하지 않아도 좋으니 평범하게’ 속에는 아이가 유별나지 않길 바라는 역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학교, 받아야 할 연봉, 살아야 할 동네와 아파트가 있다.
상급지, 대장 아파트란 표현은 그 방증이다.
입시, 취업, 결혼, 자가 마련처럼 단계별 과업도 존재한다.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 정서 속에는 ‘남들 보기에’란 행간이 있고, 이것이 곧 평범의 기준이 된다.

베트남의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높다는 말에 놀랐는데, 눈에 띈 항목에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공무원 열풍, 의대 광풍, ‘의치한약수’에 가기 위한 직장인의 사표 행렬을 보며 이 땅에서 직업 선택의 자유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평범함이 본래의 말값을 찾으려면 어떤 전환이 필요할까. 이때 안 들리면 보청기를 쓰고, 안 보이면 안경을 바꾸는 노년의 지혜가 유용하다.
대충 살자는 말이 아니다.
‘그럭저럭’의 정신으로 나에게 좀 너그러워지자는 뜻이다.
남들이 말하는 꽃길만 답이 아니다.
비가 내리면 나무가 자라고, 어둠 속에서 별이 보인다는 걸 깨달아야 남과 조금 다른 길, 느린 속도를 견딜 수 있다.

아이들의 정신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SNS의 과도한 사용과 1980년대생 부모들의 과보호를 원인으로 진단한 분석 기사였다.
자꾸 수학 문제를 틀리는 아이를 다그치는 카페 안 엄마가 안타까운 건 결국 엄마가 우는 걸 봤기 때문이다.
내가 본 희망은 그런 엄마를 위로하는 아이의 걱정 어린 얼굴이다.
진심으로 묻고 싶다.
평범과 보통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효율성에 대하여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처음 로봇 청소기를 샀을 때, 청소 걱정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외출 전 작동시키면 충전까지 알아서 하니 시간 효율의 혁신 같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점점 청소기를 손수 돌리는 시간이 늘었다.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먼지를 빨아들이고 깨끗해지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해야 시원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의 취미는 설거지인데, 더러운 그릇을 닦을 때마다 업무로 복잡했던 어수선한 마음이 말끔해지기 때문이란다.
그가 설거지를 움직이는 명상이라고 부른 이유다.

내가 편리한 건조기 대신 햇볕에 빨래를 말리는 이유도 비슷한데, 싱싱한 채소를 수확하는 농부처럼 바삭바삭해진 빨래를 걷어 코끝에 갖다 대면 느껴지는 햇볕이 큰 행복감을 주기 때문이다.
영양제로 섭취하지 않아도 되는 세로토닌 부스터처럼 말이다.

효율성은 우리 시대의 종교에 가깝다.
그러나 온갖 첨단 도구를 써도 여전히 시간에 쫓기는 건 시간을 단축하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스마트폰이나 온갖 플랫폼의 알고리즘처럼 ‘시간을 빼앗는 기술’이 더 빠르게 늘기 때문이다.
이제 고객의 체류 시간이 데이터고, 데이터가 돈인 세상이다.
비서와 운전기사를 두고도 승진할수록 시간이 부족해지는 것도 비슷하다.
승진이 빨라질수록 일은 산술급수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효율적 삶의 가장 큰 부작용은 현재를 미래의 목표를 위한 단계로만 인식하는 것이다.
사립초, 국제중, 특목고 진학이 명문대를 위한 것으로 압축되고, 명문대 입학이 취업을 위한 과정으로 의미가 한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시절에 누려야 할 다양한 감정과 경험이 오직 입시와 취업이라는 목표로 귀결된다면 삶은 어떻게 변할까. 오직 한 가지 식물만 있는 정원처럼 얇고 빈약해질 것이다.

인생은 킬러 문항투성이다.
그러나 입시처럼 효율적인 일타 강사는 우리 삶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관성적 효율이 아닌, 내 보폭과 속도를 아는 것,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사는 방법이다.
풍경의 각별함은 각자의 속도가 만든다.


관점에 대하여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갑자기 날씨가 변해서 비를 맞게 되는 경우가 있다.
비를 피해 카페의 2층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았다.
문득 산속 홀로 서 있는 웅장한 소나무를 볼 때, 화가와 목수의 시선이 다르다는 스님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림의 소재인 멋진 노송을 무참히 베는 목수가 화가의 눈에는 ‘악’이지만, 목수에겐 튼튼한 집의 기둥이 되는 것이 ‘선’이니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관점의 차이로 가까웠던 사이가 소원해지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정치·경제·젠더·세대·환경 등 다양한 이유로 관점이 달라 심지어 서로를 증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익명성 뒤에 숨는 온라인과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SNS와 유튜브에서는 동종 교배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동종 교배가 위험한 건 필연적으로 열성 인자를 만들기 때문이다.
열성 인자가 지속되면 결국 그 종은 멸종에 이른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은 대가는 크다.
무엇보다 관점이 다르다는 게 곧 틀림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태평양도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동해이지만, 미국인의 관점에선 서해이다.
같은 바다를 두고도 보는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부르지만, 바다의 본질은 결국 바다인 것이다.

이해를 뜻하는 영어의 Understand는 Under와 Stand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낮은 위치에 서 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신이 늘 우월하다는 자만심으로는 서로 갈등만 증폭되고 오해만 축적될 뿐이다.
머릿속의 오해가 가슴속의 이해로 가는 길은 이처럼 멀다.

우리는 화가인가, 목수인가. 삶의 현자는 아름다운 그림과 튼튼한 집 모두를 보는 사람일 것이다.
한 시간을 오도 가도 못한 채 카페에 갇혀 비를 보는 일은 분명 효율적 관점에서 낭비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떠도는 생각을 붙잡아 원고 쓸 아이디어를 얻었으니 내겐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똥은 방에 있으면 오물이지만, 밭에 있으면 훌륭한 거름이다.
인식의 틀부터 만들어 나를 가둬 두지 말자.

내가 좋아하는 것

사람들이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져보지 못한, 받아보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한 회한이다.
여기에 후회보다 무거운 ‘회한’이란 말을 쓰는 건 해본 것보다 해보지 못한 것을 오래 기억하는 우리의 심리 구조 때문이다.

심리학에는 ‘재양육’이라는 말이 있다.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를 불러내 다시 양육하는 것인데,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스스로 채우는 것이다.
중요한 건 거짓된 반응 없이, 솔직하게 받고 싶었던 사랑을 어른이 된 지금, ‘내가 나에게 주는 것’이다.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진심 어린 사과, 성적이나 성취에 상관없는 지지와 자유, 부족하고 모자란 나로도 사랑받고 있다는 굳건한 믿음 같은 것 말이다.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기에 우리 중 누구도 100%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다.
자식도 자식이 처음이듯 인생은 편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우리를 채울 사람은 그러므로 결국 나 자신뿐이다.
그러니 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때, 등대 같은 삶의 주문 하나는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안전지대라 부른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10년 된 반려견이나 30년 지기 친구일 수 있고, 옛 동네 놀이터의 벤치나 자물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일 수도 있다.

우울할 때, ‘My favorite things’를 부른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수녀가 천둥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불러주던 노래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장미 꽃잎과 크림색 조랑말, 바삭한 사과 과자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열해 개사해 부른다.
따뜻한 밀크 티와 오트밀 쿠키, 모닥불 타는 냄새와 4월의 벚꽃 비, “내일은 아직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요?”같은 빨간 머리 앤이 한 말들을 적는다.

우리가 좋아했던 것을 애써 기억하고 기록하는 건 깊은 개울 위에 돌덩이를 내려놓는 것과 같다.
폭우가 쏟아져 물살이 거세졌을 때, 미리 내려놓은 그 돌덩이 하나하나가 어둠 속 반딧불이처럼 길이 되어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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