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그늘에 갇힌 존재


심강우 시인·소설가

심강우 시인·소설가

카메라와 인간의 눈은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카메라의 노출로 통칭되는 조리개, 셔터 스피드, ISO 감도 이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뤄야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듯이 인간의 눈 또한 동공, 수정체, 망막이 잘 어우러져야 사물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눈은 카메라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가졌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마음의 작용입니다.
싫어하는 대상과 좋아하는 대상을 볼 때 우리의 눈 모양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게슴츠레 본다.
째려본다, 눈이 화등만해졌다, 젖은 눈으로 바라본다 등등 눈과 관련된 묘사는 결국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란 말은 그런 점에서 적실합니다.
글쓰기 역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상을 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선택의 최종 결정권자는 마음입니다.
제 마음은 대부분 그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유의할 점은 그늘은 고착화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빛과 그늘은 서로에게 빚지고 삽니다.
그늘이 있어 빛은 도드라지고 빛이 있어 그늘은 웅숭깊습니다.
가령 우리는 고독한 시간을 걸으며 빛에 데였던 상처를 씻어냅니다.
상처가 아문 자리는 빛의 채도를 회복합니다.
그늘이 깊어 얼었던 마음자리에 빛이 깃들고 마침내는 서서히 온기를 넓혀 말랐던 물기를 회복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늘은 처음부터 그늘이 아닙니다.
갈변했거나 쪼그라든 잎사귀 또한 빛의 구간을 지나왔습니다.
누군들 빛과 그늘이 없겠습니까. 그늘이나 빛 둘 중 하나만이 온전한 것으로 간주되는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돌아보면 그동안 연재한 칼럼 또한 대부분 그늘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
그늘의 풍경을 찍는 마음 조리개엔 '선의(善意)'라는 센서가 달려 있습니다.
저 기능이 없는 분들에게 이참에 과감히 장착할 것을 권합니다.
있긴 한데 오래전에 고장이 났거나 되다가 안 되다가 하는 수준이라면 만사 제쳐두고 우선적으로 손볼 것을 당부합니다.
세상이 천국과 같다면 저런 센서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힘든 세상을 헤쳐가기 위해 각기 특유의 방편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완벽한 건 없습니다.
자신의 것이 완벽한 방편이라 자신하는 분은 그것이 다른 수많은 방편의 '이바지'로 기능한다는 걸 아직 모르시는 것입니다.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합니다.
한 점 그늘도 없을 것 같은 풍경입니다.
그러나 눈에 묻힌 그 아래가 또한 그늘입니다.
누군가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눈부신 빛과 그 빛의 그늘에 갇힌 존재를 생각해 봅니다.
빛과 그늘의 공유면적은 일치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암흑 속의 이란, 꺼지지 않는 저항의 불빛들[다시! 리영희]

[다시! 리영희] 2026년 이란 시위의 배경과 전망

2026년 이란 시위를 촉발한 직접적 원인은 초인플레이션과 리알화 가치의 파멸적인 하락이다.
2024년 가을, 테헤란의 혼잡한 거리에서 만난 한 택시 기사는 "리알화 가치가 아프가니스탄 돈보다도 못하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때 100달러를 환전했을 때 손에 쥐기 힘들 정도의 돈뭉치를 받아야 했던 비현실적인 광경은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국민과 맺은 최소한의 사회적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금 그 예감은 참혹한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2025년 한 해 동안 식료품 물가는 72% 이상 급등했으며, 평범한 시민이 테헤란에서 소형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 100년을 저축해야 한다는 절망적인 통계가 제시되었다.
현재 이란인들에게 리알화 폭락과 무서울 정도로 인상되는 물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존하는 것'으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물질적 박탈감은 정권 실세들이 연루된 아얀데 은행의 부실 대출 스캔들과 결합하며 국가가 보호자가 아닌 착취자로 전락했다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이번 시위는 단순한 생계형 저항이 아니다.
이는 1999년의 학생운동, 2009년 녹색운동, 2019년 경제난 시위, 2022년 '여성, 생명, 자유' 운동의 파편들이 하나의 거대한 저항 서사로 수렴한 결과였다.
특히 2022년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여성, 생명, 자유' 운동은 이란 Z세대에게 혁명을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존적 정의의 문제로 각인시켰다.
아세프 바야트(Asef Bayat)가 개념화한 '사회적 비운동(Social Non-movements)'처럼, 평범한 이들이 일상 속에서 권리를 주장하던 행위가 이제 거리라는 광장을 통해 연대로 폭발하고 있다.
시위 초기 더 나은 삶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유모차에 어린 자녀를 태우고 나온 주부부터 학생과 상인 그리고 혁명 이전의 역사를 기억하는 중장년층까지 거리를 채웠다.
그러나 정부군의 잔혹한 진압 속에서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는 곧 거대한 묘지가 되었다.
이슬람공화국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역설적 질문이 남는다.
이처럼 끔찍한 인권 탄압과 대규모 희생 속에서도 이슬람공화국은 어떻게 건재할 수 있는가? 이 독특한 체제 지의 비밀은 정권의 억압 기구인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와 바시지 민병대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정규군 아르테쉬(Artesh)와 구별되는 평행 군사 기구
1)
로서, 정권 보호와 혁명 이념 수호라는 명목 하에 국가와 긴밀한 '상호 자원 의존(Mutual Resource Dependence)' 관계를 구축해 왔다.
국가는 IRGC에 법적 권한과 경제적 이권을 부여하고, IRGC는 그 대가로 정권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물리적 강제력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이란의 이슬람정권이 무너지려면 IRGC가 새로운 지도부에 편입되어야 하지만, IRGC 자체가 기득권이자 정권의 핵심이기에 이슬람공화국은 견고히 버틸 수 있는 것이다.

▲ 오토바이를 타고 행진 중인 바시지 민병대원들. ⓒ Iran International

▲ 오토바이를 타고 행진 중인 바시지 민병대원들. ⓒ Iran International

바시지는 본래 1979년 혁명 직후 자발적 민병대로 출발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을 거치며 IRGC 산하로 편입되었다.
전쟁 종료 후 바시지는 학교, 공장, 사무실, 모스크 등 이란 사회의 일상 곳곳에 침투하여 평상시 감시와 사회 통제를 담당하는 기구로 변모했다.
특히 2026년 시위 진압에서 두드러진 것은 바시지의 ‘모자이크 방어 전략(the doctrine of mosaic defense)’이었다.
이는 중앙 지휘 체계가 마비되더라도 지역 사령관이 독자적으로 봉기를 진압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분산하고, 바시지 대원을 동네 단위까지 촘촘하게 배치하는 분권형 억압 체계를 의미한다.
이란 전역에 설치된 3000개 이상의 바시지 기지는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내부 소요를 막는 최전선 역할을 수행한다.
바시지의 진압 전술은 잔혹하고 정교하다.
고도로 훈련된 오토바이 기동대를 투입해 초기 시위대를 분산시키고, 주요 건물 옥상에 저격수를 배치해 시위 주동자를 조준 사격하며 공포를 극대화했다.
시위대에 무차별 폭력을 가하며 시민들을 극한의 공포에 빠뜨린다.
이번 시위에서 보안군은 치료 중인 시위대를 체포하기 위해 병원을 습격하고 의료진에게 신원 보고를 강요하는 등 인도주의적 공간조차 억압의 현장으로 전락시켰다.
이는 아쉴 음벰베(Achille Mbembe)가 '시신정치(necropolitics)'라 명명한, 죽음을 통치의 도구로 삼는 권력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망한 시위대의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는 대가로 막대한 금액을 요구하거나 거짓 진술을 강요하는 행위는 죽음마저 권력의 자원으로 전유하는 체제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들이 이토록 잔혹하게 밀어붙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25년 6월 이스라엘과 미국의 군사 공습은 이란의 핵 시설과 군사 기반을 초토화했을 뿐 아니라 IRGC의 핵심 지휘관들도 줄줄이 제거했다.
'저항의 축'이라 불리던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반군 등 역내 대리 세력들도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 과정에서 밖으로는 안보의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안으로는 연이은 대규모 시위가 신정 체제의 정당성 자체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이란 정권에게 이번 시위는 단순한 소요 사태가 아니라 존립을 건 사활적 위기인 것이다.
더욱이 IRGC 엘리트들에게 갈 곳은 없다.
샤 시대의 엘리트들은 서구에서 교육받았고 망명 후 런던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삶을 재건할 수 있었지만, 이슬람공화국의 지도부는 훨씬 더 고립되어 있다.
그들에게 정권의 붕괴는 곧 자신의 종말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 '혁명 수호자들'의 자녀들이다.
정권은 서구를 '대악마'로 규정하며 반미·반서방 이데올로기를 설파하지만, 정작 고위 관료와 IRGC 간부들의 자녀 상당수는 미국, 캐나다, 유럽에서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이란 국민이 당장의 먹거리를 걱정하고 있는 현실에서 지배층의 2세들은 '적국'에서 유학하고 부동산을 사들이며 안전한 탈출구를 확보해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위선이 거리의 분노를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디아스포라들, 사자가 되어 일어났다
정권 엘리트들의 자녀들이 서구의 풍요 속에서 안위를 누릴 때 같은 하늘 아래 타국을 떠돌던 수백만의 이란 디아스포라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응답했다.
사실 이란 디아스포라의 본격적인 정치 참여는 이미 2020년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 사건, 2022년 '여성, 생명, 자유' 운동을 거치며 질적인 변화를 맞이한 상태였다.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 이후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이란인들은 단순한 관찰자에서 벗어나 고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체로 스스로를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2026년 현재 이 초국가적 연대는 정권의 심장을 겨누는 가장 강력한 디지털 전선의 전사가 되어 돌아왔다.
암흑 속에 놓인 고국의 사진들에 분노하며 그들도 거리에 나섰다.
이제 캐나다와 미국의 주요 도시들은 이란 밖의 또 다른 혁명 광장이다.
토론토와 밴쿠버, 로스앤젤레스의 거리에는 연일 수십만 명의 이란인이 모여 "독재자에게 죽음을" 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이들은 백악관과 오타와 의회에 실질적인 외교 정책 변화를 촉구하는 대규모 국민청원을 주도하며,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를 국제적인 테러 단체로 지정하기 위한 전방위적인 로비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정권의 숨통을 죄는 자금줄 압박은 더 이상 정부 간 협상만이 아닌, 거리에서 시작된 풀뿌리 외교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상징적인 저항의 장면들이 쏟아졌다.
캐나다로 망명한 이란 출신의 한 난민 여성이 이슬람공화국의 신성불가침 영역인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초상화에 담뱃불을 붙여 태우는 영상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는 단순한 반항을 넘어 40여 년간 이란 사회를 지배해온 공포의 상징 체계가 완전히 붕괴했음을 선언하는 상징과도 같았다.
공포는 더 이상 통제 기제가 되지 못한다.
금기를 깨뜨리는 디아스포라들의 이러한 용기는 차단된 인터넷 대신 위성방송 등 우회망을 통해 이란 시민들에게 전달되면서 연대의 힘이 되고 있다.

▲ 캐나다로 망명한 이란 출신의 한 여성이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초상화에 담뱃불을 붙이고 있다.<BR> ⓒ사회관계망서비스 X 갈무리

▲ 캐나다로 망명한 이란 출신의 한 여성이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초상화에 담뱃불을 붙이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 X 갈무리

그러나 디아스포라 내부의 결집이 강화될수록 그 정치적 지향점을 둘러싼 복잡한 층위의 쟁점들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현재 연대 운동의 중심에는 샤(Shah) 시대의 부활을 상징하는 레자 팔레비(Reza Pahlavi) 왕세자가 구심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많은 디아스포라가 그를 포스트 이슬람공화국의 대안적 지도자로 호명하고 있지만, 그의 리더십은 민주적 정당성이라는 측면에서 엄중한 검증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특히 시위 현장에서 터져 나오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향한 노골적인 연호는 이란 혁명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양날의 검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2026년의 시위가 이전의 저항들과 무엇이 다른지 냉정하게 짚어보아야 한다.
과거의 시위가 '개혁'을 요구했다면, 지금의 시위는 체제의 '종식'을 전제한다.
정권이 쌓아 올린 공포의 성벽은 이미 균열을 넘어 붕괴 단계에 접어들었다.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고령화와 후계구도를 둘러싼 내부 권력투쟁은 체제의 경직성을 가속화하고 있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정권 내부의 '조용한 이탈'을 부추기고 있다.
정권에 대한 분노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 과연 이란 인민의 진정한 해방을 보장할 수 있는가? 외부 세력에 의한 인위적인 정권 교체는 역사적으로 더 큰 혼란과 폭력의 악순환을 초래했음을 우리는 목격해 왔다.
이스라엘의 폭격과 미국의 개입이라는 시나리오는 결코 자유의 씨앗이 될 수 없다.
또한, 외부 세력에 의한 인위적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는 리비아나 이라크의 사례에서 보듯 더 큰 혼란의 전조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폭격이나 미국의 군사 개입은 독재 정권에게 '외부의 적'이라는 선전 도구를 쥐여줄 뿐 진정한 민주화의 동력이 되기 어렵다.
진정한 변화는 이란 내부의 시민들이 스스로 주권을 회복하는 '자주적 혁명'의 과정에서 나와야 한다.
국제사회는 군사적 개입이라는 손쉬운 유혹 대신 이란 시민들이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디지털 통로를 확보해주고 그들의 목소리가 국제 무대에서 삭제되지 않도록 하는 '연대의 정치'에 집중해야 한다.
2026년 테헤란의 밤은 블랙아웃으로 어둡지만, 스마트폰의 불빛과 꺼지지 않는 저항의 의지는 이미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되고 있다.
이란의 봄은 거리의 피로 쓰여지고 있으며, 그 끝은 정권의 종말이 아닌 인민의 존엄이 회복되는 지점이어야 한다.
암흑 같은 무거운 이란의 일상 앞에서 디아스포라들이 활용하는 테크놀로지는 이러한 정치적 한계를 넘어서는 목격의 힘을 발휘한다.
정권이 인터넷을 차단하고 외신 기자의 출입을 막아 이란을 정보의 요새로 만들자, 해외의 아티스트들과 활동가들은 인공지능(AI) 기술을 무기로 들었다.
이들은 이란 내부에서 전해지는 파편적인 음성 메시지와 텍스트 정보를 바탕으로 현장의 참상을 시각화했다.
AI로 생성된 극사실주의적인 시위 이미지와 영상들은 '보이지 않는 참상'을 '목격되는 역사‘로 치환했다.
테헤란 아자디 광장을 가득 메운 빛의 바다나 보안군의 총구 앞에 선 소녀의 강렬한 눈빛을 담은 AI 작업물들은 실제 사진보다 더 강력한 정서적 파급력을 발휘하며 국제사회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상상이 역사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며.결국 디아스포라들은 이제 이란 내부 소식을 외부로 전하는 수동적인 가교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테크놀로지와 정치적 압박을 무기로 정권의 선전 도구를 무력화하고, 이슬람공화국을 외교적 사면초가로 몰아넣는 '사자(使者)'가 되었다.
내부의 암흑이 짙어질수록 외부의 불빛은 더욱 밝게 타올랐고, 그 빛은 정권이 그토록 가리고 싶어했던 위선과 진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이란 사회,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
현재 이란은 2026년 1월 8일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인터넷 차단으로 인해 유례없는 정보 암흑기에 처해 있다.
이는 단순히 정보의 외부 유출을 막는 검열을 넘어 시민들 사이의 시공간적 연대를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개개인을 고립된 섬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1월 8일과 9일 사이, 이 '디지털 장벽' 뒤에서 수천에서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고는 이번 사태가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가장 참혹한 국가 폭력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지난 연말부터 시작된 시위는 공식 통계조차 허락되지 않은 채 소강상태에 접어든 듯 보이지만, 이는 결코 종결이 아닌 거대한 폭풍 전의 침묵이다.
여전히 대부분의 국민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으며, 극소수의 시민만이 위험천만한 우회망을 통해 내부의 참상을 조각조각 전하고 있다.
그 파편화된 소식들 속에서 들려오는 "세페르, 내 아들 어디 있니?"라는 아버지의 절규는 이제 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자식을 빼앗긴 이란 전체의 비극이 되었다.
소셜미디어를 타고 흐르는 그 짧고 참혹한 영상들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고통은 이란인들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정서적 토대가 되고 있다.
이제 이란 국민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신정 체제가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온 통치의 정당성은 민중의 피와 눈물 앞에서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국가라는 이름의 보호자를 향했던 일말의 기대는 이제 거대한 집단적 이탈로 변모했다.
공포로 통제되던 시대는 저물고, ‘이슬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에 체제의 신성함을 믿는 이는 더 이상 거리에 남아있지 않다.
이번 2026년 1월의 사건은 단순한 시위의 한 국면이 아니라 이슬람공화국이라는 신정 체제가 내부로부터 해체되기 시작하는 결정적 전환점이다.
정권이 총칼과 인터넷 차단이라는 극단적 수단으로 거리의 목소리를 일시적으로 억누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인플레이션으로 파탄난 경제, 생존을 위협하는 수자원 부족 등 체제가 해결 능력을 상실한 구조적 모순은 시간이 갈수록 이란 사회의 기초를 뿌리째 흔들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란 국민이 국가가 쏜 총탄에 쓰러진 무거운 주검들을 직접 목도했다는 사실이다.
피로 쓴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의 체제는 겉보기에 견고한 요새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내부의 공동화(空洞化)는 이미 한계치에 도달했다.
붕괴의 순간은 예고 없이 그리고 실로 갑작스럽게 찾아올 것이다.
결론적으로 2026년 이란 혁명은 마침표를 찍지 못한 현재진행형의 투쟁이다.
이미 대다수 이란인은 현재의 신정 체제가 더 이상 자신들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음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블랙아웃'이라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시위대들이 스마트폰 불빛을 모아 만들어낸 '빛의 바다'는 침묵을 강요하는 권력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향한 근원적 갈망을 결코 끌 수 없음을 웅변하고 있다.
인권을 짓밟는 무자비한 탄압은 국제사회의 이름으로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선 이들의 용기를 '폭동'이라는 낡은 프레임에 가둘 수는 더더욱 없다.
우리는 그들의 저항과 아픔을 잊지 않고 기록하며, 어둠이 걷히고 진정한 빛이 이란 땅에 내릴 때까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의힘 질곡과 한동훈의 벽[오승훈의 시론]


오승훈 논설위원야당의 지도자 기근 현상 심각정당 역할보다 외부 영입 의존정체성 치장과 권력 곁불 쬐기배신자 프레임으로 韓 시험대팬덤 아닌 극복할 서사가 관건리더십 없는 不備 정당 위험성나라를 이끌 만한 인물이 없는 ‘지도자 기근’ 시대다.
승자 독식의 대통령제에서는 지도자가 국가의 수준에 결정적일 수밖에 없는데, 국민 대다수가 공감할 만한 자질과 인성을 갖춘 차기 후보군을 찾기 힘들어서다.
현직 대통령을 둔 더불어민주당 진영은 발끈할 말일 수도 있다.
사법 리스크가 어찌하건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소속 정당에는 권력 프리미엄으로 자천타천 거론되는 이들이 득실하다.
문제는 황량한 들판에 소몰이꾼조차 없어 보이는 보수 진영이다.
정치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진다는 게 정설이다.
정당은 지도자를 배출하는 것이 본연의 역할 중 하나다.
국민의힘 진영은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당 계열은 온갖 이전투구와 이합집산 속에서도 대통령의 계보를 잇는 인물을 내부에서 찾아냈다.
반면, 국민의힘 계열은 독자적인 보수 정치의 서사를 갖지 못한 전직 대통령의 딸, 상대 진영의 수혜를 본 인사까지 영입해 집권했으나 모두 탄핵을 당하는 치욕의 정치사를 기록 중이다.
진영의 정체성과 비전을 갖춘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대중적 인기를 끄는 인물을 이용해 권력의 곁불만 쬐려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른바 ‘스카우트 정치’가 당을 망친 것이다.
세태가 변한 탓일 수는 있다.
국가적 조직 운영에 부합한 인성과 능력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지 못하는 사회적 풍토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로서의 성공과 교육·성장 간에 반드시 큰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8명의 대통령 가운데 고졸(김대중, 노무현), 흑수저 출신(이명박, 이재명)이 절반인 것만 봐도 그러하다.
그보다는 대통령은 단임제, 국회의원은 한 명만 뽑는 소선거구제에서 정당이 정체성과 통합력, 장기적 비전보다 선거 승리 능력을 최우선에 두는 경향이 심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정치 양극화에 따라 상대를 적대시하는 대립 구조가 굳어지면서 단박에 상대를 제압하는 전투형 리더에 대한 대중의 선호가 압도했다.
바야흐로 팬덤 정치가 정치인의 성장 경로를 장악한 것이다.
인성·자질보다는 대중 인기도, 화합이 아닌 전사형의 정치인이 입지를 확장할 수 있었다.
여야에 공통적 현상인 것은 맞다.
그럼에도 민주당 진영에 내부 노선 투쟁이 치열했던 것과 달리 국민의힘 진영은 당선 가능성만 있으면 당 정체성이나 비전은 치장 정도로 취급했다.
비상계엄 선포와 이후 재판 과정에서 보인 전직 대통령의 절망스러운 모습이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게 했다.
장동혁 대표 체제가 보수 진영 주류의 위상이 흔들리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또 다른 질곡은 배신자 프레임이다.
권력의 정점과 각을 세우면 ‘배신’ 딱지를 붙여 내쳤다.
유승민 전 의원, 이준석 의원 등이 그러했다.
그러고 나서 종국에 인물난이 닥칠 때쯤엔 안팎 살필 것 없이 ‘○○○이 인기라더라’ 하며 줄 서서 조아리는 정치 행태가 보수 진영의 패턴으로 굳어졌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용병 정치’ 비판에 일면 수긍하면서도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은 그가 배신자 프레임에 앞장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굴레가 국민의힘 위기의 본질이다.
한동훈 전 대표 앞에 놓인 고르디우스의 매듭이기도 하다.
용병 정치의 파국적 결말인 배신자 프레임이 그를 ‘제명’이라는 시험대로 몰아냈다.
한 전 대표 역시 보수 정통과는 결이 다른 팬덤 정치에 젖어 있는 게 사실이다.
오는 8일 대규모 토크콘서트를 연다.
세 과시를 하고 싶을 것이다.
숙고하는 스타일로 비치진 않는다.
통합적 소양 부족도 여전하다.
그래도 “돌아온다”고 했다.
성장한 인물로 돌아올지, 선거로 돌아올지, 보수 재편 요구가 폭발할 즈음 분당을 불사한 결단의 패를 들고나올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국민의힘의 질곡을 넘어서려면, 시련을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한동훈의 벽’을 스스로 깨지 못하면, 그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보수 정당 극단화를 막아내고 있는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다.
꼭 한동훈이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지도자 배출이 정상 경로로 회귀해야 한다는 차원이다.
‘지도자 불비(不備) 정당’이 초래하는 국가적 손해가 막심하다.

오승훈 논설위원

주소는 사라져도 시장은 남는다

유병돈 기자

불법 촬영물 유통 사이트는 단속과 차단이 반복되는데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논란이 된 AVMOV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특정 사이트 하나가 폐쇄됐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왜 이런 플랫폼은 구조적으로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그 생태계를 떠받치는 힘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대응은 주로 접속 차단에 머물러 왔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불법 촬영물 유통 사이트를 심의해 차단하면 국내 이용자의 접근은 일정 부분 제한된다.
그러나 서버가 해외에 있고 도메인 변경이 쉬운 구조에서 차단은 근본 해법이 되기 어렵다.
우회 접속 방법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새 주소는 메신저를 타고 빠르게 퍼진다.
기술적 차단은 '문을 잠그는 행위'에 가깝지만, 이미 복제된 열쇠가 널리 퍼져 있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이 반복의 중심에는 분명한 경제 구조가 있다.
불법 촬영물 유통 사이트는 단순 저장 공간이 아니라 트래픽을 수익으로 전환하는 플랫폼이다.
자극적인 콘텐츠일수록 체류 시간이 길어지고, 이는 곧 광고 단가로 이어진다.
일부 사이트는 유료 등급을 운영하며 더 많은 영상 접근권을 판매한다.
이들에게 불법 촬영물은 '콘텐츠'가 아니라 '상품'이며, 그 가치는 이용자의 클릭 수로 계산된다.
여기서 소비자의 위치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불법 촬영물 범죄를 말할 때 흔히 촬영자와 유포자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시장을 실질적으로 유지하는 동력은 소비다.
수요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공급은 형태를 바꿔 계속 등장한다.
법원이 단순 소지와 시청까지 처벌 대상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법 촬영물은 촬영 시점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유통과 소비가 이어질 때마다 피해가 반복되는 '지속형 범죄'에 가깝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구조는 더욱 선명해진다.
영상이 한 번 온라인에 올라가는 순간, 삭제는 행정 절차가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전이 된다.
검색 결과와 파일 공유, 재업로드가 이어지면서 피해자는 자신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대응해야 한다.
반면 소비자는 익명성 뒤에 숨어 거의 비용을 치르지 않는다.
이 극심한 불균형이 바로 현재 구조의 가장 잔혹한 지점이다.
수사 현실 역시 이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운영자 추적에는 국제 공조가 필요하고, 서버 압수는 법적·외교적 장벽에 부딪힌다.
경찰청 사이버수사 부서가 사이트를 폐쇄해도 데이터는 이미 여러 경로로 복제돼 퍼져 있다.
결국 한 곳을 끊는 방식만으로는 전체 유통망을 무너뜨리기 어렵다.
이는 불법 시장의 말단 판매자만 단속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해법 역시 단일 축이 아니라 다층적이어야 한다.
기술적 차단과 운영자 수사는 기본 전제다.
여기에 광고 네트워크 차단, 결제 수단 봉쇄 등 수익 흐름을 끊는 접근이 병행돼야 한다.
동시에 소비 행위에 대한 인식 변화와 법 집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시장 축소는 기대하기 어렵다.
'보기만 했을 뿐'이라는 태도를 사회가 용인하는 한, 불법 촬영물은 계속해서 돈이 되는 상품으로 남게 된다.
AVMOV라는 이름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다른 이름이 채우는 한, 우리는 비슷한 기사를 계속 읽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문제를 단순히 기술 차단의 성패로만 볼 것이 아니라, 디지털 공간에서 타인의 신체와 삶을 어떻게 소비해왔는지 돌아보는 계기로 삼지 않는다면, 불법 촬영물 유통 사이트의 재등장은 언제든 반복될 수밖에 없다.

JeoN -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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