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의 배신
오랫동안 하루를 30분 단위로 나눠 썼다.
연재, 강연, 방송 등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내야 했다.
30분 안에 메일 쓰고, 밥 먹고 하는 식이었다.
오래 앉아 쓰는 직업상 생긴 좌골 신경통 탓에 원고도 서서 쓰고, 미팅도 공원을 걸으며 했다.
작가는 예술가의 범주에 들지만 증권가의 김 과장이나 병원 전공의처럼 일하던 그때
‘열심히’가 내 주기도문이었고, 자존감은 성취에 맞춰졌다.
하지만 그날이 왔다.
그날은 어떤 날일까. ‘나=일’이었던 사람에게 ‘열심’이 작동하지 않는 날이다.
그날은 예외 없이 찾아온다.
직업에는 반감기가 있기 때문이다.
운동선수, 과학자, 작가, 의사 등 고숙련 직종의 반감기는 3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사이에 시작된다고 한다.
그것이 50세에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이 죽기 전 20년 넘게 우울했던 이유다.
명성에 비해 이후 성과가 평범했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성취에만 맞추면 그날은 더 파괴적으로 찾아온다.
내 선배의 그날은 뇌혈관이 막히던 날이었다.
문제는 성공한 삶이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과 비슷해진다는 것이다.
성취의 속도에 중독되면 삶에 멈춤 버튼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쓰러질
때까지 달린다.
그렇게 자기 착취를 내면화하면 자기 파멸은 자동 모드로 진행된다.
속도가 강조되면 풍경을 잃고 밀도는 낮아진다.
마라톤 레이스에서도 완주하는 사람은 자기 속도로 뛰는 사람이다.
삶에도 과속과 감속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열심히’에 대한 새 기준이 필요하다.
오래 일하는 것과 일 잘하는 것, 일중독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쉬고 자는 것을 낭비가 아닌 돌봄과 회복 관점으로 봐야 한다.
채우는 대신 비우고, 배우기보다 가르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 말년의 바흐처럼 말이다.
이때 필요한 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적 노력이 아니라 ‘이래도 괜찮아’라는 자기 수용이다.
받아들임은 약해졌을 때라야 보이는 겸손의 지혜다.
훌륭한 노년을 보낸 사람들의 삶이 유독 종교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사과와 용서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여행을 갈 때 먼저 외우는 말이 있다.
‘스미마셍’과 ‘익스큐즈 미’ 같은 단어이다.
내가 그 나라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자라 실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사과할 일이 생기고 사과받을 일도 생긴다.
좋은 사과는 큰일을 작은 일로 만들지만 나쁜 사과는 작은 일도 크게 만든다.
좋은 사과의 예로 보통 3A를 강조한다.
우선 상대의 감정에 동의(Agree)하고, 진심 어린 사과(Apologize) 후 해결책을 제시하는 행동(Action)을 뜻한다.
심리학자 게리 채프먼은 사과에 대해 “우선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미안하다는 말 뒤에 ‘하지만’ 같은 단어를 절대 붙이지
말라”고 충고한다.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 이 학년인 도모꼬가 일 학년인 나한테
/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 도모꼬가 말했다.
/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서 싫어요!
/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 도모꼬 생각만 나면
/ 이가 갈린다.
”동화 작가 권정생의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2’이다.
평생 시골 교회의 종지기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동화를 써서 모은 자산 10억원을 어린이들에게 남긴 선생도 끝내 사과받지 못한 어린 날의 상처는 가슴에 남았다.
사과가 어려운 이들에겐 시인 박준의 글을 전한다.
그는 “아무리 짧은 분량이라도 사과와 용서와 화해의 글이라면 내게는 모두 편지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하며 “편지는 분노나 미움보다 애정과 배려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모두 편지라는 형식이 건네는 특유의 온도 때문이다.
이처럼 사과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
사과 다음에 놓여야 할 말은 용서다.
용서는 진심 어린 사과를 전제하지만, 꼭 사과를 받아야 내가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용서는 상대보다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한 것이다.
설혹 상처가 잊히더라도 흉터는 남기 때문이다.
오해와 이해 사이
설 음식을 몰래 차 트렁크에 잔뜩 실어 보낸 엄마 때문에 속상하다는 후배의 말을 들었다.
쉰 나물과 반찬을 버리다 한탄 섞인 한숨이 난 건, 이 일이 매년 반복됐기 때문이다.
귀한 음식을 아깝게 다 버리게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나 같은 엄마가 어딨냐!”며 주고 싶은 건 꼭 줘야 하는 엄마가 점점 버겁다는
것이다.
이런 갈등은 꽤 흔하다.
관심과 걱정이 틀림없는 이 사랑을 그녀는 왜 부담과 생색으로 느낄까. 어째서 세상 부모들의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는 종종 ‘남들 보기 부끄럽지 않게!’란 말로 오염돼 자식을 옥죌까.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안타깝게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더 그렇다.
내가 필요하다고 믿고 생각하는 사랑을 주느라, 정작 자식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족 상담 프로그램에 나와 “살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절망하는 자식과 “너 하나만을 위한 삶!”이라고 억울해하는 부모 사이의 간격은 그렇게 생긴다.
사랑이 힘든 건 우리의 본질적 결핍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 말투는 아이의 것으로 급격히 퇴행한다.
연인 귀에 “나 예뻐?”를 수시로 묻고, “그냥 너라서 다 예뻐!”란 말에 안도하는 식이다.
중요한 건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일관된 행동과 메시지다.
기억할 건 ‘사랑해’라는 내용보다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말투, 눈빛, 몸짓인 형식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가족은 끝없는 오해와 이해, 그리고 화해로 지탱된다.
팔꿈치를 데었을 때라야 우리는 그것이 거기에 존재했음을 느낀다.
사랑은 온 존재를 데는 것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에 뛸 듯이 기쁘고, 별것 아닌 것에 절망하는 것이다.
뜨거울 때 먹어야 음식은 맛있다.
하지만 뜨거운 것에 입천장을 데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당장 내가 먹이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잠이 더 절실한 아이를 기다려 줄 수 있을 때, 옥죄던 간섭과 부담은 너른 사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