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인의 규칙, 재판관의 절제
로스쿨을 갓 졸업한 젊은 로클럭들은 적법 절차, 평등 보호, 언론의 자유, 투표권 등 헌법상 기본권을 앞다투어 얘기했지만 브레넌 대법관의 정답은 ‘5인의 규칙’이었다.
아무리
헌법상 원칙과 기본권이 중요해도 이를 연방대법원의 구속력 있는 법정의견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과반수인 대법관 5명의 표를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우리 헌법재판소의 맥락에 적용하면 ‘6인의 규칙’이라 할 수 있겠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선고를 기다리며 국민들은 탄핵 결정에 필요한 6표가 확보됐는지 주목했다.
재판관들의 의견이 5 대 3 또는 4 대 4로 갈렸다는 확인할 수 없는 풍문에 불안해하기도 했다.
평의 과정은 참여한 8명의 재판관이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이다.
다른 사건에서도 재판관들의
평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을 것이고 그 공개가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으로 역사적인 탄핵 결정을 선고한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은 퇴임을 하루 앞둔 4월17일 인하대 특강에서 그 역학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흥미로운 발언을 남겼다.
4월9일 취임한 마은혁 재판관에게 당부했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 당부는 “상수가 되지 말고 변수가 돼라”인데, “항상 결론을 정해둔 사람과 협력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라는 이유였다.
헌법재판관들도 ‘6인의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에서도 늘 가장 보수적 의견을 내는 클래런스 토머스,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의 의견은 ‘상수’이기 때문에 거의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변수’에 해당하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의견은 항상 초미의 관심사다.
두 번째인 “주된 가치는 지키고 종된 가치는 버려라”와 마지막 당부인 “주문을 취하고 이유를 버려라”는 일관된 맥락으로 이해됐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은 논리의 일관성을 완성하는 일은 학자들의 영역이고 정치한 논리로 6표까지 확보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써달라는 대로 다 써주되
‘주문에 이 내용은 꼭 넣어달라’는 점을 관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도 비슷한 의견을 밝힌 적이 있다.
미국에서 동성혼인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2015년 오버지펠 판결의 법정의견은 보수 진영의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썼다.
5 대 4로 의견이 갈린 판결에서, 동성혼인 인정이라는 주문을 취했으니 이유는 ‘5인의 규칙’에서 5번째 표를 낸 인물에게 맡겨 이탈을 방지한 것이다.
이 판결에 다른 보수 대법관 4인은 반대의견 4개를 냈지만 진보 대법관 4명은 별개의견을 내지 않았다.
진보 대법관이라면
이런 역사적 사건의 법정의견 집필로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이 당연하고, 결론이 같아도 이유에 동의하지 않으면 별개의견이나 보충의견을 내고 싶을 텐데, 긴즈버그가 이끌었던 진보 대법관들은 그러지 않았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케네디 대법관이 ‘결혼의 신성한 가치’를 강조하며 쓴 법정의견 논리 구성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종류의 사건에는 통일된 의견을 내야 힘이 있다.
나는 여왕이 아니고, 법정의견이 개인적 견해와 유사하다면 굳이 별개의견을 쓰지 않는 절제가 필요하다.
연방대법원이 확립하는
법리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의견보다 명확한 것이 좋다”는 생각을 나중에 밝혔다.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처럼 가장 중요한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법원 법관이라도 그 영향력은 힘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절제와 균형에서 나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사법부는 국가권력 행사에 관해 헌법이 예정한 견제와 균형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정치의 논리가 작동하는 정부와 국회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최후의 보루가 될 수도 있다.
헌법과 법률에 따른 국가권력의 제한된 행사, 견제와 균형이라는
헌법적 가치는 사법부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방식, 최고법원의 직을 맡고 있는 각각의 재판관이 의견을 내는 미시적인 부분에서도 관철되어야 한다.
법관 개인이 고유권한이라고 의견을 난사하며 다른 국가기관을 향해 그리고 국민 앞에서 헌법적 원칙과 법치주의를 얘기할 순 없다.
법관 개인의 소신이 확립된 선례와 법적 안정성에 우선해도 곤란하다.
예컨대 형사사법에서 70년 넘게 구속기간 계산을 일 단위로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1심 법관이 나서 시간 단위 계산이 맞다고 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유정훈 변호사
화마로부터 문화유산을 지키자
올해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29명이 사망하고 건물 2만채가 불타 없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우리나라 곳곳에서 다발적으로 발생한 대형 산불로 30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시설이 소실되거나 파손되는 피해가 났다.
이번 산불로 인한 국가유산 피해 사례는 지난 4월4일 기준 총 35건으로 집계됐다.
그중 국가지정 유산과 시·도지정 유산은 각각 13건,
22건이다.
특히 경북과 경남 등 영남권에서 피해가 컸다.
보물 ‘의성 고운사 연수전’, ‘의성 고운사 가운루’가 이번 화재로 전소했고 보물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은 석불 일부가 파손됐다.
명승 안동 만휴정 원림, 안동 백운정 및 개호송 숲 일원, 청송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 천연기념물 안동 구리 측백나무숲, 영양 답곡리 만지송 등도 피해를 입었다.
2005년 양양 낙산사 전소의 악몽이 또다시 되풀이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많이 분포된 목조 문화유산이 화재에 특히
취약한 만큼 소중한 유산을 잃지 않도록 방재 대응 체계를 다시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비한 법과 제도를 손 보고 방재 대책도 세세히 보완해야 하지만 해당 부처의 관련 인력과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올해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문화유산 안전방재 기술개발연구 예산은 4억원이 채 되지 못하며 그마저 전년 대비 13% 줄어들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사정은 더욱 딱하다.
2008년 숭례문 화재를 계기로 개정된 관련 법은 국가유산청장과 시·도지사가 지정 문화유산에 소방장비를 설치하고 화재 예방을 위한 시책을 수립·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이번 산불 사태에서 보듯이 지자체 차원의 효율적인 방재대책은 찾기 어려웠다.
필자는 기후 위기로부터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지자체도 적극 나서야 한다는 칼럼을 지난해 12월 쓴 바 있는데 이번 산불로 그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지난 4월9일 경기도의회에서는 경기도 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도 차원의 대책 수립을 촉구하는 발언이 나왔다.
도내 수많은 문화유산이 산림 인근에 위치해 있어 재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국가에만 떠넘기지 말고 도 차원의 문화유산 방재정책의
수립과 함께 전문 인력 및 효율적인 복원 시스템 구축도 검토해야 한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의 우(愚)를 범하지 말자. 지역의 문화유산은 지역이 앞장서 지켜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