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by 심형준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γνῶθι σεαυτόν [gnōthi seauton]

이 말은 여전히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소코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것도 제법 알려져 있다.

출처: maincontents.com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앞 기둥'에 새겨진 글귀가 그 출처라고 한다.
그 이상의 출처 찾기는 낯선 문제이긴 하지만, '
Know thyself'(영어 위키)만 보더라도 델포이 신전에 새겨지기 전에 '어떤 발화자'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제법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소크라테스 외에 이 격언의 지은이로 여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까 한다.

본래의 출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을 말한 것으로 여겨진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에는 프리에네의 비아스(Bias of Priene), 스파르타의 킬론(Chilon of Sparta), 린도스의 클레오불로스(Cleoboulos),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케나이의 미손(Myson of Chenae), 미틸레네의 피타코스(Pittacos), 피타고라스(Pythagoras), 아테네의 솔론(Solon), 밀레토스의 탈레스(Thales) 등이 있다.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 탈레스

출처: knowyourmeme.com

격언을 만든 사람을 '칠현자'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한 인물을 지목되기도 한다(탈레스, 킬론, 피타코스, 비아스, 피티아Phythia 등). '칠현자' 버전이 나름 극화되어 잘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 전의 유명한 현자 7명이 모여서 아폴론 신전에 새길 글귀를 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델포이 신전의 유명한 3개의 격언('너 자신을 알라', '과하게 하지 말 것', '보증은 파멸을 가져온다')
을 그들이 정해서 기둥에 새기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 격언의 저자는 이 '칠현자'일 수 있다.

ΓΝΩΘΙ ΣEΑΥΤΟΝ (KNOW THYSELF), ΜΗΔΕΝ ΑΓΑΝ (NOTHING IN EXCESS), and ΕΓΓΥΑ, ΠΑΡΑ ΔΑΤΗ (SURETY BRINGS RUIN). 델포이 신전의 격언은 이 외에도 147개가 더 알려져 있다.
cf.
Delphic maxims.

일곱 현자들

다만 관련 연구자들은 이러한 출처에 대해서 의심스러워한다.
Parke와 Wormell(1956)에 따르면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세 격언의 실제 저자는 불확실한 채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것들은 아마도 유명한 속담일 것이고, 나중에 특정 현자들에게 귀속되곤 했을 것이다.
라고 한다.

H. Parke and D. Wormell, The Delphic Oracle, (Basil Blackwell, 1956), vol. 1, p. 389. (Know thyself 영문 위키 참조).

그런데 '칠현자'를 말한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119,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정치가 겸 작가)와 파우사니아스(Pausanias: 2세기 그리스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가 꼽은 일곱 명은 각각 다르다.

플루타르코스는 밀레토스의 탈레스, 프리에네의 비아스, 미틸레네의 피타코스, 아테네의 솔론, 스파르타의 킬론, 린도스의 클레오불로스, 스키티아의 아나카르시스(Anacharsis)를 꼽았다.

플루타르코스, '7현인의 저녁식사', 『모랄리아』, 한길사, 2021.

파우사니아스는 밀레토스의 탈레스, 프리에네의 비아스, 미틸레네의 피타코스, 린도스의 클레오불로스, 아테네의 솔론, 스파르타의 킬론, 그리고 케나이의 미손(Myson)을 '칠현자'로 꼽았다.

그런데 해당 격언의 지은이로 7현자를 말하는 기록은 신전이 지어지고 수백년이 흐른 뒤에 나왔다.
그러니 그 기록을 '그럴 듯한 상상'의 결과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 격언을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것은 단연 플라톤 때문이다.
유명한 제자를 둔 덕분에 이런 '오귀인'도 일어난 것이다.

플라톤은 Charmides(164D), Protagoras(343B), Phaedrus(229E), Philebus(48C), Laws(II.923A), Alcibiades I (124A, 129A, 132C)에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를 언급하는 대화를 적고 있다(Know thyself).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학자로 유명하다.
이 격언도 그의 '무지에 대한 앎'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을 이야기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 '메타-인지' 판단으로부터 확실한 앎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그의 철학적 사색과 대화의 요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은 주로 철학적이며 성찰적인 '자기 인식'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믿는 진실은 사실일까 아닐까  

TED 강연 중 Your brain hallucinates your conscious reality(당신의 뇌가 당신의 의식적 현실을 환각으로 만들어 낸다)라는 게 있다.

아닐 세스(Anil Seth)라는 신경과학자가 인간의 '현실 인식'이 가진 '시뮬레이션'으로서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강연이다.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Anil Seth의 TED 강연의 한 장면

우리가 환각에 대해 동의할 때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부른다.

신경과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무척 신기했다.
종교라는 '내로남불 체계'가 딱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종교는 거짓이고 우리의 종교는 진리라 여기는 발상이 그렇다.

정치와 미디어(+언론)의 문제는 사실과 거짓의 싸움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다.
'지록위마'의 고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힘 있는 사람들이 '현실'을 결정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한국 사회의 지배계급만 그런 것도 아니다.
국제 질서 상에서 '사실'은 언제나 '전략적 사실'(남을 해롭게 하고 나를 이롭게 하는 서사가 가미된 사실)-강대국의 이익이 고려된 사실이다.

종교학이나 신화학을 배우면서 이런 문제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신화나 종교 같은 것은 내부자의 시선에서는 한 없이 아름다운 세계관이다.
그러나 외부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무엇 하나를 과장해서 진정한 종교/신화는 무엇이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러한 삶을 살지 않는다.
우리는 진리나 사실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걸 이용해서 살아가야 하는 롤 플레이어다.

거짓은 나쁘다,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가 발달해서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린다,고 이야기한다.
사실을 결정하는 일의 허들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손쉽게 가짜 뉴스를 유포하는 사람들을 악마화 한다.
그러나 주로 상대편이다.

그게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 현실이 되는 현상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니 가짜 뉴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확증 편향을 가지고 현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은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은 '말의 정의'가 아니라 '힘의 정의'가 관철되는 세상이다.
물론 힘의 정의는 절대적 정의, 언제 어디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다.
'지연된 정의'가 실현되며 그 마각이 드러나는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정의는 올바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정의를 결정하는 힘은 없었던 것이다.
그 정의는 어느 훗날의 법정에서, 어느 글쟁이의 원고 속에서는 관념적 올바름으로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못하는 먹물에 갇힌 정의일 것이다.

'기레기'가 보통 명사가 된 시대다.
그가 돈을 받았든, 정치적 지향이 그렇든, 몇 조각의 사실과 진영 논리에 의한 프레이밍으로 현실을 왜곡한 정보(그것도 믿음이겠지만)가 '언론'의 기사란 이름으로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자신들 만의 정의관에 입각해서 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하는 행위, 꼭 종교에서의 선교 행위와 비슷하다.
미디어가, 언론이 전한다고 하는 사실은 여기에서 벗어난 순백의 팩트인가?

'현실세계', '동시대'에 진실, 정의, 사실은 믿음에 기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 어렵다.
반면에 '과거'의 그것은 상대적으로 구분이 용이한 측면이 있다.
물론 그 '과거'가 현실을 구성하는 이야기의 중요한 자원일 때는 '힘의 정의'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진실과 사실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무슨 도움이 될까? 적어도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이 과연 절대적 진실인가, 아니면 집단적으로 동의한 환각인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까? 그것이 나은 해법이라면 좋겠지만, 역사상 이러한 태도는 종교인으로 살거나 인생을 자포자기 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었다.

현실적인 의미는 우리가 진실에 대해 유보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일 게다.
내가 확신하는 진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환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말이다.

'열광적 믿음의 진실'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진실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것이며, 완성된 답이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타인의 환각을 조롱하면서 자신의 환각에는 눈먼 오류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의 종교적 의미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것으로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라는 경구는 서양 지성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 이 말은 철학적 자기 성찰과 덕(德)을 향한 탐구의 출발점으로 자리 잡았으며,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선언과 결합하여 지혜의 근본 원리로 각인되었다.

이 철학적 해석은 '자신'을 안다는 것을 내면의 무지(無知)를 자각하고 이성적 탐구를 통해 영혼의 상태를 돌보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심오한 철학적 해석은 후대의 재해석으로 보인다(Know thyself - Wikipedia). 이 경구가 철학자의 강연장이 아닌,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찾아온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신전의 벽에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은 그 본래적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철학적 권고 이전에 신의 명령이었다면, 고대 그리스인이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이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이 명령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신성한 무대 – 델포이의 아폴론 성소

델포이의 경구들이 지닌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말들이 울려 퍼졌던 무대 자체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델포이 성소의 지리적, 신화적, 건축적 환경은 방문객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경구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중심(Omphalos)

델포이 신전 터. 출처: tripsavvy.com

델포이는 단순한 성소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그곳은 세계의 중심, 즉 '옴팔로스(Ομφαλος, 배꼽)'였다.
제우스가 세상의 양 끝에서 날려 보낸 두 독수리가 바로 이곳에서 만났다는 신화는 델포이의 우주론적 중요성을 상징한다.
이러한 믿음은 델포이에 세워진 원뿔형의 '옴팔로스 돌'을 통해 물리적으로 구현되었다.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옴팔로스 원본과 유적지에 놓여진 모조품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Omphalos_of_Delphi)

성소의 역사 또한 그 신성함을 더한다.
본래 이곳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하던 장소였으나, 아폴론이 가이아의 수호자인 거대한 뱀 피톤(Python)을 퇴치하고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는 신화가 있기도 하다.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델포이는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과 더불어 범그리스적(Pan-Hellenic) 종교 및 정치 중심지로 부상했다.
12개 도시국가로 구성된 인보동맹(Amphictyonic League)의 보호 아래 있었으며, 어떤 특정 폴리스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지대로서 전쟁, 식민지 건설, 법 제정 등 중대사를 앞둔 수많은 도시국가와 왕들이 신탁을 구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처럼 세계의 축이자 신화적 권위의 심장부로 여겨졌던 장소에 들어선다는 것은 순례자에게 독특한 심리적 경험을 안겨주었다.
이곳에서 발해지는 명령은 상대적인 조언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의 중심에서 울려 퍼지는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개인적 성찰을 위한 제안이 아니라, 방문객으로 하여금 이 신성한 중심축을 기준으로 자신의 주변적이고 유한한 위치를 깨닫도록 강요하는 우주론적 명령의 무게를 지녔다.

순례자의 길, 겸손을 향한 여정

델포이 신전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여정은 경구의 의미를 체득하게 하는 하나의 거대한 교육 과정이었다.
순례자는 먼저 카스탈리아 샘에서 몸을 씻는 정화 의식을 거쳐야 했다.
이는 세속의 더러움을 씻고 신성한 공간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정화 의식 후, 방문객은 아폴론 신전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오르막길, 즉 '성스러운 길(Sacred Way)'을 따라 올라갔다.
이 길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었다.
길 양편에는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들이 자신들의 부와 군사적 승리를 과시하기 위해 세운 수십 개의 '보물창고(Treasury)'와 봉헌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기념물들은 노골적인 정치적 경쟁의 산물이었다.
입구 근처에는 아테네에 대한 스파르타의 승리를 기념하는 거대한 기념물이 서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가면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자랑하는 아테네의 보물창고가 그 위용을 뽐냈다.
시프노스인들의 화려한 보물창고는 그들의 막대한 부를, 아르고스인들의 기념물은 스파르타에 대항한 동맹을 과시했다.

이처럼 성스러운 길을 걷는 경험은 인간 세계의 권력, 부, 승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경쟁과 갈등을 집약적으로 목격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필멸자들의 야망과 오만(hybris)이 빚어낸 결과물들의 전시장이었다.
이 장엄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 욕망으로 가득 찬 길의 끝에서, 순례자는 마침내 아폴론 신전의 현관(pronaos)에 도달하여 그곳에 새겨진 경구들을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와 '과도하지 않게'라는 경구는 추상적인 도덕률이 아니라, 순례자가 방금 지나쳐 온 인간 드라마에 대한 신의 직접적인 논평처럼 다가왔다.
성스러운 길은 경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심리적, 교육적 프라이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신탁의 대면, 신성한 언어의 위험성

Priestess of Delphi by John Collier, 1891. 출처: worldhistory.org

델포이 신탁의 과정 자체는 신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비대칭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신전 가장 깊숙한 곳, 아디톤(adyton)이라 불리는 출입 금지 구역에서 여사제 피티아(Pythia)가 세발솥 위에 앉아 황홀경 상태에서 신의 말씀을 전했다.
이 신들린 목소리는 종종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운문(hexameter)의 형태로 남성 사제들에 의해 해석되어 전달되었다.

델포이 신탁은 그 모호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이는 신탁의 결함이 아니라 신성한 언어의 본질적 속성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신탁을 올바로 해석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은 전적으로 그것을 구하는 인간에게 있었다.
그리고 이 해석의 실패는 파국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이야기다.
그는 페르시아를 공격해도 좋은지 신탁을 구했고, 강력한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
그는 이를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으로 확신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멸망한 것은 바로 자신의 제국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전 입구에 새겨진 경구들은 신탁을 구하기 전 반드시 숙지해야 할 일종의 '안전 수칙'이자 '해석 지침'으로서 기능했다.

특히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은 신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말씀의 모호함이 아니라 듣는 이의 오만과 자기기만임을 경고하는 핵심적인 해석학적 원리였다.

한 문헌이 지적하듯, 경구들이 필요했던 이유는 신들이 아무리 옳은 신탁을 내려도 인간이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면 오히려 화를 자초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신과 대면하기 전, 먼저 자신의 편견과 욕망, 한계를 직시하라는 요구였다.
그래야만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닌, 신이 실제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새겨진 지혜 – 오만에 맞서는 통일된 체계

델포이 신전 현관에 새겨진 세 가지 핵심 경구,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과도하지 않게(Μηδὲν ἄγαν), 보증을 서면 불행이 닥친다(Ἐγγύα, πάρα δ' ἄτα)는 개별적인 조언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의 오만(hybris)을 제어하고 경건함을 유지하기 위한 통일되고 일관된 윤리 체계를 형성한다.

너 자신을 알라, 필멸의 한계에 대한 근본 명령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에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핵심 의미는 내면 성찰이 아니라 '너의 한계를 알라'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 사회적·우주적 질서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신이 아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mortal)'임을 인지하라는 명령이었다.

고대 문헌들은 이러한 해석을 명확히 뒷받침한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 오케아노스는 신에게 반항하여 벌받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너 자신을 알고 새로운 관습을 익혀라라고 조언하는데, 이는 신들의 새로운 통치자인 제우스의 우월한 힘을 인정하라는 의미다.

크세노폰의 『헬레니카』에서는, 참주정에서 해방된 아테네인들이 패배한 30인 참주들에게 너희 자신을 알라고 말하며 그들이 다른 시민들보다 더 정의롭거나 용감하지 않음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핀다로스의 『피티아 송가』 역시 승리한 경기자에게 끊임없이 필멸자로서의 한계를 상기시키며 제우스가 되려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이는 델포이 정신의 명백한 반영으로 보인다.

이 경구는 그리스적 미덕인 '소프로쉬네(σωφροσύνη)'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소프로쉬네는 건전한 정신, 중용, 자기 절제를 의미하며, 이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에 기반한다.
그 반대 개념이 바로 신들에게 도전하는 오만, 즉 '휘브리스(ὕβρις)'다.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휘브리스를 피하고 소프로쉬네를 실천하라는 명령이었다.

과도하지 않게, 한계의 실천적 적용

과도하지 않게라는 두 번째 경구는 너 자신을 알라에서 논리적으로 파생되는 실천 강령이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자는 모든 일에서 중용을 지키기 마련이다.

이 경구의 적용 범위는 단순히 육체적 욕망을 절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말은 과도한 슬픔과 같은 감정의 폭발, 지나친 야망, 심지어는 과도한 경건함을 경계하는 데 더 자주 사용되었다.

신 앞에서 부를 과시하는 듯한 호화로운 제물 봉헌은 그 자체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휘브리스의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이 원칙은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덕을 과잉과 부족이라는 양극단 사이의 '중용(golden mean)'으로 규정한 윤리학 이론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보증을 서면 불행이 닥친다, 필멸자의 불확실성에 대한 경고

세 경구 중 가장 해석이 분분한 보증을 서면 불행이 닥친다 역시 앞선 두 경구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구는 단순히 금전적 보증의 위험을 넘어, 미래에 대한 확고한 맹세나 단정적인 주장을 경계하는 말로 해석된다.

종교적 맥락에서 확고한 맹세는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오만한 행위다.
미래는 신들의 영역이며, 필멸의 인간은 운명과 우연에 종속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철학사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이 경구를 무엇이든 강한 어조로 자신 있게 단언하는 자에게는 고난이 따른다는 회의주의적 가르침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모호한 신탁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겸손한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더 넓은 윤리적 틀

델포이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147개의 방대한 경구 목록은 이러한 핵심 사상을 더욱 공고히 한다.
필멸자처럼 생각하라(Think as a mortal), 신성한 것을 경외하라, 권위를 두려워하라, 누구도 얕보지 말라, 종교적 침묵을 지켜라와 같은 가르침들은 모두
경건, 겸손, 자기 절제, 그리고 사회적·우주적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일관된 윤리 체계를 구성한다.

'너 자신을 알라'의 종교적 기능

델포이 성소의 맥락과 경구들의 내적 논리를 종합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의 원초적 종교 기능이 명확해진다.
그것은 신을 찾는 인간을 위한 안내서이자, 신성한 언어를 해석하는 열쇠이며, 다른 종교적 사유와 구별되는 델포이 고유의 신앙 모델을 제시한다.

신을 찾는 자를 위한 안내서

아폴론의 압도적인 신성 앞에 서기 전, 방문객은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을 통해 일종의 심리적, 영적 자기-축소(self-diminishment)를 수행해야 했다.
이 명령은 인간과 신 사이의 거대한 힘의 비대칭성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자기계발을 통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현대적 사고와는 정반대로, 신 앞에서 자신의 미미함을 인정하라는 요구이다.

그리스 신화는 휘브리스로 인해 신의 처벌을 받은 인간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폴론에게 음악으로 도전했다가 살가죽이 벗겨진 마르시아스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델포이의 경구들은 이러한 파멸을 막기 위한 예방책과 같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안전한 상호작용의 규칙을 알려주는 자비의 한 형태였다.

신성한 선물인 신탁을 받기 위한 올바른 자세는 겸손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바로 이 자세를 강제한다.
신의 지혜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오만을 비워내라는 명령인 것이다(물론 부수적으로
'신탁의 실패'에 대한 적절한 알리바이를 제공하리라는 건 명약관화하다).

해석학적 열쇠, 크로이소스는 왜 실패했는가

크로이소스의 비극은 이 경구의 해석학적 기능을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사례 연구다.
그의 실패는 지성의 실패가 아니라 자기 인식의 실패였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승리할 운명이라는 오만한 가정을 품고 신탁에 접근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바로 인간 자신의 욕망, 야망, 자부심이 신의 말씀을 왜곡하는 필터로 작용함을 가르친다.
이 경구는 그 필터의 존재를 자각하고 신의 말씀을 해석할 때 그것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라는 지침이다.

결국 델포이 신탁은 단순한 점술 행위가 아니라, 신탁을 구하는 자의 소프로쉬네(자기 절제)를 시험하는 장치였다.
신탁의 모호함은 질문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 같았다.
오만한 사람은 그 모호함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읽어내고, 자신을 아는 겸손한 사람은 신중함과 모든 가능성에 대한 고려로 그 모호함에 접근한다.

따라서 신탁의 결과는 질문자의 자기 인식 및 겸손의 수준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신탁은 단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의 현재 인격을 드러내고 그 인격에 기반한 미래를 실현시키는 메커니즘이었던 것이다.

델포이 모델과 다른 자기 인식 모델과의 비교

델포이적 자기 인식의 종교적 특성은 당대의 다른 사상과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플라톤적 내면 성찰과의 비교

플라톤은 이 경구를 너의 영혼을 알라는 의미로 급진적으로 재해석했다.
플라톤에게 인식의 대상인 '자아'는 내면에 존재하는 불멸의 이성적 영혼이며, 이를 아는 것은 도덕적, 지적 탁월함에 이르는 길이다.
반면, 델포이적 의미는 외면적이고 관계적이다.
즉, 신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

마법 전통과의 비교

『그리스 마법 파피루스(Papyri Graecae Magicae, PGM)』에서도 너 자신을 알라는 구절이 발견되지만, 그 의미는 정반대다.
여기서 이 말은 자신의 개인적 '다이몬(daemon)' 즉 신적 분신을 알아내어 그를 소환하고 통제함으로써 개인적인 힘을 얻으려는 시도를 의미한다(나는 너이고, 너는 나다).

이는 델포이적 관점에서 볼 때 궁극의 휘브리스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을 넘어, 신과의 합일을 통해 그 한계를 지워버리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엘레우시스 밀의(Eleusinian Mysteries)와의 비교

아테네 근교 엘레우시스에서 행해진 밀의 종교는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화를 바탕으로 죽음과 부활의 순환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입문자에게 축복받은 사후 세계를 약속했다.

그 목적은 필멸성의 최종성을 극복하는 데 있었다.
반면, 델포이의 경건함은 필멸성의 한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엘레우시스가 죽음 이후의 희망을 제공했다면, 델포이는 죽음 이전의 올바른 삶을 위한 지침을 제공했다.

영원한 메아리, 델포이 명령의 유산

델포이의 명령 너 자신을 알라는 그 원초적 종교적 의미를 넘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철학적, 종교적 틀에 맞게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그 생명력을 이어왔다.
이 경구의 강력한 핵심 관념은 여러 사상 체계에 흡수되어 변용되었다.

위대한 내면으로의 전환, 플라톤과 철학적 영혼

소크라테스는 이 경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공적이고 종교적인 명령을 사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바꾸었다.

그에게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 상태, 특히 자신의 무지의 정도를 아는 것을 의미했다(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이는 종교적 경구에서 인식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플라톤은 『알키비아데스 1』과 같은 대화편에서 이 개념을 더욱 공고히 한다.
알아야 할 '자아'는 바로 '영혼'이며, 인간은 거울을 보듯 다른 영혼의 신적인 부분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카르미데스』에서는 앎에 대한 앎이 과연 가능한지를 엄밀한 논리로 분석하며, 이 경구를 복잡한 철학적 문제로 심화시켰다.

이로써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의 명령에서 플라톤의 철학적 과제로 완전히 변모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종합, 이교 신전에서 기독교 영혼으로

플라톤적 해석은 플로티누스와 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을 통해 후대에 전승되었다.
그들은 내면으로의 전회를 '일자(the One)'로 상승하는 길로 보았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전통을 기독교 신학의 틀 안으로 능수능란하게 통합했다.
그는 네 자신 밖으로 나가지 말고, 네 자신 안으로 돌아오라. 진리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한다고 선언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영혼이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신의 형상임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영혼의 구조(기억, 지성, 의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소크라테스-플라톤적 내면 탐구는 이제 단순히 덕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신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 되었다.

현대, 경건에서 심리학으로

현대에 이르러 이 경구는 종교적,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거의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제 그것은 심리학과 세속적 성찰하는 삶의 초석이 되었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은 이 경구에 새롭고 어두운 차원을 부여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이제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겨진 광대하고 비합리적인 무의식의 영역을 탐험하라는 의미가 되었다.

한편, 현대 인지 심리학은 '더닝-크루거 효과'(무능할수록 자신의 무능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현상)와 같은 개념을 통해, 자기 인식의 핵심이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아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통찰을 경험적으로 입증한다.

이로써 경구는 우리의 인지적 편향을 인식하고 극복하라는 현대적 요구로 재탄생했다.

앞선 내용과 함께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의 의미 해석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시대 / 사상

핵심 의미 / 해석

주요 주창자 / 문헌

신성(神性)과의 관계

고졸기(기원전 8세기 경부터 기원전 5세기 초)/델포이 (원형)

너의 한계를 알라

/네가 필멸자임을 알라.

7현인 또는 아폴론. 아이스퀼로스, 핀다로스.

필멸자와 신성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인식하는 것이 경건의 기초.

고전기 (소크라테스/플라톤)

너의 영혼을 알라

/너의 믿음을 성찰하라.

소크라테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알키비아데스 1』, 『카르미데스』).

신적인 측면을 지닌 이성적 영혼을 이해하여 덕을 성취하려는 철학적 탐구.

헬레니즘 (마법/PGM)

너의 개인적 다이몬을 알고 통제하라.

그리스 마법 파피루스.

힘을 얻고 운명을 조종하기 위해 자신의 신적 분신과 합일하려는 의식적 시도.

로마 (스토아)

너의 본성을 알아 덕스럽게 살고 운명을 수용하라.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신적으로 질서 잡힌 우주(로고스) 안에서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이해하여 평온을 얻음.

초기 기독교 (아우구스티누스)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너 자신을 알아 신을 알라.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삼위일체론』).

영혼의 삼위일체(기억, 지성, 의지)에 반영된 삼위일체 신을 발견하기 위한 내면적 전회.

현대 (심리학/세속)

너의 성격, 편견, 무의식적 동기를 알라.

프로이트, 융, 현대 심리학, 자기계발.

신적 요소와 무관하게 개인의 성장, 정신 건강, 자아실현을 위한 내성적, 분석적 과정.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의 원초적 의미가 인간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이 경건의 기초라는 종교적 명령이었다.
이는 신성(神性)에 감히 다가서려는 필멸의 존재를 위한 실용적이고 생존에 직결된 지침이었다.

이 경구가 2,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성사에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 심오한 모호성에 있다.
알라와 너 자신이라는 단순한 구조는 각 시대가 '자아'와 '앎'에 대한 자신들의 정의를 그 안에 채워 넣도록 허용했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자아'는 우주적 위계질서 속의 필멸자였고, 플라톤에게는 이성적 영혼이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신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현대인에게 그것은 심리적 구성체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후대의 재해석들이 인류의 사유를 무한히 풍요롭게 만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델포이의 원초적 의미를 복원하는 작업은 우리에게 이 경구가 단순히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초대일 뿐만 아니라, 위를 올려다보고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의 겸손한 위치를 이해하라는 강력한 상기임을 깨닫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전에, 먼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근본적인 진실을 일깨운다.
바로 우리가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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