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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곧 마음이다.
(제미나이 생성 이미지)
이제까지 논의한 ‘터치(touch)’ ‘눈맞춤(eye-contact)’ ‘정서 조율(affect-attunement)’ ‘순서 바꾸기(turn-taking)’는 두 사람 사이의 ‘이항(dyadic)’ 구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상을 가리키고, 그 대상에 대해 두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의사소통은 ‘삼항적(triadic)’ 구조로 질적인 전환이 이뤄집니다.
함께 대상을 바라보는 ‘공동주의(共同注意, joint attention)’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항 구조에서는 ‘나’와 ‘너’의 정서적 교류를 통한 상호주관적 세계의 구성이 핵심이지만, 대상이 개입되는 삼항 구조에서는 감정뿐 아니라 의도와 정보 공유를 통한 상호주관적 세계의 구성으로 확장되는 것이지요. 이 상호주관적 세계의 출발은 시선입니다.
젊은 남녀 여럿이 모여 대화를 하다가 크게 웃을 때, 각자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웃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쳐다보기 때문이지요. 웃음이 터지는 순간의 행동은 의식으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무방비 상태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 순간 인간은 본능적으로 정서적 관계를 확인하고 싶은 대상, 즉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보냅니다.
이 시선은 ‘너와 이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어’라는 무언의 구애 신호로 해석됩니다.
‘시선이 곧 마음’입니다.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시선이 곧 마음’이라는 것을 역이용합니다.
이른바 ‘노 룩 패스(No-look pass)’입니다.
농구나 축구 선수들이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기 위해, 오른쪽을 보면서 패스는 왼쪽으로 합니다.
베테랑 수비수라도 이 속임수에는 꼼짝없이 당합니다.
‘시선이 향하는 곳에 의도가
있다’라는 믿음이 본능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공’보다도 ‘사람의 눈’, 즉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는 오래된 본능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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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논쟁: ‘생득적인가, 후천적인가?’
인간이 어떻게 언어를 습득하는가에 관해 1960년대에 발표된 촘스키의 이론은 넘사벽이었습니다.
언어를 생득적 능력, 즉 개인 내부의 선천적 장치로 설명하는 그의 모델은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적 완결성을 갖췄습니다.
촘스키 이전에는 언어 습득을 모방과 반복, 그리고 훈련의 결과로 봤습니다.
그러나 촘스키는 아이들이 접하는 언어가 너무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아이들이 듣는 말은 문법적으로 전혀 완벽하지도 않고, 문장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촘스키는 ‘자극의 빈곤(poverty of stimulus)’이라고 정의합니다.
언어 입력이 이렇게 형편없는 수준인데도 아이들은 문장을 완벽하게 만들어냅니다.
이는 언어 능력이 이미 뇌 안에 준비돼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를 촘스키는 ‘언어습득장치(Language Acquisition Device, LAD)’라고 불렀습니다.
1959년에 발표된 촘스키의 논문 ‘스키너의 언어행동에 대한 서평’은 언어를 자극-반응의 연쇄로 설명하는 행동주의 접근에 철퇴를 내렸습니다.
이 논문은 ‘언어학의 쿠데타’로 여겨집니다.
촘스키의 천하에 제동을 건 논문이 1975년 발표됐습니다.
제롬 브루너의 ‘소통에서 언어로(From communication to language)’라는 논문입니다.
촘스키나 피아제의 이론에 기초한 연구를 하던 브루너는 1970년대 초반 전혀 다른 입장으로 돌아섭니다.
당시 서구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고츠키의
이론을 접한 후였습니다.
브루너는 언어의 출발점을 개인 내부의 문법 장치가 아니라 아이와 양육자의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의 틀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언어는 뇌 속에서 홀로 발현되는 능력이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이라는 주장입니다.
브루너는 촘스키의 개념에 대립되는 ‘언어습득지원체계(Language Acquisition Support System, LASS)’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브루너는 언어 능력이 개인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적 상호작용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선천적인 능력이라도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선천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브루너에 따르면, 아동의
언어 습득 과정에 촘스키가 이야기하는 문법 규칙의 발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른은 아이에게 문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 관심을 공유합니다.
이 반복적인 상호과정에서 아이는 단어를 외우거나 문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과 의도를 익히는 것입니다.
브루너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생물학적 환원론’에 빠져 있던 발달심리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언어발달 연구는 문법의 습득과 같은 주제를 벗어나 시선, 몸짓, 표정과 같은 상호작용적 요소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공동주의’에 관한 연구는 바로 이 변화의 산물입니다.
언어는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고, 그 시선이 향하는 대상을 함께 바라보며, 서로의 의도를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자리를 잡습니다.
공동주의는 바로 언어가 작동하기 위한 인간 특유의 사회적 인지 구조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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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 보고 싶은 대상을 가리킬 때도 있다.
유인원은 이런 ‘진술적 가리키기’를 하지 못한다.
(제미나이 생성 이미지)
인간만의 ‘가리키기’가 있습니다
인간 의사소통의 결정적 열쇠가 공동주의에 있다는 것을 치밀하게 연구한 학자는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입니다.
독일 라이프치히의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에서 공동 소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며 인간과 유인원 비교 연구를 이끌었던 학자입니다.
브루너와 토마셀로는 직접적인 사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공동연구의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브루너의 상호작용에 관한 통찰이 없었다면 오늘날 각광받는 토마셀로의 의사소통발달, 인지발달에 관한 이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토마셀로는 브루너의 상호작용론을 인용하고, 실험으로 검증하고,
진화적 틀로 재구성했습니다.
특히 유인원과 인간의 의사소통을 직접 비교하며 실증적으로 밝혀낸 토마셀로의 ‘공동주의’ 개념은 브루너의 문제 제기를 완성했다고 평가받습니다.
토마셀로가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98년에 동료들과 함께 발표한 ‘생후 9~15개월 영아의 사회인지, 공동주의, 그리고 의사소통 능력’이란 제목의 논문이었습니다.
이 논문은 생후 9~15개월 영아를 대상으로 한 종단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 공동주의 능력이 언어와 의사소통 발달의 ‘결과’가 아니라
그 ‘전제 조건’임을 보여줍니다.
영아가 타인의 시선을 따라 대상을 함께 바라보고, 가리키기나 보여주기와 같은 공동주의 행동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의사소통 능력과 언어 발달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이 연구는 언어가 문법 습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주의(attention)’와 ‘의도(intention)’를 공유하는 삼항적 구조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입증한 연구로 평가됩니다.
이후 토마셀로는 유인원이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는 이유가 ‘가리키기(pointing)’의 부재라는 것을 밝혀냅니다.
물론 유인원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리키며 요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리키기는 단순히 ‘저것을 달라’고 하는 ‘명령적 가리키기(Imperative Pointing)’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도 처음에는 ‘명령적 가리키기’로 시작하지요. 그러나 9개월경부터 다른 종류의 가리키기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산책길에서 지나가는 강아지를 가리킵니다.
이 행동은 강아지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 저것 좀 봐!’ 하는 것이지요. 이를 토마셀로는 ‘진술적 가리키기(Declarative Pointing)’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기는 엄마의 얼굴과 강아지를 번갈아 봅니다.
‘우리가 지금 같은 것을 보고 있지!’ 하며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는 ‘공동주의’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토마셀로는 ‘진술적 가리키기’와 더불어 또 다른 인간만의 ‘가리키기’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보 제공적 가리키기(Informative Pointing)’입니다.
엄마가 떨어뜨린 펜을 찾으려 할 때, 아이가 손가락을 뻗어 펜의 위치를 알려줍니다.
이것은 아이가 펜을 갖고 싶은 것도(명령), 단순히 같이
보자고 하는 것(진술)도 아닙니다.
엄마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이타적 행동입니다.
바로 타인을 돕기 위한 이타적 행동, 즉 ‘협력적 의사소통’이야말로 인간 언어를 유인원의 신호와 구분 짓는 결정적인 차이라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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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진화생물학적 기원
한발 더 나아가, 토마셀로는 그의 저서 ‘이기적 원숭이와 이타적 인간(Why We Cooperate)’에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남을 돕고자 하는 본성’을 타고난다고 단언합니다.
단지 철학적 믿음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증명합니다.
인간의 이타적 행동은 생후 14~18개월 무렵이면 폭발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시기는 ‘남을 도와야 착한 어린이야’라는 부모의 본격적인 훈련을 받기 전입니다.
돕는다는 행동을 가르치지 않아도 타인의 목표를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도와준다는 주장입니다.
아이가 돕는 행동을 했을 때, 보상을 해주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합니다.
A그룹의 아이들에게는 돕는 행동을 할 때마다 장난감을 주었습니다.
B그룹의 아이들은 남을 도와도 아무 보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상을 없애자, A그룹의 돕는 행동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반면 B그룹의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토마셀로는 이 실험을 근거로 인간은 원래 이타적으로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이타성이 부모의 보상이나 칭찬으로 학습된 것이라면, 보상을 줄 때 더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상이 주어졌을 때, 이타적 행동이 줄어든다는 것은 애초에 아이들이 남을 그저 돕고 싶다는 내재적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겁니다.
이타적 행동이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협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다는 공식이 뇌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지요.
놀랍게도 토마셀로의 주장은 독일 사회철학자 하버마스가 구분하는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연관됩니다.
아기의 ‘이타적 행동’에 관한 매우 미국적인 진화생물학과 의사소통적 행위에 관한 지극히 독일적인 사회 철학이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버마스는 서구의 근대가 폭력적으로
변질되었던 것은 인간 합리성을 ‘도구적 합리성’에만 국한시키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따라서 근대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듯 폐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해 보완해야 할 ‘미완의 프로젝트’라는 것이지요.
평생에 걸쳐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주장하던 하버마스는 자신의 이론을 뒷바침할 경험적 증거가 절실했습니다.
그런데 토마셀로의 ‘진술적 가리키기’와 ‘정보제공적 가리키기’에 관한 연구는 그의 주장을 확인시켜주는 강력한 생물학적 증거가 됐습니다.
2009년 하버마스는 토마셀로가 독일의 ‘헤겔
상(Hegel-Preis)’을 수상하는 자리에 축사 연사로 나서 칸트의 오랜 철학적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토마셀로가 과학적인 해답을 줬다고 극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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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벌써 한 해가 지나 2026년이 코앞이라는 게 믿어지세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달력을 보며 한 해가 쏜살같이 지나갔다는 사실에 놀라고, 2026년이 코앞인데 마치 70년대나 80년대가 엊그제 같은데 느껴진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활절 달걀과 핫 크로스 번을 즐기던 때였는데, 어느새 마이클 부블레와 머라이어 캐리가 연말연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고, 크리스마스트리는 벌써 세워져 있네요. 도대체 2025년은 어디로 간 걸까요?
과학에 따르면 문제는 달력이 아니라 뇌입니다.
'시간 지각'이라는 개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용어 자체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색깔, 소리, 맛과는 달리 시간은 우리가 직접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파장, 주파수, 화학적 신호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시간 입자'라는 것은 아예 없습니다.
대신 우리 뇌는 영리하면서도 다소 혼란스러운 방식을 사용합니다.
즉, 시간을 인지하는 대신 추론하는 것입니다.
뇌가 시간을 인지하는 방식 (엉성하게)
뇌는 시계처럼 똑딱거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추적하여 시간을 가늠합니다.
변화가 많을수록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깜빡이는 이미지가 정지된 이미지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두 이미지가 실제로 나타나는 시간은 정확히 같지만 말입니다.
이는 또한 무섭거나 강렬한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 유명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은 30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그물망으로 뒤로 떨어졌습니다.
그 후, 그들은 자신이 떨어진 시간을 다른 사람이 떨어진 시간을 판단했을 때보다 3분의 1 이상 더 길게 추정했습니다.
아드레날린과 집중력으로 가득 찬 뇌는 수많은 기억을 저장합니다.
나중에 그 사건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가늠하려고 할 때, 뇌는 저장된 모든 세부 정보를 살펴보고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2025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025년 하반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미래 시간(현재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과 회고적 시간(돌이켜볼 때 얼마나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지)을 구분했습니다.
지루할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가고,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치과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끝없이 길게 느껴지는 반면, 스마트폰을 몇 시간 동안 만지작거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즐거울 때는 시간이
빨리 간다"라는 말처럼, 적어도 시계를 신경 쓰지 않을 때는 시간이 빨리 가는 법입니다.
간단한 연습을 해 보세요. 5분 동안 시계를 응시해 보면 매 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지루함은 시간을 느리게 보내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정반대입니다.
평범한 하루하루는 살아가는 동안에는 길게 느껴지지만, 지나고 나면 짧게 느껴집니다.
"하루는 길지만, 한 해는 짧다"라는 말의 논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느낌은 더욱 강해집니다.
어릴 때는 처음 경험하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첫 학교, 첫 직장, 첫 연애, 첫 휴가 등. 이러한 새로운 경험들은 풍부하고 생생한 기억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학교 등하교, 출근, 저녁 식사 등 익숙한 일상이 반복되면서 특별한 기억은 점점 줄어듭니다.
돌이켜보면 뇌는 큰 변화가 없다고 판단하고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았다고 결론짓습니다.
이것이 바로 매년 12월에 겪는 '12월 충격'입니다.
시간을 늦출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가능하지만, 즐겁지는 않을 겁니다.
시간을 느리게 경험하려면 그냥 지루함을 느껴야 합니다.
신호등 앞에서 가만히 서 있거나, 만까지 세거나, 페인트가 마르거나 주전자가 끓는 것을 지켜보세요.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며 시간을 늦추는 것은 어렵지만, 그만큼 보람도 큽니다.
핵심은 기억입니다.
기록해 두세요. 일기를 쓰세요. 사진과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 보세요. 기억을 되살릴수록 더욱 생생하게 남을 것입니다.
더 좋은 방법은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것입니다.
새로움은 기억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뭔가 색다른 것을 시도해 보세요. 탐험을 떠나 보세요. 약간은 엉뚱하지만 잊을 수 없는 일을 해 보세요.
그렇다고 12월이 오는 걸 막지는 못하겠지만, 막상 12월이 되면 마치 한 해가 통째로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몰라요.
역대 최고의 영화 속 산타 9인 순위

에드먼드 그웬(1877-1959)이 크리스 크링글 역, 나탈리 우드(1938-1981)가 수잔 워커 역, 모린 오하라가 도리스 워커 역을 맡은 영화 '34번가의 기적'(조지 시튼 각본 및 감독, 1947년) (사진: 실버 스크린 컬렉션/게티 이미지)
이제 진짜 순록보다 산타를 더 많이 본 나이가 됐어요. 애니메이션 산타, 온화한 산타, 소리 지르는 산타, 철물점 점장처럼 생긴 산타, 그리고 누가 봐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은 산타까지.
하지만 매년 12월이면 그는 다시 나타납니다.
붉은 양복에 수염을 기르고, 우리가 착하게 행동하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약속을 하면서 말이죠.
자, 이제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산타가 앞으로도 계속 우리 화면에 등장한다면, 제대로 순위를 매겨보는 게 어떨까요? 근육이나 흥행 성적 같은 게 아니라, 권위, 따뜻함, 믿음직스러움,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존재감' 같은
걸로 말이죠.
자, 여기 나이가 아닌 연기력을 기준으로 선정한 최고의 스크린 속 산타 9명을 소개합니다.
9. 빌리 밥 손튼 - 배드 산타
이 문제는 미리 해결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빌리 밥 손튼이 연기한 산타는 무례하고, 술에 취해 있고,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며, 산타가 절대 해서는 안 될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가 이 목록에 포함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나쁜 산타>가 성공적인 이유는 손튼이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은 선택 사항이며, 인간의 본성은 매우 실망스럽다는 생각을 온전히 표현해냈기 때문입니다.
그는 12월에 소매업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산타클로스입니다.
집에 초대할 생각은 없지만,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죠.
8. 팀 앨런 - 산타클로스
팀 앨런이 연기한 산타는 신화 속 인물이라기보다는 인사 담당자의 골칫거리 같지만, 그래도 칭찬할 점은 있다.
중년의 적응 장애를 겪는 산타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는 것이다.
양육권 문제로 여전히 고민하는 남자가 어쩌다 산타가
되는 이야기는 묘하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말 그대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그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고, 그 덕분에 자리를 꿰차게 된다.
비록 그의 수염이 때때로 계약상의 이유로 붙여진 것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말이다.
7. 커트 러셀 - 크리스마스 연대기
이 산타는 자신감이 넘치네요. 어쩌면 지나치게 넘치는 것 같기도 해요.
커트 러셀이 연기한 산타는 가죽옷을 입고 블루스 음악을 연주하며 오토바이를 소유할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는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며 분명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는 산타의 임무 중 절반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가 썰매를 이중 주차해 놓고 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6. 톰 행크스 - 폴라 익스프레스
애니메이션인 건 맞습니다.
약간 불안감을 주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톰 행크스가 연기한 산타는 위엄을 풍긴다.
그는 조용하고, 아는 것이 많으며, 세상 물정을 꿰뚫어 본 사람처럼 말한다.
마치 원로 정치가처럼, 호탕하게 웃기보다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것 자체가 강력한 힘이다.
5. 에드먼드 그웬 - 34번가의 기적 (1947)
이것은 산타클로스를 논증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웬의 연기는 온화하고 설득력 있으며 매우 세련되었습니다.
당신은 그가 산타라고 믿는 것을 넘어, 그가 소송에서 이기기를 바랍니다.
그는 산타가 품위, 이성, 그리고 말끔하게 다려진 바지를 상징했던 시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옛날 스타일의 산타, 그리고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4. 데이비드 하버 – 바이올런트 나이트
최근에 추가된 기능이지만, 놀랍도록 효과적입니다.
하버가 연기한 산타는 상처투성이에 전쟁터를 누빈 듯하며, 마지못해 영웅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지치고 인간 세상에 실망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여전히 나타난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산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는 힘들게 우유와 쿠키를 얻어먹는다.
3. 리처드 애튼버러 - 34번가의 기적 (1994)
에드먼드 그웬이 원조라면, 리처드 애튼버러는 그 감정적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뜻하고 너그럽고 조용한 권위를 지닌 애튼버러의 산타는 당신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그는 귀 기울여 듣고,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짓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걱정을 털어놓을 수 있고, 그는 당신의 걱정을 기억해 줄 거라고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산타클로스가 안심시켜주기 위한 거예요.
2. 폴 지아마티 – 프레드 클라우스
과소평가되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훌륭한 작품입니다.
지아마티는 산타에게 문자 그대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무게감을 불어넣습니다.
이 산타는 스프레드시트를 다루고, 의무를 지고, 끝없이 쾌활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과로에 시달리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계속 노력한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영웅적인 일이다.
1. 에드먼드 그웬 (또 다시) – 어떤 산타는 최고니까요
네, 반칙입니다.
하지만 어떤 공연들은 순위를 초월하죠.
그웬의 산타는 여전히 최고의 산타로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결코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을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차분하고 예의 바르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그는 소리치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인데,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훌륭한 산타를 만드는 자질은 무엇일까요?
소음도 아니고, 마술도 아니고, 복근도 절대 아닙니다.
훌륭한 산타는 혼돈 속에서 평온함을, 요란스럽지 않은 관대함을, 그리고 어쩌면 내년에는 사람들이 더 잘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가끔 독한 술 한 잔이나 휴식이 필요하다고 한다면요? 뭐, 우리 모두 그렇지 않나요?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