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다면
철학을 떠나 이를 과학의 관점에서 짚어보자.
삶에는 원래 의미가 없다거나, 삶의 의미란 사람들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말은, 철학적·존재론적 관점에서는 그럴듯하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태어나 여태껏 진화해온 과정을 살펴보면, 수많은 생명체를 그저 유전자 캐리어 정도로 봐도 무방할 만큼 건조하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지금 당장의 삶을 좀 더 적극적으로, 생기 있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 바람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학문적 진실로 이성적인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모두가 하는 고민이 결코 아니다. 우선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세상은 늘 새로운 것들로 가득해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계속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좀 더 과학적인 언어로 설명하자면, 아직 신경계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중이고 몸에 에너지도 그만큼 넘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뇌 속 보상 회로 — 어떤 활동을 시도했을 때 몸이 원하는 즐거움과 쾌감, 안정감, 편안함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회로 — 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어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살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 전혀 고민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타고나기를 이른바 '정서적 금수저'라, 쉽게 즐거움을 느끼고 힘든 일이 있어도 금세 극복하는 신경 회로를 가진 사람들이다. 단순히 뇌세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타고난 건강을 유지하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아무래도 소수일 것이고, 세상 모든 것에 일장일단이 있듯, 그렇게 타고난 기질 뒤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희귀한 유전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오래 살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언젠가는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것 역시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뇌세포에 노화가 일어나고, 현대 사회에서 수명이 늘어나면서 그 부작용으로 다양한 성인병에 걸리며, 몸의 활동량이 적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의 생활이 장기적으로 신경 회로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타고나기를 남들보다 취약한 정신적 문제를 안고 태어난 경우도 있다.
그런 문제들 중 일부는 생활 패턴을 개선하거나 전문 인력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자연적인 노화로 인한 부분은 어쩔 수 없으며, 장기적으로 과학 기술이 더 발전하기를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통제 가능한 부분, 즉 굳이 그런 고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데 잘못된 선택들로 인해 괜히 스스로를 더 깊은 고민 속으로 밀어 넣는 경우는,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보인다. 나 역시 그런 오류에 빠져 시달리다가 회복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가 각자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뇌가 타고난 보상 회로를 계속해서 회복시키고 기름칠하며 유지하는 삶의 방식이다. 더 짧게 말하면 결국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에 이르는데, 투박하게 말해 '생긴 대로 살라'이다. 고대부터 내려온 이 단순한 말들의 과학적·실천적 의미가, 그동안 개인이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쉽게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한때 1994년 MBC 뉴스에서 인터뷰한 한 시민의 발언,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라는 말이 풍자처럼 돌아다닌 적이 있다. 저 인터뷰가 왜 갑자기 회자되었을까? 다소 투박하고 촌스러운 말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모두 무의식 속에서 느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행위에 대해, 왜 남들의 평가 — 특히 기성세대의 불쾌한 평가 — 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반발심이 담긴 반응이기 때문이다.
한때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이런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 사회성을 지녀야 한다, 인생에서는 무엇이 최고다 하는 강박적인 인생 훈계들이, 아무런 비판 없이 사람들을 압박하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것을 이룬, 소위 '꿀 빤 세대'라 불리는 윗세대들이 생각보다 그렇게 행복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기 싫은 것을 꾹 참고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했고, 온갖 종류의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받아도 미래를 위해, 사회에 잘 녹아들기 위해, 직장 생활을 잘하기 위해, 가족 같은 공동체에 잘 어울리기 위해 참는 것이 당연했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을 겪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런 것들이 상처와 트라우마로 남아, 나이가 들어 세속적으로 많은 것을 이룬 후에도 끊임없이 불안을 느낀다. 불안하니 자꾸만 아랫세대에게 앵무새처럼, 자신들이 듣고 자랐던 인생의 훈계들을 반복한다. "라떼는 말이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인생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사회성을 키워야 한다"…….
윗세대뿐 아니라 전 세대를 통틀어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각자 자신을 진심으로 즐겁게 하고 무언가에 몰두하게 만드는, 자기만의 보상 회로가 뇌 속에 있다. 그 보상 회로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설명하는 수많은 심리학 이론이 있어도, 그것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 세상은 계속 변하고, 사람들의 인생은 저마다 다를 뿐 아니라, 타고난 성향 역시 주변 환경과 각자 걸어온 인생과 현재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조정되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이 명확하게 밝혀낸 것은, 기껏해야 사람들의 뇌 속 보상 회로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하며, 그마저도 장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다.
우리 몸과 뇌는 무의식적으로, 직감적으로 각자에게 맞는 답을 잘 찾아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자주 무시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돈이 목표라고 말하면서, 직장은 돈을 위해 다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이 정말로 돈 하나만 보고 하기 싫은 일을 오래 하면 뇌 속 보상 회로가 망가지고, 결국은 그 망가진 회로를 복구하기 위한 비용을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다. 그 비용은 나이 든 후의 우울증 정도일 수도 있지만, 심하면 비정상적인 쾌락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탕진하거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결말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먹고살기 위해', '자식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함정에 빠진 결과일 수도 있다. 특히 가족을 위해, 자식을 위해 자신의 보상 회로를 철저히 망가뜨린 비용을 혼자 치르면 된다는 생각조차 착각일 수 있다.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와 불쾌한 경험은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악영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상 회로가 빠르게 망가지면, 그만큼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과 마주하게 된다. 겉으로는 철학적이고 고상한 질문 같지만, 사실은 그저 생물학적으로 뇌 회로가 망가진 것일 뿐이다. 부상을 입으면 회복에 시간이 필요하듯, 회복을 위해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하듯, 뇌에도 휴식과 제대로 된 보상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뇌를 자신의 팔다리 상처처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결국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것은 물론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마치 무슨 대단한 대의라도 있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훈계처럼 들려줄 필요도 없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것 역시 본인의 선택에 불과하다는 말을 되돌려 주고 싶다. 그렇다고 굶어 죽으라는 말이냐고 되묻는다면, 나는 그 양자택일 자체가 대개 거짓 선택지라고 답하고 싶다. 정말로 그 두 가지밖에 없는 상황은 생각보다 드물다. 참고로 한국은 이미, 아무리 노력해도 멀쩡한 사람이 굶어 죽을 만큼 사회 복지 시스템이 부실한 나라가 아니다. 더군다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 중, 정말로 생활고에 시달려 내일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희망을 잃은 탓이다. 사업이 실패해 큰 빚을 졌더라도, 머릿속 희망 회로가 제대로 돌고 있다면 다시 일어설 힘을 잃지 않는다. 반대로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도 희망을 잃으면 삶을 포기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을 보고 "돈도 많으면서 배가 불렀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뇌의 생물학적 작동 원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장기간 보상 체계가 무너진 인생 패턴 — 보기 싫은 사람을 계속 보고, 노력하고 열심히 일해도 자신을 만족시킬 어떤 즐거움이나 쾌감도 느끼지 못하는 — 을 유지하면,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인생은 원래 의미가 없고, 의미란 인간이 지어내어 자기 삶에 서사를 붙인 결과물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어디까지나 철학 강연회에서 잠깐의 지적 유희로 소비될 내용에 불과하다. 살아 있는 우리는 계속해서 각자의 보상 회로를 늘 최신 상태로 유지하고, 주기적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 '요즘 뭐 재밌는 게 없다',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느낌은 결코 배부른 자의 고민이 아니다. 잠깐은 그럴 수 있지만, 장기간 지속되면 결국 그것은 만성 우울과 불안으로 가는 초입의 신호다. 삶의 의미가 궁금해지고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그것은 단지 자기 자신을 조금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쓸데없는 목표 — 한마디로 남의 욕망을 채우는 일 — 에 노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비 사회는 이런 무기력의 문제, 보상 회로가 망가진 문제를 더 자극적인 소비로 해소하라고 종용한다. 실은 그래야 여가 산업에 돈이 돌고, 관련 업계에 활기가 돌기 때문이다. 다양한 레포츠 산업, 여행업, 더 풍요로운 맛 경험을 주는 요식업, 취미 업계 등등. 그런데 그런 취미들은 무기력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한다. 물론 무엇이든 처음은 재미있기에 잠깐의 보람은 느끼게 해줄 수 있지만, 곧 다시 시들해지고 만다. 진단이 잘못되었으니 처방이 먹힐 리가 없다. 과거 20세기 초 미국에서 폐결핵 환자들에게 아편을 처방한 적이 있는데, 아편 덕분에 통증은 사라졌지만 환자의 몸은 결핵균에 의해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기력하고, 인생에 회한이 느껴지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 철학을 아무리 파도 소용없고, 세계 일주를 해도 피곤할 뿐이며, 음악이든 미술이든 골프든 그 어떤 취미 활동을 해도 잠깐 즐거울 뿐이다. 팔다리나 몸에 상처가 나면, 우선 무조건 활동량을 줄이고 쉬어야 한다. 상처가 났는데도 무거운 것을 들고, 상처 부위에 뜨겁고 거친 것을 대면 상처가 나을 수 없다. 아무리 연고를 발라도 도통 아물지 않는다. 고통을 잊으려 술을 마시고 단것을 먹으면 잠깐은 잊을 수 있어도, 염증 때문에 상처는 더더욱 아물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같은 유전자에서 같은 방식의 생물학적 분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뇌세포는 다르다고 생각할까? 그동안 이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고, 외부에서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히 관찰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 계속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 팔다리의 상처를 긁는 사람을 멀리하듯, 그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계속 스트레스만 주고 아무런 보상도 없는 일이 있다면 — 그것이 직장 일이든 집안일이든, 가족이나 주변 사람을 돌보는 일이든 — 가급적 그 일에서 멀어져야 한다. 이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몸에 난 상처에 계속 사포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치과에서 오랜 시간 감염과 염증에 시달린 치아를 뽑고 나면, 염증 조직을 제거했기 때문에 잇몸이 벌어진다. 그 잇몸을 그대로 두면 자체적인 회복력으로 알아서 잘 아물까? 그럴 수도 있지만, 환자가 자신도 모르게 음식을 먹다가 그 음식이 벌어진 잇몸을 더 벌어지게 하거나, 상처 부위에 잔뜩 끼어 부패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꿰매 주어야 하는데, 이때 꿰매는 목적은 단순하다. 해당 부위가 알아서 나을 때까지 외부의 이물질을 차단하고, 안에서 자체 회복이 쉽도록 혈병, 즉 피딱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정말 별것 아닌 조작이지만, 이 조작이 치유에 굉장히 중요하다. 상처를 외부와 단절시키는 것. 크게 벌어진 피부 상처를 꿰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피부 표면에 사는 세균이 상처를 통해 들어가거나, 외부의 거친 물체에 상처가 다시 찢어지는 것을 최대한 막고, 스스로 아무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마음도 이와 같다.
상처가 붙고 회복되기까지 기다렸다면, 그다음에는 새 살이 자라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새 살을 만드는 세포들 — 여러 종류의 상피세포와 섬유모세포 등 — 에게 무엇을 줘야 할까? 당연히 그 세포들이 좋아하는 재료들 — 콜라겐, 엘라스틴, 그 밖의 여러 재생 인자들 — 을 줘야 하지 않을까? 단백질이 필요하니 단백질이 든 음식을 먹어야 하고, 그 외에 여러 무기질과 비타민이 필요하니 그 역시 야채 샐러드 등으로 보충해 주어야 한다. 당연히 적절한 양의 탄수화물과 지방 등 다양한 영양소가 모두 필요하며, 그런 영양소들이 잘 흡수될 수 있는 형태로 공급되어야 한다.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은 '의지'라면서 먹는 것을 제한하고 죽어라 운동해야 상처도 낫는다거나, 상처를 소독하려면 햇볕을 듬뿍 쬐어야 한다는 식으로 처치하는 사람이 있을까? 먹는 것을 제한하고 죽어라 운동하는 것은 부상을 입지 않은 건강한 상태일 때나 효과를 보지, 상처가 있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햇볕은 탄탄한 피부에 쬐면 비타민 D 합성에 도움이 되겠지만, 벌어진 상처에 쬐었다가는 재생 세포들만 '소독'되어 버릴 수도 있다. 우선 아무도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피부 재생 세포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을 잘 먹여 힘을 솟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 우리의 보상 회로를 돌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 무엇인지 아주 잘 안다. 그것은 마음이 오랜 시간 안정된 후, 뇌세포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고 회복되는 시점에 서서히 알게 된다. 뇌세포가 아물지 않은 상태, 즉 보상 회로가 이미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랜 시간 편안한 마음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런 뒤에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 일상을 어떤 활동으로 채워야 할지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실, 평소에는 사소하거나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은 지루한 것으로 여겼던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다. 우리 몸과 뇌는 애초에 큰 소비로만 회복되도록 만들어져 있지도 않다. 그저 좋아하는 영화, 드라마, 책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호감 가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뇌세포가 회복되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새로운 공부나 기술을 익히고 싶고, 어떤 창조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창조적'이라고 하니 거창한 것으로 치부해 오랫동안 억눌러 왔고, '공부'라고 하니 힘들고 머리 아픈 것으로 치부해 오랫동안 편견을 갖고 회피해 왔겠지만.
여기까지가 내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론 중 하나다. 어쩌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답해야 할 물음이 아니라, 뇌의 보상 회로에 난 상처가 아물면 조용히 사라지는 증상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회복된 사람은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를 산다. 나는 이제야, 그 질문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