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장수 비결은 ‘성관계’

일러스트 김대중

일러스트 김대중20년 전만 해도 ‘80살 보장’이라는 문구는 보험상품의 표준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100세 시대’라는 말이 일상화되면서 90살에도 가입 가능한 보험이 있고, 100살까지 보장하는 상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간 수명이 길어져 여성의 경우 평균 수명이 90살이 넘은 것은 사실이고 지금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는 기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긴긴 인생을 어떻게 준비하고 살아야 할까?중요한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단지 오래 사는 것으로 충분한가?”현대의 장수는 건강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병든 채 오래 사는 삶은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부담이 되기 쉽다.
특히 치매는 장수 사회에서 가장 두려운 질환 중 하나로 꼽힌다.
기억력 상실, 자율성 붕괴, 타인의 돌봄에 대한 절대적 의존은 인간다운 삶을 위협한다.
이에 전문가들은 치매를 비롯한 노년기 건강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신체 활동, 인지 활동, 사회 활동의 세 가지 영역을 강조한다.
규칙적인 운동, 지속적인 뇌 자극,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유지가 핵심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활동을 자연스럽게 통합할 수 있는 행위가 있다.
바로 ‘성생활’이다.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섹스’를 언급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그러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는 이 행위가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규칙적인 성생활은 심혈관 건강을 증진하며,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 분비를 통해 정서적 안정과 유대감을 높인다.
또한 파트너와의 소통, 애정 표현, 감정 조절, 상호 배려 등의 과정은 고차원적 인지 활동이자 사회적 교류이기도 하다.
문제는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성생활을 자연스럽게 중단하거나,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심지어 주변의 시선이나 사회적 편견 때문에 성적 욕구 자체를 ‘부적절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이는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서적 고립, 자존감 저하 등 다양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섹스는 젊은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늙어도 섹스를 하느냐고 질문하는 것을 본 적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성적인 존재이고 성인이라면 누구나 건강하고 안전한 섹스를 누려도 좋다.
삶을 더 건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일상의 일부로 섹스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포기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요롭고 인간적인 노년을 위한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돼야 한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단지 수명을 연장하는 것을 넘어,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성(性)은 그 삶의 질을 지탱해주는 하나의 축이며,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하거나 은폐할 문제가 아니다.
급속한 고령화 사회로 가는 것을 걱정만 하지 말고 노년기의 참 괜찮은 삶에 대한 준비를 시작할 때다.
공적인 담론 속에서 성에 대한 건강한 이해와 접근이 필요하다.
노년의 성은 부끄러움이 아닌 존엄의 일부이며,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삶의 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100세 인생의 약 절반을 삶의 비타민인 섹스 없는 삶으로 낭비해버릴 수 있다.
임의현 다솜심리건강연구소 소장(대한성학회 부사무총장)

"어차피 저 사람과는 안돼"…부정 결론 서두르는 이유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분명히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고 상대방도 내가 싫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음에도 웬지 '저 사람이 날 좋아할 리가 없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 결과 이 관계는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신호들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안 될 거 시작도 하지 말자며 허무하게 좋은 사람을 놓쳐버린 경험들 말이다.
안타깝게도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 '연락하지 말자'->'고독'의 순서를 밟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즐거운 경험을 해도 마법의 필터를 돌려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는 결론으로 서둘러 점프한다는 데 있다.
왜 잘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걸까.우서 첫번째는 거절 신호에 대한 지나친 민감성 때문이다.
연구들에 의하면 사회 불안(social anxiety)이 높은 사람들이나 기본적으로 늘 걱정과 생각이 많은 사람(성격특성 중 신경증이 높은 경우), 또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거절과 관련된 신호에 민감하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기만 해도 이걸 딴생각 한다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랑 같이 있는 게 지루한가!!'로 받아들이며 호들갑을 떤다.
부정적인 사회적 자극을 잡아내는데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에 중성적인 자극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긍정적인 자극도 일단 의심을 하고 보는 등 가급적 모든 신호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똑같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도 사회 불안이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시무룩하고 비관적인 경향을 보인다.
두 번째는 기억의 왜곡이다.
브라이언 글레이저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Glazier & Alden, 2019).사람들에게 3분 동안 자유 주제로 낯선 이들 앞에서 발표하도록 한다.
이 때 사람들의 피드백을 달리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발표의 내용이 뛰어나고 목소리나 속도도 좋았다며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적인 피드백을 준다.
그러고 나서 피드백을 받은 직후 또 일주일 후에 각각 당시 어떤 피드백을 받았는지 기억해보라고 물어본다.
그 결과 사회 불안이 높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덜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경향을 보였다.
피드백을 받은 직후에는 기억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주일 후에는 똑같이 좋은 피드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좋지 않은 피드백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 경향을 보였다.
중립적인 피드백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좋았던 기억에 한해 부정적인 방향의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긍정적인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예상'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발표를 했고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면 그것을 좋은 기억으로 저장해야 나중에 또 발표할 상황이 되었을 때 '그 때 발표 참 잘 했어. 좋았었지.'라고 좋은 예상을 가질 수 있다.
그래야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기억을 왜곡하면 발표를 수백 번 잘 해도 이런 자신감이 형성되지 않는다.
좋은 경험을 근거로 탄탄한 자신감을 쌓아올리는 것이 가능한데 그런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늘 쓸데없이 비관적이고 자신감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많이 가져도 그걸 내가 좋은 경험으로 소화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관계에 자신감이 없고 이번에도 안 될 거라며 포기하기 마련이다.
사회적 불안이 높은 사람들이 이런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관계적 신호를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즐거웠던 경험을 즐거운 기억으로 오래 저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모임을 피하고 싶을 때면 그 모임에서 즐거웠던 일들을 떠올려보거나 일단 만나고 나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즐거울 거라고 생각해보곤 한다.
또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는 즐거움을 느낀다면 '아 정말 즐겁다'고 그 순간을 길게 음미해보기도 한다.
분명히 좋았는데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놓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Glazier, B. L., & Alden, L. E. (2019). Social anxiety disorder and memory for positive feedback.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 128, 228-233.

※필자소개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특권의 포기’가 제국을 이룩한다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보는 경영’]

로마 시민의 특권을 식민지에도 주려 했던 카이사르는 내부 반발로 인해 암살당했다.<BR> 그러나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아우구스투스가 시민 특권을 식민지에 주면서, 제국은 안정되기 시작했다.<BR> (구글 제공)

로마 시민의 특권을 식민지에도 주려 했던 카이사르는 내부 반발로 인해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아우구스투스가 시민 특권을 식민지에 주면서, 제국은 안정되기 시작했다.
(구글 제공)
드디어 로마를 공포에 떨게 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사망했다.
기원전 183년의 일이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지중해 패권을 놓고 세 번에 걸쳐 싸웠던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 장군의 뛰어난 전략으로 패배를 거듭했던 로마는 멸망 직전까지 갔지만, 귀족과 평민 그리고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과 일치단결해 끝까지 버틴 끝에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포에니 전쟁 승리로 로마는 이제 주변 어디에도 적수가 없는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로마는 곧 로마인들이 로마인을 죽이는 내전에 휩싸였고, 이런 로마의 내전 상태는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암살되는 이유가 된다.
어째서 로마인들은 서로를 죽이는 내전을 하게 되었을까?지중해를 모두 장악한 로마는 이제 이집트와 시리아 같은 넓은 농토에서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대규모 농업을 하게 된다.
당연히 모든 식량과 생필품 가격은 내려간다.
문제는 로마 권력층과 부유층을 제외하면 대부분 로마 시민은 소규모 자작농이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작은 농토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한니발과 목숨 걸고 싸웠던 로마 자작농들은 해외에서 수입되는 값싼 농산물 때문에 농토도 빼앗기고 어린 자녀들이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른다.
마치 자유무역협정 FTA로 전 세계 상품이 수입되면서 미국 블루컬러 계층의 삶이 어려워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런 로마 평민의 문제를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 최고 귀족 가문 자손인 그라쿠스 형제(Gracchi)였다.
형인 티베리우스는 생계가 어려워진 로마 평민들을 위해 복지 정책을 펼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티베리우스의 정책에 반감을 가졌던 로마 기득권층에 의해서 암살되고 만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의 노력으로 로마 기득권층인 원로원도 자작농이던 평민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평민의 생계를 돕는 복지 정책이 도입된다.
그러나 로마의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당시 로마는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 불과했다.
한니발과 포에니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모든 도시들이 동맹을 맺어 같이 전투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포에니 전쟁에서 이기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분명히 전투에서는 똑같이 싸웠는데 승리한 이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 등 식민지 지배권을 로마가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는 모든 권력과 부를 갖게 되었지만 이탈리아 다른 도시들은 승리의 전리품을 전혀 챙기지 못했다.
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 가이우스는 이런 동맹시의 입장에서 정책을 펼 것을 주장했다.
로마인만이 특권을 누리지 말고 목숨을 걸고 같이 싸운 동맹시에도 특권을 나누어 주자는 주장이었다.
이런 가이우스의 주장에 심지어 로마의 가난한 평민들도 분노했다.
동생인 가이우스 역시 분노한 로마인들 손에 죽임을 당한다.
이후 발발한 것이 바로 기원전 91년의 동맹시 전쟁(war of the allies)이다.
로마군과 동등한 전력을 가지고 있던 동맹시들의 전투력은 워낙 대단해서 로마 최고 사령관인 집정관이 전투 중에 사망했을 정도다.
다행히도 동맹시 전쟁은 파멸로 치닫지는 않고 불과 2년 만에 종결된다.
로마가 이탈리아 모든 도시에 로마 시민권을 주기로 바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죽이면서까지 이탈리아 동맹시들에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을 거부했던 로마인들이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 위기감이 고조되자 바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대한민국 같은 약소국의 역사를 가진 나라의 국민은 강대국이 너무나 부럽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강대국은 강대국 나름의 말 못 할 고민이 있다.
적군과의 전투에서 힘을 합해 같이 싸웠던 동맹국들은 물론이고 한때 적이었지만 이제는 항복을 한 다른 나라들에 대한 배려를 해줘야 하는 것이 강대국의 책무다.
단순히 책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의 지배자가 된 상황에서는 전 세계 우수한 인재들을 모두 등용해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의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지 않는다면 수십 년 안에 경제력과 군사력이 쇠퇴하면서 초강대국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자리한다.
2017년 미국 하버드대 신입생 중 백인 학생 비율은 49.2%였다.
400년 가까운 하버드대 역사에서 처음 발생한 일이다.
미국의 아시아인 비율이 6%에 불과하지만 하버드 신입생의 22%가 아시아계 학생이다.
그리고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IBM의 CEO가 모두 인도계이고 엔비디아를 비롯한 반도체 쪽 CEO 중에는 대만계가 많으며, 일론 머스크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다.
이런 전 세계 우수한 인재들이 미국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미국이 여전히 세계 최고 강대국인 것이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미국인이었고 자신의 할아버지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목숨 걸고 싸워 자유 진영을 지켜낸 미국 백인 입장에서는 미국의 최고 대학인 하버드에 자신들의 자녀가 들어갈 기회가 줄어들고 한때 자신들이 점령하고 도와준 국가 출신들이 회사에서 상관이 되어서 명령을 내리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로마 시민권 확대를 지지하는 카이사르 집안에서 태어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면서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독일에 해당하는 지역의 우수 인재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주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로마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원로원과의 대립이 필연적이었다.
로마 원로원들은 자신의 조상이 한니발과 목숨을 걸고 싸워서 획득한 로마의 특권을 갈리아 같은 야만인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카이사르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카이사르는 죽었지만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황제 지위에 오르면서 로마는 전 세계의 능력 있는 인재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정립한다.
한니발을 이기고 거의 150년 동안 로마 시민끼리 서로 죽이는 전쟁을 통해 간신히 내린 결론이었다.
로마는 이런 제도를 바탕으로 카이사르 암살 이후 500년 이상 번영을 누린다.
물론 로마의 번영 뒤에는 전통적인 로마인들이 한때 자신들이 점령했던 프랑스인과 시리아인 밑에서 지시를 받고 근무하는, 괴이하다면 괴이한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199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먼델(Robert Mundell) 교수의 최적통화지역(Optimum currency area) 이론이 있다.
통화를 같이 사용하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환율 변동의 불안이나 관세 변동에 의한 손해를 걱정하지 않고 경제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먼델 교수는 그렇다고 해서 통화 범위를 무작정 늘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같은 통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우리는 남이 아니다’라는 의식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미국인이 캐나다와 멕시코와 중국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는 한 같은 통화를 쓰면서 같은 경제공동체가 될 수 없다.
같은 통화뿐 아니라 FTA 같은 경제 협력도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갈등과 부작용만 높이게 된다.
로마는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 동맹시 전쟁, 카이사르 암살 등을 겪으면서 타국에 로마의 특권을 허용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오랜 고민을 했다.
현재의 초강대국인 미국의 고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백성 고혈 짜 유배지서 호의호식한 조선 사족들 [.txt]

강명관의 고금유사임금 진상품 더 거둬 남겨 먹은 ‘봉여’벼슬아치들끼리 물자 공급 부탁한 ‘칭념’권력 움켜쥔 사익 공동체, 지금도 똑같아

19세기 조선 화가 성협의 화첩 중 양반들이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갈무리

19세기 조선 화가 성협의 화첩 중 양반들이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갈무리강명관의 고금유사이문건(1495~1567)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그는 죽을 때까지 17년8개월 동안 경상도 성주의 유배지에서 살아야만 했다.
귀양살이라 하지만, 무슨 감방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고 멀쩡한 집에서 서울에서 살던 것처럼 살았다.
또 조선 시대에 귀양 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그가 귀양살이한 것이 무어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문건의 귀양살이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귀양지에서 열심히 쓴 일기 때문이다.
그 일기는 이름하여 ‘묵재일기’(默齋日記)다.
묵재일기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그중 하나를 들어보자. 이문건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한 방법이다.
상당 부분의 물자는 다른 사람의 증여로 채워지고 있다.
예컨대 1563년 5월12일 일기를 보자. 이날 호조 판서 오겸은 황모필 4자루, 양털 붓 2자루, 납약 등을 보냈고, 경상도 관찰사 심수경은 ‘봉여’(封餘)라면서 포(脯, 말린 고기) 2개, 말린 꿩 3마리, 붕어 10마리 등을 보냈다.
그런데 이날만 그런 것인가. 아니다.
묵재일기는 이런 물건들의 증여로 흘러넘친다.
판관, 목사, 군수, 현감 등등 지방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고 이문건에게 무엇인가를 보낸다.
1566년 1월을 예로 들어보자. 12일에는 성주 판관이 미역 1봉을, 3일에는 언양 현감이 생선 7마리와 전복 200마리를, 15일에는 다시 성주 판관이 과일과 밥을, 19일에는 청도 군수가 생밤 2말을, 22일에는 고령 현감이 쌀 1섬, 27일에는 인동 현감이 말린 꿩 3마리를 보냈다.
이 외에 친지로부터 받은 물건은 쓰기 귀찮을 정도로 많다.
이 벼슬아치들은 자기 개인의 물건을 이문건에게 보낸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경상도 관찰사 심수경은 포와 말린 꿩, 붕어를 보냈을 때 ‘봉여’라고 말했다.
봉여는 ‘봉상(封上)하고 남은 물건’이란 뜻이다.
곧 왕에게 어떤 물건(곧 진상품)을 봉해 올리고 남은 물건이다.
그러니까 심수경은 진상하고 남은 물건이라면서 이문건에게 보낸 것이다.
이문건은 여러 벼슬아치로부터 봉여를 22번이나 받았다.
쌀, 밀, 종이, 전복, 문어, 연어, 은어, 홍합 등등 별별 것이 다 있었다.
‘칭념’(稱念)이란 말도 묵재일기에 자주 보이는데, 본질적으로 봉상과 다를 바 없는 말이다.
칭념은 원래 불교의 용어다.
부처의 명호(名號)를 읊조리면서 무언가를 염원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 문헌에서는 보통 ‘부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안동 부사로 부임한다고 하자. 나는 그에게 안동에 사는 나의 지인에게 음식 재료나 생활용품을 줄 것을 부탁한다.
때로는 안동에 있는 나의 외거노비가 신공(身貢)을 빼먹지 않고 바치도록 감독해 줄 것을, 또는 달아난 노비를 찾아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이런 부탁이 곧 칭념인데 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16세기 조선의 관료 이문건의 ‘묵재일기’ 전문을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단 ‘역주 묵재일기’. 민속원 제공

16세기 조선의 관료 이문건의 ‘묵재일기’ 전문을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단 ‘역주 묵재일기’. 민속원 제공묵재일기에서 칭념의 구체적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1554년 8월12일의 일기다.
“목사 이사필이 서울 친구들의 칭념 목록을 보내며, 쌀과 콩을 각각 1섬씩 보내왔다.
” 여기서 목사는 이문건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성주의 목사다.
서울에 있는 이문건의 친구들이 이사필이 성주 목사로 부임한다는 말을 듣자 그를 찾아가 이문건에게 이런저런 물건들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물건 목록을 전했고, 이사필은 부임하자 그 목록을 보고 먼저 쌀과 콩을 보냈다.
이런 칭념의 방식으로 무수한 물자가 이문건에게 전해졌다.
묵재일기에는 152회의 칭념이 나온다.
여기에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실린 허다한 칭념의 예까지 고려하면 사족사회(士族社會)에서 칭념이 일상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족과 관료들은 봉여와 칭념을 통해 물자를 줄 수도, 받을 수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 사족이라는 것, 관료가 된다는 것은 국가 권력을 움켜쥔 그들만의 ‘봉여와 칭념의 이익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족과 관료들이 봉여와 칭념으로 건네주고 건네받았던 그 물자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봉여는 백성들로부터 200개나 300개를 거두고 그중 100개만 봉해서 바치고 나머지는 관리들이 나눠 가진 것이었다.
칭념의 물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은 국가 권력을 수단으로 백성이 생산한 것을 수탈한 것이었다.
1554년 안동의 생원 이포가 상소하여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백성들의 참상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면서 수령들의 과잉 수탈을 막아 달라고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문건이 받은 봉여가 그것을 입증한다.
봉여와 칭념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상응하는 행위는 조선이 종언을 고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 권력은 소수 지배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봉여와 칭념의 이익공동체’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 어디 생각나는 국가 기관이 없는가? 또 기관의 장은 없는가?강명관 인문학 연구자

강명관 인문학 연구자

강명관 인문학 연구자

짧은 시 다음에 긴 산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립니다.
1919년1월28일 화요일 저녁입니다.
독일 뮌헨 슈타이니케 예술홀에서 대학생 단체 초청으로 막스 베버의 강연이 열립니다.
독일은 제국에서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바뀌는 과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치른 직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지고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했습니다.
승전국들 배상에 국민소득 10%를 써야 합니다.
빵 1파운드(0.45kg) 값이 30억 마르크라는 기괴한 일이 뒷날 닥칩니다.
빵 사러 가는 그사이, 가격이 또 올라 지폐를 한 수레 더 끌고 가야 할 판입니다.
전무후무한 초인플레이션으로 역사는 기록합니다.
좌파 봉기는 유혈 진압되고 총격이 난무한 가운데 정파들이 우후죽순 난립합니다.
피눈물 나는 혼돈의 시기에 현실 참여 성향이 강한 학생들은 학자의 고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기대에 부풀어 베버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베버가 말문을 엽니다.
[(이하 건너뜀 많은 요약) 내 강연은 여러모로 여러분을 실망시킬 겁니다.
현안들에 대해 어떤 입장 표명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겠으나 마지막에 아주 형식적으로만 언급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강연에서 나는 어떤 정책을 실천해야 하는지, 그것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도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정치를 소명이자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혹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와 같은 보편적 주제와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취지를 밝히며 시작한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 『Politik als Beruf』(소명으로서의 정치)입니다.
명사 베루프(Beruf)에 든 ruf의 근원, 루펜(rufen)은 부른다(召. 부를 소)는 뜻입니다.
베루프는 영어 보케이션(vocation)과 비슷합니다.
직업(job, profession)보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제목으로 선호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이유입니다.

정의의 여신상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정의의 여신상[게티이미지뱅크 제공]강연 들머리에 기대하지 말라고 선을 긋고 있네요. 벌써부터 실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겠지요? 책은 직업정치인과 정치연구자들의 필독서가 되어 두고두고 읽힙니다.
당시 학생들은 실망했을지 모르지만 후학들은 달랐습니다.
책은 무엇보다 본질을 꿰뚫는 개념 정의로 위력을 뽐냅니다.
특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강권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한 유일한 인간공동체가 국가라고 말합니다.
열정과 균형적 현실 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 정치이고요. 직업정치인은 냄비 끓듯 뜨겁기만 하고 뭘 이루긴 어려운 주관적 정념의 반대 격인 객관적 열정, 책임감, 거리를 둔 채 상황을 보면서 균형 있게 판단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베버는 지적합니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변증법은 화룡점정입니다.
신념이 응당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신념에 따른 행위가 불러올 결과에 대한 책임을 고려하는 정치가 필수적이라고 조언합니다.
뭐 하나 제대로 가진 것 없이 권력욕만 한가득한 정치인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그 끝을 보기까지 국민이 너무 큰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고요.시는 끝났고 산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베버는 강연을 맺으며 독일의 앞날이 우울할 거로 봅니다.
그러나 한 세기 뒤 여기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희망 담론이 영감을 줍니다.
자칫 길고 지루하기 쉬운 산문을 잘 읽어내라는 듯 베버는 강조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으리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중략)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 강의에서 베버는 친애하는 청중이라고 학생들을 부르며 "10년 뒤에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고 했던 대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강연 이듬해에 유명을 달리합니다.
하지만 베버는 계속 읽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Max Weber, 『Politik als Beruf』, Anaconda, 20142. 막스 베버 저 최장집 해제 박상훈 역, 『소명으로서의 정치』, 후마니타스, 20213. KDI 경제교육ㆍ정보센터 클릭경제교육(종간) '1920년대, 초인플레이션이 독일에 남긴 것'(박복영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2014.07.01 - https://eiec.kdi.re.kr/material/clickView.do?click_yymm=201512&cidx=22044.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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