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제공
처음에는 귀찮기만 했는데 막상 하고 나니 뿌듯하기도 하고 결과물에 애착이 가는 그런 경험을 다들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학교에서 과제 때문에 억지로 만들었지만 막상 만들고 나니 왠지 버리기 아깝고 소중해 보이는 미술 작품 같은 것들이 한 예다.
흔히 IKEA 효과라고 불리는 현상으로 같은 가구도 이미 조립 된 채로 온 것보다 내가 직접 노력을 들여 조립한 가구가 더 가치 있어 보이는 현상을 일컫는다.
하지만 때로는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은 노력을 요하거나 노력 끝에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아까운 돈과 시간, 노력을 낭비한 것 같아서 속상하기만 하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귀찮은 마음이 너무 커서 결과물이 어땠든 귀찮고 성가셨던 기억이 더 크게 남는 경우도 있다.
어떨 때 노력이 소모되었는지 여부가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알기 위해 프제미스와프 마르코프스키 샌디에이고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어떤 과제를 하고 나서 정해진 액수 만큼의 보상을 돈으로 받거나 경제적으로 같은 가치를 갖는 머그컵으로 받을 수 있게 했다.
여기서 돈은 아무런 추가적 노력 없이 받을 수 있었지만 머그컵은 계단을 꽤 올라야지만 (추가적 노력 필요)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여기에 더해 어떤 보상을 받을지 선택하는 ‘타이밍'을 달리 해서 한 조건의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며 돈과 머그컵 중 무엇을 원하는지 선택하게 했고 다른 조건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계단을 걸은 후 (노력이 이미 발생) ‘과거’를 생각하며 돈과 머그컵 중 선택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아직 계단을 오르지 않은 참가자들에게는 지금 그냥 돈을 받거나 아니면 계단을 오르고 나서 머그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고 이미 계단을 오른 조건의 참가자들에게는 이 머그컵을 받기 위해서는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참가자들은 이미 계단을 올랐으며 따라서 이 머그컵을 가지거나 또는 이를 돈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직 노력이 발생하지 않은 조건의 사람들은 같은 보상이라면 가급적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돈을 더 많이 선택한 반면 이미 노력이 발생한 조건의 사람들은 이들보다 더 높은 빈도로 머그컵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물론 이들 중 절반은 돈을 선택했다.
하지만 전자에서는 약 70% 가 돈을 선택).
노력이 어떤 선택을 더 가치있게 느끼게 해 주는 효과는 “이미 그 노력이 발생하고 나서 노력한 과거를 돌아 볼 때”에 한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개인차가 있어서 대체로 노력을 통해 얻는 보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과 대체로 그렇지 않은 사람, 노력이 적당할 때에는 괜찮았지만 노력이 지나쳤을 때에는 보상을 덜 매력적으로 바라본 사람, 이와 반대로 노력이 지나쳤을 때 더 보상을 매력적으로 바라본 사람 등 다양한 행동 양상이 관찰되었다.
험난한 산을 힘들게 올라서 꼭대기에 섰을 때와 자동차나 케이블카 등을 타고 손쉽게 올랐을 때 보이는 풍경은 같지만 그 ‘의미’는 사람들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를 결과로만 보지 않고 그 ‘과정’에서도 의미를 찾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개인차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 다르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등산이 큰 의미가 있겠지만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등산이 그저 쓸모없는 일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대체로 힘겹게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루하루 소소하게 행복하고 평온하게 지내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또 나의 경우 기초 체력이나 에너지 수준이 상당히 낮은 사람이어서 가급적이면 내가 좋아하는 것에 에너지를 쓰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쓰고 나면 되려 허무함을 느끼는 것 같다.
물론 소중한 이들과 만나는 시간 같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노력을 집중하는 편에 가까운 것 같다.
여러분은 어떤 편인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해보면 즐거운 탐구 시간이 될 것 같다.
고통을 직면해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흔히 긍정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좋다고 할 때 많이하는 실수 중 하나가 어려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회피해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한 두 가지씩 지병을 갖게 되지만 나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고 나만은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문턱에서 실패하지 않을 것이고 삶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들은 언제나 많지만 내 삶의 요소들은 통제할 수 있는 게 더 많을 것이고 대부분의 인생은 굴곡져있으나 내 인생만큼은 평탄할 것이라고 믿는 (또는 믿고 싶어 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
그렇다면 거꾸로 이제 곧 큰 병에 걸릴 것이고 엄청나게 실패할 것이며 내 삶의 아무 것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며 인생이 계속해서 바닥을 칠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거냐는 반문을 듣기도 한다.
(사실 필자의 경우는 한동안 이랬던 기간이 있어서 이것도 꽤 현실적인 예측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것은 예측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인생이라는 큰 숲을 볼 때 삶에는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들 못지 않게 그렇지 않은 시간들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찾아올 수도 있음을 (물론 안 올 수도 있다) 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선 저항한다고 해서 마음만 복잡해질 뿐 달라지는 것은 없고 대부분의 인간이 어느 정도의 괴로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되려 고통 속에서도 담담하게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구체적인 사건이나 결과'에 대해 갖는 낙관주의는 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연구들이 있었다.
어떤 일이 가급적 잘 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무조건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노력을 증가시키지 않았고 따라서 성공률을 더 높이지도 않았다.
다만 잘 안 되었을 때 좌절감은 더 큰 편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잘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 좌절을 겪었을 때 신과 세상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특정 사건의 발생 여부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실력과 노력이 둘 다 충분했어도 타이밍의 문제 같이 '운'에 의해 넘어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보다는 우리가 좀 더 관여할 수 있는 삶의 '과정'과 자신의 '태도', 일을 해석하는 나의 시각 등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어제의 내가 그럭저럭 잘 지내왔듯, 내일과 미래의 나도 여전히 넘어지고 다칠지언정 살아낼 거라고 결과가 어찌되었든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것이고 그 경험들이 새로운 나를 만들어갈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삶은 결국 '시간'이기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나의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반짝이게 할 수 있다면 일의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보통 실패의 무게보다 걱정의 무게가 좀 더 크기 때문에)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은 가장 어두운 순간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고통을 직면해야 하는 중요성을 말해준다.
삶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는 삶의 기쁨이 곧 가장 큰 고통이 되기도 한다는 역설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수록 그만큼 삶에서 기쁨을 주는 소중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잃을 것이 많기 때문에 잃는 순간에는 누구보다도 큰 아픔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기쁨과 고통은 보통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많은 공을 들여 간절하게 바래온 일일수록 실패가 쓰라린 법이고 누군가를 사랑할수록 그 사람과의 헤어짐이 아픈 법이다.
소망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일수록 좌절의 쓰라림과 이별의 아픔을 안다.
만약 단 한 번도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아무것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우리가 겪은 아픔들은 그만큼 내 삶에는 소중한 것들이 많으며 나는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기쁨과 고통이 사실 하나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 나면 삶이 쉽지 않은 이유가 자연스럽게 납득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결국 누구나 다 늙고 병들고 죽고 만다는 명제, 삶의 유한함과 고통에 대해 직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래야 힘들어 하는 타인에게 측은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 자신이 겪는 아픔이 가장 아픈 법이다.
타인의 아픔은 짐작만 할 뿐 직접 겪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쉽게 서로의 아픔을 경쟁하려고 들고 내가 진짜 힘들었고 너의 인생은 편하기만 했다고 그래서 억울하다고 싸우려 든다.
이렇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채 모두의 괴로움이 좀 더 늘어나게 된다.
피해의식에 관한 연구들에 의하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괴로움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타인들이 미워지고 괜히 보상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각종 ‘이기심’이 튀어나오게 된다.
나는 힘들게 살았으니까 지금부터는 좀 이기적으로 막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와 달리 '이제부터 함께 해결하자'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어떤 것이 좀 더 해결 가능한지, 어떤 것이 사회적 단위의 노력을 요하는지, 서로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등의 좀 더 건설적인 대화가 가능해진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들을 직면해야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다양한 종교와 철학자들에 의해 전해져 왔다.
인간이 고통을 이겨내는 방식에 대한 심리학의 연구 또한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던져주는 좋은 것들을 사랑하는 만큼 아픔 또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힘든 때에 마음이 지하로 추락하는 일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코소보 전쟁. 연합뉴스 제공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다른 종교나 민족 등을 이유로 갈등을 빚어온 지역들이 있다.
코소보를 둘러싸고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인이 충돌해 온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는 이 지역의 긴장감이 완화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갈등의 고조와 완화가 반복되며 양쪽에 많은 상처를 내고 있다.
한국 역시 이웃 나라 일본, 중국과 오랜 시간 반목해 온 역사가 있고 식민지 시절을 겪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기에 역사적 비극이 반복되는 것이 남의 이야기 같지만은 않다.
이슬람 보린카 그로닝겐대 연구팀은 855명의 알바니아인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세르비아인들이 과거에 자신의 국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메시지를 보게 했고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세르비아 정부 관계자가 사과하는 메시지를 보게 했다.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사과의 메시지가 담기지 않은 소식을 듣게 했다.
그 결과 보통의 세르비아인들이 과거의 잘못에 대해 후회를 내비치고 사과의 마음을 전달하는 내용의 메시지에 사람들의 마음이 가장 크게 움직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관계자가 사과했을 때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후회의 마음을 내비쳤을 때 알바니아 사람들은 더 세르비아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의향을 크게 내비쳤다.
또한 정부 관계자보다 보통의 세르비아인들에게 사과를 받았을 때 세르비아인들도 자신들과 비슷한 '인간'이라는 인식이 더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갈등을 빚고 있는 외집단을 향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거나 짐승, 바퀴벌레 같은 존재라며 해당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인격을 깎아 내리는 '비인간화'가 흔히 나타난다.
이러한 비인간화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향해 학살 같은 일도 서슴지 않고 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세르비아 일반인들로부터 사과를 받았을 때 알바니아인들은 상대를 더 '인간화' 해서 바라본 것으로 나타났다.
나아가 이러한 인간화가 우리 집단이 타 집단보다 더 큰 피해를 봤다고 하는 '경쟁적 피해의식' 또한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나 민족 단위의 사람들이 겪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 시간이 지났으니 그만 잊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과거의 상처가 지금까지도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데도 마치 과거와 현재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개인적인 상처도 그렇지만 개인과 집단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문제들도 최소한의 '종결'이 필요하다.
어떤 것이 잘못이었고 지금이라도 이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대화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미 끝났는데 자꾸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아직 이 문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얘기하는 것이고 계속 얘기해야 조금이라도 더 모두에게 이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함께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한 성찰의 시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도 생각하기 귀찮아서, 심각한 분위기가 싫어서, 나의 고통은 위로받지 못했는데 남의 고통이 위로 받는 걸 보는 게 배 아파서, 그냥 현상 유지하는 것이 좋아서, 내 기분이 편안한 것이 가장 중요해서, 남이 고통받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돼서, 또는 찔리는 것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결국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는 사회에서 '나만 잘 사는 것'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법이다.
누군가의 고통이 쉽게 잊혀지는 사회에서는 나의 고통 또한 가볍게 여겨질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해보자.
'초과근무', 반드시 좋은 성과 낳는 건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벌써 10년이 훨씬 지난이야기지만 야근이 잦은 회사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다.
일의 성과보다도 엉덩이가 무겁게 회사에 ‘오래’ 붙어있는 것이 충성심(?)과 성실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특이한 현상들을 많이 관찰 할 수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낮에는 아무도 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낮 시간에 일을 열심히 하든 안하든 그것과 상관 없이 어차피 야근을 할 것이므로 다들 한 두 시간이면 할 수 있는 일을 하루 종일 들고 있다가 저녁이 되면 그제서야 시작하는 식이었다.
오랜 시간 일하는 관행이 곧 높은 생산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통념들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초과 근무까지 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은 기계와 달리 오늘 준비한 에너지가 다 소모되면 작동을 멈추거나 오작동을 남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잠을 쫓아내며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일하고 나서 다음날 멀쩡한 정신으로 지난 밤 내가 일한 내용을 보았을 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발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기 때문에 건강도 잃고 생산성도 잃은 슬픈 경험들이었다.
다들 경험으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리케 텐 브룸멜후이스 사이몬 프레이저대의 연구팀은 좀 더 체계적으로 이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자들은 영업직, 컨설팅, 엔지니어링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약 5일 간 하루 동안 일한 시간과 이들이 하루 동안 보인 성과(동료 직원의 평가)를 측정했다.
또한 스마트 워치를 통해 참가자들의 수면 패턴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평소보다 초과근무를 했을 경우 당일에는 동료들로부터 좋은 성과를 냈다는 평을 받는 현상이 나타났지만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다.
전날 과로한 사람들은 잠을 푹 자지 못하거나 수면시간이 부족한 편이었고 그만큼 다음 날 업무 성과가 저조한 편이었다.
결국 과로를 하는 경우 미래의 생산성을 땡겨서 쓰는 것일 뿐 당장은 성과가 좋더라도 그것이 계속 이어지지 않으며 종국에는 몸도 상하고 업무 성과도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루, 한 주 동안 생산적으로 해낼 수 있는 업무량에는 한도가 있고 휴식을 취해야만 다시 비슷한 생산성을 보일 수 있다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무리할 경우 당장은 높은 생산성을 보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미래의 마이너스 생산성이라는 빚을 쌓는 것임을 기억해보자.
어쩌면 평소에는 일을 하지 않다가 마감이 되어서야 잔뜩 벼락치기를 하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로 매우 비효율적인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멀쩡한 정신 상태인 내가 두세 시간이면 할 수 있는 일을 밤 늦게까지 잠을 쫓아가며 해야 하기 때문에 두세 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실수를 하고 또 그 다음 날에도 성과가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어차피 저 사람과는 안돼"…부정 결론 서두르는 이유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분명히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고 상대방도 내가 싫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음에도 웬지 '저 사람이 날 좋아할 리가 없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 결과 이 관계는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신호들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안 될 거 시작도 하지 말자며 허무하게 좋은 사람을 놓쳐버린 경험들 말이다.
안타깝게도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 '연락하지 말자'->'고독'의 순서를 밟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즐거운 경험을 해도 마법의 필터를 돌려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는 결론으로 서둘러 점프한다는 데 있다.
왜 잘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걸까.
우서 첫번째는 거절 신호에 대한 지나친 민감성 때문이다.
연구들에 의하면 사회 불안(social anxiety)이 높은 사람들이나 기본적으로 늘 걱정과 생각이 많은 사람(성격특성 중 신경증이 높은 경우), 또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거절과 관련된 신호에 민감하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기만 해도 이걸 딴생각 한다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랑 같이 있는 게 지루한가!!'로 받아들이며 호들갑을 떤다.
부정적인 사회적 자극을 잡아내는데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에 중성적인 자극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긍정적인 자극도 일단 의심을 하고 보는 등 가급적 모든 신호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똑같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도 사회 불안이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시무룩하고 비관적인 경향을 보인다.
두 번째는 기억의 왜곡이다.
브라이언 글레이저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Glazier & Alden, 2019).
사람들에게 3분 동안 자유 주제로 낯선 이들 앞에서 발표하도록 한다.
이 때 사람들의 피드백을 달리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발표의 내용이 뛰어나고 목소리나 속도도 좋았다며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적인 피드백을 준다.
그러고 나서 피드백을 받은 직후 또 일주일 후에 각각 당시 어떤 피드백을 받았는지 기억해보라고 물어본다.
그 결과 사회 불안이 높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덜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경향을 보였다.
피드백을 받은 직후에는 기억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주일 후에는 똑같이 좋은 피드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좋지 않은 피드백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 경향을 보였다.
중립적인 피드백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좋았던 기억에 한해 부정적인 방향의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긍정적인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예상'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발표를 했고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면 그것을 좋은 기억으로 저장해야 나중에 또 발표할 상황이 되었을 때 '그 때 발표 참 잘 했어. 좋았었지.'라고 좋은 예상을 가질 수 있다.
그래야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기억을 왜곡하면 발표를 수백 번 잘 해도 이런 자신감이 형성되지 않는다.
좋은 경험을 근거로 탄탄한 자신감을 쌓아올리는 것이 가능한데 그런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늘 쓸데없이 비관적이고 자신감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많이 가져도 그걸 내가 좋은 경험으로 소화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관계에 자신감이 없고 이번에도 안 될 거라며 포기하기 마련이다.
사회적 불안이 높은 사람들이 이런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관계적 신호를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즐거웠던 경험을 즐거운 기억으로 오래 저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모임을 피하고 싶을 때면 그 모임에서 즐거웠던 일들을 떠올려보거나 일단 만나고 나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즐거울 거라고 생각해보곤 한다.
또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는 즐거움을 느낀다면 '아 정말 즐겁다'고 그 순간을 길게 음미해보기도 한다.
분명히 좋았는데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놓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