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오래된 미래다


백영옥 소설가

얼마 전, 엄마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의 연락을 받았다.
엄마의 오래된 친구였는데 이민을 가면서 연락이 끊어진 것이었다.
그녀의 딸이 내 SNS를 찾아 메시지를 보냈고, 소식을 전하자 엄마도 당장 친구의 연락처를 물었다.
그리움이라는 추상명사가 특별한 이에게 편지처럼 도착해 고유명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리운 고유명사가 된다는 건 근사한 일이다.
젊을 때는 과거를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건강과 함께 과거의 좋은 기억과 추억은 큰 자산이 된다.
살면서 우리는 여러 만남과 헤어짐을 겪지만 가슴에 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그리움으로 남는 건 그 사람의 어딘가를 물들였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관계는 이처럼 밧줄로 서로를 얽매는 게 아닌 느슨하게 스미는 사이 아닐까.

인생은 양방향의 왕복이 아닌 오직 편도다.
그리움 역시 대체로 과거형으로 쓰인다.
그러나 이 독특한 감정은 미래의 것이기도 하다.
기억은 과거에서부터 밀려오지만 감정은 미래를 향해 걸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누군가에게 과거의 흘러간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도 걸어오는 사람이라면 잘 살아온 삶이다.
나의 기억이 우리의 추억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사람은 왜 누군가를 늘 그리워할까. 우리 모두 미완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리운 사람은 내게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사람이다.
끝내 전하지 못한 말, 잡아주지 못한 손, 마주하지 못한 눈빛이 가득한 사람이다.
함께했던 시간보다,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지는 사람. 그렇게 그리움은 ‘오래된 현재’이자 ‘오래된 미래’가 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이 그러하듯.

살아가는 동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기적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저물어가는 삶의 황혼기에는 기적의 정의를 다시 적어볼 만하다.
내가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사람이 나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적이라고.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힘

맡은 자리를 진심으로 받들고
성실히 일상을 지키는 사람들
그들이 침묵 속에 지켜보다
등을 돌릴 때 세상은 바뀐다

다시, 환절기다.
꽃 진 자리에 초록이 무성하고, 서늘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이 분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 그 익숙한 풍경 속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출퇴근길 대중교통과 일터와 거리에서 마주치는 평범하고 조용한 존재. 바로 그들이, 유월의 어느 하루 투표를 통해 세상을 움직였다.
승리의 환성 혹은 패배의 한숨과 함께 금세 잊히기 일쑤이지만, 진짜 전환은 항상 그 손끝에서 일어난다.

몇 해 전 도서관과 커뮤니티 시설에서 글쓰기 교실을 진행했다.
첫 수업이 열리는 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연락과 이런저런 실무를 도울 ‘반장’을 정하는 것이다.
서로 초면인 수강생들은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하고 조심스러운 눈빛만 주고받는다.
그때 나는 휴대폰을 꺼내어 ‘제비뽑기’ 앱을 켠다.
처음에는 다들 웃으며 가벼운 놀이처럼 받아들이지만, 나는 진지하게 버튼을 누르고 당첨자를 발표한다.
모두에게 반장을 맡을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결코 헛된 소리가 아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무작위로 뽑힌 반장은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성별과 나이, 학벌이나 직업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연히’ 맡은 자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하며 성실히 제 몫을 다했다.
나는 그것을 ‘평범한 사람의 특별한 힘’이라 부르련다.
자신의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며, 주어진 의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일상인의 힘.

그 대단하다는 정치란 누가 더 크고 선명하게 외치는가 하는 싸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다른 데 있다.
정당에 가입하거나 광장에서 부르짖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익명의 고요 속에서 한 표를 던진다.
결국 그들에 의해 정권이 바뀌었다.
환호와 절망, 기대와 체념이 교차했다.
누군가는 나이, 성별, 지역에 따라 색깔을 구분하며, 싸잡아 비난하거나 제 편인 양 우쭐한다.
그들은 고작 한 표씩을 가졌을 뿐이다.
하지만 선동도 충동도 아닌, 저마다 고민 끝에 신중하게 한 표를 행사했다.
이토록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힘을 모르거나 간과하는 데서 정치의 파행이 비롯된다.

말 없는 다수는 모른 게 아니다.
수차례 반복된 탄핵 시도와 방탄 입법, 정의를 가장한 위선과 폭주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다만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시간의 법칙에 기대었고, 직접 목소리를 내는 대신 법과 제도의 힘을 믿었다.
그런데 그 신뢰를 먼저 저버린 쪽은, 뜻밖에도 정권을 쥔 자들이었다.
침묵을 오해했고, 조급증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침범했다.
결국 시간과 법에 의지한 다수가 아니라, 그들을 의심해 신뢰를 배반한 권력이 스스로를 무너뜨렸다.

믿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어금니를 사리물고 고단한 노동과 남루한 삶을 견디는 것은, 무슨 영생불멸 천지개벽을 바라서가 아니다.
가족과 일, 지리멸렬한 일상이나마 무사히 지키면서, 범죄자는 감옥에 가고 피해자는 구제받는 ‘순리’의 실현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잠깐’ 동안 그걸 깨뜨린 것이 그다지도 큰 죄냐고 묻는다면 갈 길이 멀다.
무시를 넘어 모욕당한 분노를 모른다는 건 그만큼 민심과 동떨어져 있다는 증거와 다름없다.

계절은 머무르지 않는다.
초록이 붉어지고 시들어 떨어지는 것처럼, 변화는 늘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다가온다.
지금은 공수가 바뀌었을지언정 여야에 달리 해당하는 이치가 아니다.
묵묵히 침묵 속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등을 돌리는 순간, 세상은 바뀐다.
대의와 이념, 전략과 선전보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힘을 지닌 평범한 이들이 이 모두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다.

시카고의 피카소

‘미국 건축의 수도’라는 시카고는 마천루의 경관으로 유명하다.
이에 못지않게 도심 곳곳에 설치된 공공 미술 또한 정평이 나 있다.
“블렌더 안에서 해체되는 스누피”라는 장 뒤뷔페의 ‘서있는 야수(Standing Beast)’와 애니시 커푸어의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를 포함,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알렉산더 콜더 등의 작품이 도시를 빛내고 있다.
일상의 오브제를 대형 스케일로 과장하는 스타일로 유명한 클라스 올든버그는 야구 사랑이 유별난 시카고를 위해 ‘야구배트(Batcolumn)’ 조형물을 설치했다.

‘피카소의 원숭이’로 불리는 시카고의 첫 공공미술. 그 재미있는 형상 때문에 어린이들이 관심을 보이며 올라타서 논다.<BR> 미술이 공공장소로 나온 것과 그걸 만지고 타고 놀 수 있는 것이 또 다른 차원의 예술적 힘이다.<BR>/박진배

‘피카소의 원숭이’로 불리는 시카고의 첫 공공미술. 그 재미있는 형상 때문에 어린이들이 관심을 보이며 올라타서 논다.
미술이 공공장소로 나온 것과 그걸 만지고 타고 놀 수 있는 것이 또 다른 차원의 예술적 힘이다.
/박진배

그중 특별한 작품은 피카소가 도시를 위해 기증한 조각이다.
1967년 제작된 시카고의 첫 공공 미술로, 원래 제목은 없지만 시민들은 ‘피카소’, ‘피카소의 원숭이’로 부른다.
작품을 공개하던 날, 베일을 벗기자 대부분 참가자들은 실망하며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피카소의 특징이 표현된 예술품을 기대했는데 다소 기괴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야구배트(Batcolumn)’ 조형물. 일상의 오브제를 대형스케일로 만드는 스타일로 유명한 클라스 올든버그가 야구 사랑이 유별난 시카고를 위해 만들었다.<BR>/박진배

‘야구배트(Batcolumn)’ 조형물. 일상의 오브제를 대형스케일로 만드는 스타일로 유명한 클라스 올든버그가 야구 사랑이 유별난 시카고를 위해 만들었다.
/박진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조각의 재미있는 형상 때문에 어린이들이 관심을 보이며 올라가 미끄럼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오래전 이곳을 처음 방문하던 날도 몇몇 아이들이 조각품에 올라타고 있었다.
부모는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오히려 경찰이 다가와 “올라가도 괜찮다”며 안심을 시켰다.
흐뭇한 장면이었다.
공공장소로 나온 미술, 그리고 그걸 만지고 타고 놀 수 있는 것, 이건 또 다른 미술의 확장이다.
사람들 마음에 어떻게 다가오느냐가 미술 감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장 뒤뷔페의 ‘서있는 야수(Standing Beast)’. “블렌더 안에서 해체되는 스누피”의 모습이라는 별명을 지닌다.<BR>/박진배

장 뒤뷔페의 ‘서있는 야수(Standing Beast)’. “블렌더 안에서 해체되는 스누피”의 모습이라는 별명을 지닌다.
/박진배

시카고 다운타운의 공공미술. 멋진 건축과 도시의 단정함, 그리고 걷기 좋은 환경을 배경으로 시카고의 공공미술은 빛난다.<BR>/박진배

시카고 다운타운의 공공미술. 멋진 건축과 도시의 단정함, 그리고 걷기 좋은 환경을 배경으로 시카고의 공공미술은 빛난다.
/박진배

미술관 밖에서 만나는 미술은 기대하지 않은 선물과 같다.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아름다운 경치, 또는 짧지만 좋은 공연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시카고의 공공 미술이 빛나는 이유는 멋진 건축과 도시의 단정함, 그리고 걷기 좋은 환경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천루 사이를 통과하는 쾌적한 바람은 건조한 도시의 이미지를 야외 미술관으로 바꾸어 준다.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나한테 오는 것, 예술은 장르와 공간을 넘나들 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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