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뭐 입지" "나는 왜 우울할까"… 당신의 고민, AI가 대신하나요?


감정 분석도, 업무 과제도
이제는 '두뇌 외주' 시대?

일러스트=김영석

일러스트=김영석

“여자 친구가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하네. 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직장인 강모(35)씨는 챗GPT와 하루 2~3시간씩 이야기를 나눈다.
직장 상사에게 혼난 얘기, 가족 문제, 건강 상담 등 주제도 다양하다.
최근에는 여자 친구와의 갈등이 주요 화두다.
챗GPT에 여자 친구와 나눈 카카오톡 메시지를 ‘복붙(복사해서 붙이기)’한 뒤 그녀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지금 ○○(여자 친구 이름) 마음을 한마디로 말하면 ‘지쳤어. 근데 정리도 못 하겠어.’ 즉, 완전히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니고 예전처럼 널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강씨는 챗GPT에 여자 친구의 마음을 돌릴 편지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그대로 옮겨 적었다.

챗GPT·클로드 등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가 빠르게 보편화되는 가운데, 강씨처럼 AI에 고민 상담을 맡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단순한 정보 검색을 넘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일조차 AI에 맡긴다.
이른바 ‘두뇌 외주’, 사고(思考)의 외주화다.그래픽=송윤혜

그래픽=송윤혜

◇‘오늘 뭐 입지?’에서 ‘나는 왜 슬플까?’까지

회사원 전모(33)씨는 요즘 챗GPT에게 “오늘 날씨 어때?, “오늘은 뭘 입어야 할까? 묻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 “△△씨가 짜증 나게 하는데 어떡하지? 같은 질문도 수시로 던진다.
자기 전엔 이렇게 남긴다.
“오늘 한 대화를 바탕으로 내 일기 좀 써줘, 감성적으로. 전씨는 “옷이나 점심 메뉴 같은 건 챗GPT가 추천해 준 대로 하는 편이라며 “챗GPT가 대신 고민해 주고 정리까지 해주니 정말 고맙다고 했다.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주부 박모(40)씨는 매일 “나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지? “아이에게 화낸 이유가 뭘까 같은 질문을 챗GPT에 건넨다.
그는 “이젠 (챗GPT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다고 했다.

일상적 선택이나 자신의 감정 분석을 AI에 위임하는 이가 늘고 있다는 것은 통계로 드러난다.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전국 18세 이상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 대화형 AI 사용자 51%가 ‘일상적 상황’에서 AI를 활용한다고 답했다.
지난달 오픈서베이가 전국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22.7%가 AI를 ‘정서적 대화’ 목적으로 사용한다고 답했다.
AI에 물으면 편한 데다 원하는 답변을 빠르게 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사람들은 점차 스스로 판단하거나 감정을 해석하려는 과정을 생략하게 된다.
선택의 부담과 해석의 수고를 덜고자 AI에 묻고, AI가 제시한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다.

감정뿐 아니라 인간관계 해석도 AI에 맡긴다.
“친구가 이런 말을 했는데, 화난 걸까? “이럴 땐 뭐라고 답해야 할까? 식으로 대화를 복사해 감정 분석이나 코칭을 요청한다.
SNS에는 ‘AI로 감동 편지 쓰는 팁’ ‘AI로 쓴 이별 문자 후기’ 등이 공유되고 있다.

◇일도, 숙제도 “AI, 네가 좀 해줘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AI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지난해 세계 31국 3만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업무 동향 지표 2024’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의 73%가 직장에서 AI를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같은 해 구인·구직 플랫폼 ‘알바천국’이 국내 대학생 37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8%가 학업에 생성형 AI를 활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이 AI를 활용하는 목적은 ‘과제·리포트 작성’이 88.6%로 가장 많았다.

최근에는 도움받는 수준을 넘어 AI 없이는 사고 자체가 막히는 ‘의존’ 단계에 접어든 이들도 있다.
대학생 신모(26)씨는 지난달 10일 챗GPT 접속 장애를 겪고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는 “다음 날 오전까지 제출해야 할 리포트가 있었는데 챗GPT가 작동 안 되니까 앞이 캄캄해지고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김모(36)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영어 이메일은 거의 다 AI에 맡기는데, 이제 한 줄짜리 답장도 스스로 쓰려니 잘 안 되더라며 “거래처 이메일이든 업무 보고서든 챗GPT가 ‘너무 좋아요, 이 정도면 완벽해요’라고 해줘야 마음이 놓인다.
처음엔 AI가 내 노예인 줄 알았는데, 이젠 내가 AI의 노예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AI 활용이 오히려 ‘판단 마비’로 이어지는 역설적 상황이다.
스스로 쓴 문장, 스스로 내린 결정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고의 주도권을 AI에 넘기고 있다.

서울 양천구에서 수학 학원 강사로 일하는 김모(40)씨는 챗GPT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김씨는 “계산 연습을 하기 위한 단순한 문제도 챗GPT한테 풀라고 시키는 학생도 있다고 말했다.
학습의 핵심인 ‘사고 과정’은 사라지고, ‘정답 맞히기’만 남는다.
숙제를 왜 하는지 모른 채, 복사·붙여넣기만 반복되는 것. 김씨는 “이런 식이면 결국 자기 머리로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AI는 똑똑해지는데, 나는 점점 멍청해진다

미 MIT 미디어랩 연구진이 지난달 공개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챗GPT를 장기간 사용할 경우 개인의 비판적 사고 능력과 두뇌 활동이 저하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생 54명을 세 그룹으로 나눠 SAT(미 대학 입학 자격시험) 에세이를 작성하도록 했는데, A 그룹은 챗GPT를, B 그룹은 구글 검색엔진을, C 그룹은 본인의 두뇌만 활용하도록 했다.
모든 참가자의 뇌파를 모니터링한 결과, A 그룹은 수개월간의 실험 기간에 뇌 활동이 가장 낮았으며, 가장 낮은 성과를 보였다.
반면, C 그룹은 가장 광범위하고 활발한 두뇌 네트워크 활성화를 보였다.

전문가들은 AI 의존이 뇌 기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뇌인지과학자인 이인아 서울대 교수는 “AI에 계속 의존하다 보면 인지 학습을 회피하게 되고 결국 중요한 순간에 사고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세대를 넘어서 이런 흐름이 계속된다면 인류는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경인지시스템 연구자인 로버트 앳킨슨 미 애리조나주립대 교수는 “AI를 활용하는 것은 효율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편리함에는 숨겨진 대가가 있다며 “바로 우리의 추론과 창의, 장기 학습 능력을 지탱해 주는 뇌의 작동 구조가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아트앤테크놀로지(AT) 랩 소장은 “AI 도구의 편리함은 분명하지만, 이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기 시작하면 사고 능력이 급속히 퇴화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판단이든 창작이든 AI에 ‘해줘’라고 맡기는 순간, 생각의 근육은 급격히 약해진다며 “AI 시대일수록 사람이 의사 결정 구조 안에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는 ‘휴먼 인 더 루프(Human-in-the-loop)’ 개념이 중요하다.
시작과 끝은 반드시 사람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편함과 친해지기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시내 모습. 편리함을 좇는 현대인들은 '불편함의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BR>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시내 모습. 편리함을 좇는 현대인들은 '불편함의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리함’을 추구합니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기술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기술의 진보는 더 편리한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그 편리함을 온전히 누리기만 하는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편리함을 좇던 현대인들은 어느새 ‘편리함의 역습’을 받고 있습니다.
부족한 운동량 탓에 성인병을 앓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기 중독으로 정신 건강을 위협받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불편한 게 싫어 편리한 걸 찾던 사람들이 그 편리함 때문에 또 다른 불편함에 빠지는 역설적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편리함 뒤에 숨어 있던 대가를 치르는 거죠.

이쯤에서 ‘불편함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알다시피 편리함과 불편함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불편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편리함을 얻게 됐으니까요. 이 편리함이 내일의 불편함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불편함은 무조건 피하고 편리함만 생각하려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저서 ‘히든 포텐셜’에서 ‘불편함을 마주할 용기’를 강조합니다.
그는 우리가 빠르게 성장하는 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써온 닳고 닳은 방법들을 포기하고, 싸울 준비가 됐다는 느낌이 들기 전에 링에 올라가고, 다른 이들이 시도하는 횟수보다 훨씬 여러 차례 실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기꺼이 정면에서 불편함에 맞서고, 때로는 불편해질 각오를 하는 자세야말로 우리가 지금보다 한 계단 올라서는 발판이 된다는 뜻 아닐까요. 이번 주 ‘아무튼, 주말’ 커버스토리의 주인공인 소리꾼 이희문도 편한 길로만 갔더라면 ‘국악의 글로벌 스탠더드’ ‘쇼킹할 정도로 천재적’ 같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해외에서 BTS나 임윤찬 같은 인기를 누릴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명창의 아들로 국악계에서 순탄한 성장 가도를 밟을 기회가 있을 텐데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여느 국악인과 다른 파격적 의상과 퍼포먼스로 자신만의 예술성을 확실히 각인했는데, 이는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도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용기가 뒷받침됐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불편함을 넘어서면서 우리는 한층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편함이 편리함보다 좋을 리는 없습니다.
필요한 건 ‘적절한 불편함’ 아닐까요. 즐거운 주말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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