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중략)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1941. 11.
폭염과 폭우로 이어지는 계절의 압박이 힘겹다.
정신의 압력이 분노로 이어지는지 근친 간의 끔찍한 사건까지 일어나 우리를 지치게 한다.
질곡의
여름에서 벗어나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밤을 보고 싶다.
가을은 자연이 여전히 인간의 친근한 벗임을 일깨워 주는 계절이다.
윤동주의 가을 시편을 미리 읽으며 더위에 지친 우리 마음을 달래 보자.
첫 행에서 윤동주는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썼다.
참으로 멋진 구절이다.
시인의 눈은 하늘에 ‘계절’이
지나가는 모습과 ‘가을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을 포착한다.
시인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눈을 감고도 생생한 가을을 선명히 볼 수 있다.
이 짧은 두 줄만으로도 우리는 이 시의 자력에 끌리게 된다.
윤동주는 “아무 걱정도 없이” 별을 셀 수 있다고 했다.
가장 순수한 계절인 가을에, 가장 순수한 존재인 별을 세는 행위에 몰입해 가는 황홀한 순간을
표현했다.
아침이 오면 별은 사라지지만, 내일 밤이 오고 다시 별을 셀 수 있는 청춘의 시간이 이어지기에 순수한 정화의 체험도 지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가을 밤의 별을 세며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하나 호명한 후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에 몸을 떨며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라고 썼다.
별빛이 내린 언덕은 순수한 존재가 깃들 수 있는 공간이다.
자신이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 그 언덕에 내려앉을 자격이 있다.
그 언덕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어서, 이름을 흙으로 덮어 버렸다고 했다.
윤동주는 이 언덕에 봄이 올 것을 상상하면서, 자신이 있는 장소를 ‘나의 별’이라고 불렀다.
‘나의 별’이라니? 밤하늘의 별을 가까이 끌어들여
자신이 존재하는 이곳을 ‘별’이라고 생각했다.
놀라운 인식의 전환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이 묻힌 언덕에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이라고 했다.
부끄러워 덮어 버린 이름이 먼 미래의 어느 날 자랑스러운 존재로 소생하는 것. 이것이 윤동주가 자신의 별에 건 희망이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그 어둡고 긴 겨울을 견뎌내도록 만든 마음의 동력일 것이다.
이후에 전개된 윤동주의 삶을 보면 이 시가 거의 예언적 상징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해방 전 차디찬 감옥에서 죽었고 북간도의 무덤에
유해가 묻혔다.
해방이 되면서 그의 시집이 출간되어 작품이 알려지자, 이름자 묻힌 언덕에 잔디가 돋아나듯 그의 자랑스러운 이름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렇게 그의 희망은 현실이 되었고, 암흑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빛은 오늘을 밝히는 별이 되었다.
답답한 열기에 짓눌린 우리 마음에 윤동주의 아름다운 시들이 별처럼 내려앉아, 희망과 사랑의 빛을 피워내길 간절히 바란다.
윤동주의 ‘자화상'은 송몽규를 모티브로 쓴 시다.
어두운 세계에서 영혼 통해 저항했던 윤동주
윤동주를 저항 시인이라고 하지만 그의 시만 놓고 보면 고민하고 부끄러워하는 내성적 성향이 두드러져서 저항시다운 강인한 느낌은 별로 얻을 수 없다.
작품의 문맥만 놓고 보면 ‘간’과 ‘쉽게 씌어진 시’ 정도를 저항시로 읽을 수 있다.
윤동주를 저항 시인으로 일컫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의 옥사에 있다.
옥사에 이른 세부적 사항이 문서로 남아 있어서 그가 지녔던 항일 민족 의식의
단면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송몽규, 윤동주와 관련하여 일본의 특별 경찰 문건에 ‘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기록이 남아 있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3년 7월 검찰에 송치되고 1944년 2월에 기소된 후 재판받은 판결문에 두 사람의 활동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러 가지 증거 자료에 의해 두 사람에게 2년의 실형이 선고된 것이니, 윤동주가 항일 민족의식을 지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재론할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의 시에 이러한 의식이 얼마나 표현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시는 자유가 억압된 상황에서 부조리한 현실에 괴로워하며, 어두운 세계에서도
순수한 영혼을 지키려고 애쓴 지식인의 고뇌를 보여준다.
정신을 행동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부끄러워하며 그 심정을 정직하게 시로 표현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행동으로 저항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뇌하는 영혼으로 시대에 저항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행동적 저항시가 아니라 내면적 저항시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다.
윤동주에게 죄책감·부채 의식 가졌던 일본인들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교수,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
일본의 지식인 중에 윤동주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이 많다.
가해자의 처지에서 윤동주에게 가지는 죄책감과 속죄의식이 그러한 경향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가 하면 순수한 학문적 관심으로 윤동주의 행적을 연구한 학자도 있다.
전자의 문인으로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를, 후자의 학자로 오무라 마스오(1933~2023)를 들 수 있다.
오무라 마스오는 와세다대 교수로 있던 1985년 4월 중국 옌볜대학에 연구원으로 파견되어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공안
당국의 허락을 받아 룽징현에 있는 옛 동산교회 묘지를 답사하여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이어서 용정 지역에 남아 있는 윤동주 관련 유적을 답사하여 사진을 찍고 학적부 등의 자료를 복사했다.
그뿐 아니라 윤동주가 다닌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의 학적부와 성적표를 입수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은 정식 수교를 이루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료는 국내 윤동주 연구에 큰 자극이 되었다.
이 선행 자료를 바탕으로 윤동주 연구가 본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전후 일본인들의 상실감을 드러내면서 비판적인 시각에서 과거를 성찰한 지성파 시인이다.
참신하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여성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윤동주 시인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국 시 번역에 많은 업적을 남겨 요미우리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산문집에 ‘윤동주’라는 제목의 글을 수록했는데, 이 글이 1990년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산문에는 윤동주의 시 다섯 편이 인용되어 학생들이 윤동주 시를 직접 감상하면서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일이 일본에 ‘윤동주 현상’을 일으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판을 거듭하면서 내용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이 교과서는 지금도 간행되어 일본 대중에게 윤동주를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