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잘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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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노래를 잘하고 싶어 한다.
모임 자리나 노래방에서 적어도 한 곡쯤은 제대로 노래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막상 노래를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따지면 참 모호하다.
어떤 이는 가창력 좋은 '고음 깡패'에 감동하지만, 다른 이는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음정·박자가 정확하다고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쩌는 음색'은 악보적 정확성을 넘어 목소리만으로 마음을 건드린다.
'듣기의 철학'(곰출판 펴냄)에서 정경영 한양대 교수는 요즈음 잘 부르는 노래의 기준이 가창력에서 쩌는 음색으로 옮겨가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이 말은 2010년 무렵 쓰이기 시작해 2017년께부터 널리 사용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듣고 소셜미디어에서 의견을 교환할 때 쓰이던 언어가 퍼진 것 같다.
'3단 고음'으로 열창하는 가창력 좋은 가수들과 비교해서 '독특하고 고유한 소리'로 즉각 귀에 꽂히는 노래를 들려주는 가수들을 평할 때 주로 이 말을 쓴다.
정 교수는 롤랑 바르트의 페노송(pheno-song)과 제노송(geno-song) 개념을 빌려 쩌는 음색의 실체에 접근한다.
페노송은 '노래를 부를 때 지켜야 할 여러 규칙, 관습, 약호 등'을, 제노송은 '아직 정형화하지 않은 노래의 육체성'을 뜻한다.
바르트는 제노송을 '목소리의 결정(grain)'이라고 한다.
풍성한 노래로 자랄 수 있는 목소리의 씨앗이다.

이런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 '즉각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심는다.
우리는 그걸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각하고 느낄 수는 있다.
이는 손 글씨를 읽을 때 내용보다 먼저 글쓴이의 상태, 기분, 마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다.
'쩌는 소리'는 제노송의 경험, 즉 음악 이전의 소리를 느끼는 것, 듣는 이의 몸으로 먼저 다가오는 음악 경험을 뜻한다.
쩌는 음색을 평가하는 이들은 주로 MZ세대 청년이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휴대전화 같은 모바일 재생기기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어왔다.
이러면 음악이 양쪽 귀 주변을 맴돌아 '소리와 신체가 하나 된 것 같은 경험' '소리 속에 내가 안겨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러니까 쩌는 음색이란 이어폰이 빚어낸 음악적 경험이다.
이들은 오랜 훈련을 거쳐 누구나 인정할 만한 수준에 달한 가창력 달인의 노래보다 이어폰으로 듣는 듯한 노래, 한순간 내 귀를 사로잡고 마음을 파고드는 개별적이고 신체적인 노래를 들려주기를 원한다.
잘 부르는 노래는 이처럼 세대마다, 환경마다 다르다.
지금은 나의 독특한 개성을 담는 것이 더 중요한 때가 됐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문자주의의 덫을 넘어서

고전 해석 한가지만 고집땐본뜻 왜곡되고 갈등 불씨돼오늘날 던지는 질문이 뭔지다함께 고민하고 해석할 때더나은 공동체 만들 수 있어

김학철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김학철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몇 해 전, 한 건강기능식품 광고가 동양의학의 한 고전을 인용하는 것을 보고 현대 의학의 검증 없이 그 고전의 권위에만 기대어 효능을 선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취지의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쓴 적이 있다.
이 글에 한 팔로어가 '당신이 누구이기에 감히 이 위대한 고전을 함부로 평하느냐'는 식의 신랄한 댓글을 달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 책은 아시아 의학사에 우뚝 솟은 위대한 고전이다.

하지만 그 책을 글자 그대로 따른다면, 내가 앓고 있는 천식을 고치기 위해 비소(砒素) 화합물이 든 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
그 고전이 품고 있는 생명 존중의 정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철학,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끊임없이 발전을 모색한 연구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계승해야 할 진정한 가치다.
반대로 특정 처방을 글자 그대로 적용해 수은이나 비소를 써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고전의 위대한 정신을 거스르는 일이다.

이는 비단 의학서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를 들어 과학계의 고전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윈은 DNA를 몰랐고, 지동설을 주장하기 위한 갈릴레이의 논증은 부정확한 점이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그 책이 고전으로 필독서인 이유는 그 책의 과학사적 가치와 이후 과학 연구의 방향을 설정한 데에 있다.
만약 누군가 대학 교재로 그 두 책을 채택해서 진화와 천문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다윈과 갈릴레이를 존경하는 과학자도 이에 반대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분열과 갈등의 중심에 놓인 종교와 이념을 다루는 고전을 향한 우리의 태도 역시 새삼스럽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의 정신사에 결정적으로 공헌해 온 종교 경전이나 이념의 원전(元典)들은 우리 시대의 자산이자 권위의 출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고전이 특정한 역사적·문화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고전이 오늘 이곳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숙고해야 하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만 고전의 참된 가치가 발현될 수 있다.
나는 이를 위해 고전 앞에 책임감 있는 건강한 '해석의 공동체'가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며 해석의 방향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공동체는 고전을 비롯한 과거와 현재의 권위들을 향해 '인류 보편의 사랑을 증진시키는가? 우리 공동체의 조화와 신뢰를 드높이는가? 나아가 지속가능한 미래에 기여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치열하게 던지고 답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의 목소리는 막강하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삶의 닻을 내릴 근거마저 흔들린다면 그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 불안과 두려움의 순간에, 문자주의적 태도가 원전의 본뜻을 가장 극적으로 왜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자주의는 자신의 두려움과 고정관념에 따른 해석만을 유일한 진리라 고집하는 지적 나태이자 위험한 독선이며, 극단주의의 뿌리이다.
결국 그들은 고전을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만다.
이와 같이 될 때 사회의 갈등은 되돌이킬 수 없게 된다.
고전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박제된 문자에 갇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안에 담긴 깊은 정신과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끊임없는 해석의 여정에 있다.
보편적 가치를 탐구하는 열린 '해석의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문자의 덫에서 벗어나 더 나은 공동체의 미래를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김학철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돈은 심리학이다

돈 모을까 쓸까 끝없는 고민그 속엔 불안·공포 등 내재돈의 흐름은 가치관의 흐름'돈을 통제하나, 돈이 통제하나'질문의 답이 삶의 질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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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분명 숫자다.
플러스가 있고 마이너스가 있는 산술의 영역이다.
그러나 실제로 돈을 다루는 순간, 수학적 계산은 의외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돈의 세계는 언제나 심리학의 세계다.
우리는 돈을 다루면서 반복적으로 '통제의 문제'에 부딪힌다.
모아야 하는가, 써야 하는가, 빚을 갚아야 하는가, 더 벌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의 이면에는 단순한 자산 관리가 아니라 불안, 공포 그리고 통제 상실의 두려움이 자리한다.
정신분석적으로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을 넘어선다.
돈은 항문기적 상징을 강하게 띤다.
배변 조절을 통해 얻은 최초의 자율성과 통제 경험이 성인의 돈 문제에 깊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두쇠가 되어 돈을 쥐고 놓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흥청망청 돈을 흘려보내며 통제력을 과시하지만 아이러니하게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현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쇼핑 중독'에는 만족과 불안, 쾌감과 공허가 뒤섞여 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덧붙이고 싶다.
한 어린아이가 변기에 똥을 누고 물을 내리는 순간, 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걸 보고 크게 당황한 적이 있다.
아이에게 똥은 자기 일부였기 때문이다.
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는 것을 본 아이는 '내 일부가 없어졌다'는 상실감을 느낀다.
어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지만, 배변 훈련 중인 아이에게는 변기에 앉는 일부터 배설 그 자체 그리고 배설물이 처리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당황하는 아이에게 "네 똥이 다른 똥들과 만나 잘 지내고 있을 거야"라는 설명을 하니 그제야 아이는 안심하며 "안녕" 하고 떠나보낼 수 있었다.
돈을 잃을 때 느끼는 우리의 불안도 이와 닮아 있다.
돈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내 일부, 내 노동과 시간, 내 존재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맥락에서 배설물과 돈을 연결했다.
대변은 아이가 처음으로 세상에 줄 수 있는 선물이자, 쥐고 있을 수도 있는 최초의 재산이다.
그래서 아이는 배설물을 금이나 돈처럼 귀중한 것과 동일시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돈은 더럽다.
만졌으면 손 씻어"라고 말할 때도 단순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오염됐다는 뜻만은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돈을 배설물과 동일시하는 흔적이 배어 있다.
돈을 손에 쥐며 불편함이나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곧 배설물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의 연장선이다.
그래서 돈에 대한 집착, 혐오, 불안은 단순히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무의식의 구조와 이어져 있다.
또 어느 때는 든든한 포만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지갑에 두둑한 지폐를 보거나 만지며 자신도 모르게 웃게 될 땐, 돈은 마음의 자양분이자 강력한 보호막 역할까지 한다.
돈의 흐름은 결국 내 가치관의 흐름이다.
내가 돈을 버는 능력은 자존감과 존재감에 직접 연결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돈 문제로 고통받을 때 "적게 가져도 얼마든지 만족하며 살 수 있어"라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고 공허하게 들린다.
자족(自足), 즉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은 매우 훌륭한 삶의 태도지만, 단순한 자기 암시만으로는 터득하기 어렵고 대개 고된 수련 과정을 필요로 한다.
자족을 배우는 데는 돈 버는 기술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든다.
시간, 성찰, 때로는 고통스러운 자기 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변기 속 상실 불안처럼, 돈을 잃는 경험은 내 일부를 상실하는 듯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불안을 견디고 돈의 의미를 사회적 관계와 교환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돈에 휘둘리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돈을 통제하는가, 아니면 돈이 나를 통제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한다.
[성유미 정신분석가·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부대껴야 알 수 있는 것들

강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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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다섯 살, 두 살 조카들과 오랜만에 시간을 보냈다.
아직 아이가 없는 탓에 아이들이 그렇게 통제할 수 없는 존재인지 몰랐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둘째는 카페 실내를 집 앞마당인 양 뛰어다녔다.
잠깐 동안 조카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내 주요 임무는 조카가 돌아다니면서 넘어뜨린 물건을 바로 세우며 '죄송합니다'를 연신 외치는 것이었다.
좀 컸다 싶었던 첫째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둘째가 태어난 뒤로 부쩍 눈물이 많아진 첫째는 장내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치는 바람에 어른 두 명의 돌봄을 필요로 했다.
조카들과의 그 '진한' 시간 이후 나는 어느 공공장소에서도 아이들과 씨름하는 부모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들이 보내고 있을 전쟁 같은 시간을 알기 때문에 내 눈길로 그들에게 부담을 더하고 싶지 않아서다.
세상에는 이렇게 부딪히고 겪어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다.
결혼하고 처음 남편과 살림을 합쳤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남편이 쓰던 냄비나 프라이팬, 가위는 주로 두껍고 무거운 것이 많았다.
가열하는 데도 오래 걸리고 음식이 담겨 있으면 한 손으로 옮기기도 힘든 이 식기들을 굳이 왜 쓰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두꺼운 프라이팬에 고기를 익히니 겉과 속이 고루 익는 마술을 맛봤다.
육중한 가위는 지렛대의 힘을 극대화해 벌건 생고기마저 싹둑싹둑 잘라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세상을 넓히는 경험은 이렇게 긴 시간을 다른 사람과 함께하며 부대껴야만 할 수 있는 것 같다.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되고 심지어 충격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한 사람의 삶이 더 비옥해진다.

우리 사회는 서로 다른 집단이 더 잘 부대낄 수 있는 사회가 돼가는지 자문해본다.
얼핏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살면서 나와 다른 성향과 배경을 지닌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비슷한 동네에서 태어나 비슷한 학교에 가고 비슷한 직장에 취직한다.
동질성이 좀 더 심한 동네에서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태어난 친구들이 같은 학교를 가고 같은 운동시설, 식사시설을 이용한다.
어떤 아파트에서는 주민들끼리 자녀들의 만남을 주선해 결혼까지 한다니 말 다했다.
1인 가구가 늘고, 결혼·출산이 점점 더 인기 없는 선택지가 되면서 과거에는 개인의 삶에 당연히 있었을 중요한 부대낌의 결절점도 사라졌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출퇴근길, 직장에서 늘 '비자발적 부대낌'에 고통받고 있어 개인적인 맥락에서만이라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선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상과 인생에서 나의 곁을 내주는 건 어쨌든 일종의 충격과 '다른 결'을 또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충돌을 차단하는 건 어쩌면 나의 세상이 그만큼 넓어질 수 있는 기회를 원천 차단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생을 조금은 더 풍부하게, 다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경험을 놓치는 것이다.
고루 익은 고기와 깊이 끓은 찌개처럼 뜻밖의 수확을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다짐해본다.
삶에 조금 더 많은 부대낌을 허용해보겠다고.[강인선 경제부 기자]

21세기의 면죄부

신헌철 기자

대통령 사면권 무제한 행사정권 바뀌면 전리품 전락사면심사委 거수기 노릇최소한의 견제 장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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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신권(神權)과 왕권(王權)은 죄를 면해주는 권한을 놓고도 경쟁했다.
가톨릭교회는 십자군전쟁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시작했다.
몇 세기가 지나 교회 재정이 악화하자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았다.
동전이 금고에 떨어지면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설교했다.
이런 행태는 16세기 종교개혁의 방아쇠가 됐다.
왕들은 전쟁 포로나 반역자를 사면하며 권력을 자랑했다.
내세가 아닌 현생의 사면권은 군주의 독점 권한이었다.
사면은 태생부터 자비심의 발로가 아니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21세기 민주국가에서 사면권이 살아남아 있는 이유도 그 연장선에 있다.
우리 헌법도 79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미국과 달리 탄핵당한 사람에 대한 사면도 가능하다.

특정한 범죄 전체에 대해 형벌을 면하는 일반사면은 국회 동의가 필요하지만, 특정인에게 부여하는 특별사면은 국무회의 심의만 거치면 된다.
법무부 사면심사위원회가 2007년 설치됐지만 거수기 노릇에 그친다.
심사위원회 속기록은 무려 5년이 지나야 공개된다.
알량한 속기록마저 정권 임기가 끝나야 볼 수 있다.
그래서 한국 대통령의 특별사면권은 무소불위의 권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8·15 광복절 특사를 보며 주권자는 국민이라는 착각에서 빠져나왔다.
최소한 사면에 관해선 대통령이 유일한 주권자였다.

권력이 손바뀜할 때마다 사면은 승자의 전리품이 된다.
이런 행태는 사법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삼권분립을 경시하게 만든다.
진영 갈등을 키우는 배경이기도 하다.
어느 정권이든 그렇게 해왔다는 양비론으로 넘어갈 일은 아니다.
모든 권력 행사에서 과거와 달라야 '국민주권정부'라는 네이밍에 대해 떳떳할 수 있지 않을까.이번 광복절 사면에는 아무런 설명서가 없다.
그저 국민 통합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 사면 영향으로 대통령 지지율은 급락했다.
그 정도 손해를 감수하고 사면할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조국은 감옥에, 자신은 권좌에 오른 것이 찜찜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심은 크게 써야 궁한 사람이 잊지 않는다.
조 전 대표에게는 이재명 대통령의 은혜를 입었다는 낙인이 찍혔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둬 진보의 항구적 기반을 만들려는 의도도 있다고 본다.
그 작업에는 조국이 필요하다.
여권의 원심력을 제어하는 데도 보탬이 된다.
조 전 대표는 출소 직후 현실정치 복귀를 선언했다.
정치적 성과로 사면의 효용성을 보여주겠다고 외쳤다.
선거에서 이기면 사면을 넘어 완전한 면죄부를 받는다고 믿는 듯하다.
이 와중에 국민의힘은 '물타기'의 조력자를 자처하는 우를 범했다.
비상대책위원장은 뇌물과 횡령으로 중형을 받은 인사들을 사면해달라고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텔레그램을 보냈다가 망신을 샀다.
절제된 사면에는 순기능이 있다.
미래를 위해서도 사면권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대통령은 중세의 왕이 아니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은 아끼고, 또 아껴서 써야 한다.
더불어민주당도 전임 정권 때 사면권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여러 법안을 냈다.
사면심사위원회의 일부 인원은 국회가 추천하고, 위원회 속기록은 즉시 공개하자는 취지다.
대통령 본인과 직접 관련된 인물, 탄핵으로 파면된 경우는 제외하자는 법안도 있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사면권을 견제할 최소한의 장치는 꼭 필요하다.
[신헌철 정치부장]

패러다임 깨기

남기현 기자

인간이 구축한 지배적 사고패러다임은 항상 바뀐다게다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이 시대엔 순응보다 도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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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주류 가치관이다.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기본 틀이다.
패러다임은 항상 바뀐다.
예컨대 중세 과학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해석하는 학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신의 영역에 맡겼다.
하지만 17세기 뉴턴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만유인력과 중력 법칙을 규명했다.
과학의 패러다임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뉴턴의 운동법칙은 결정론적 가치관을 낳았다.
원인(힘)에 의해 결과(운동)가 결정된다.
물체의 상태(위치·운동량)를 알면 이 물체의 향후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우주만물이 결정론적이라면 인간의 생각 역시 물리법칙에 따라 미리 정해진 결과물이다.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설 자리가 없었다.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시간은 항상 같은 속도로 흐른다.
중력이 지배하는 공간엔 변함이 없다.
이른바 절대시간, 절대공간이 진실이다.

19세기 맥스웰은 '빛이 전자기파'임을 증명했다.
뉴턴이 보이지 않는 힘(중력)을 규명하고 맥스웰이 빛의 정체까지 밝혀냈으니 당시 과학계에선 "할 건 다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얘기가 퍼졌다.
뉴턴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은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을 절대진리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 철옹성이 20세기 아인슈타인에 의해 깨진다.
그는 금속에 빛을 쬘 때 전자가 튕겨나가는 이른바 '광전효과' 연구로 노벨상을 탔다.
빛이 파동(전자기파)일 뿐만 아니라 무수한 알갱이(광자)로 구성된 '물질'임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또 특수·일반 상대성이론으로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었다.
일정하게 흐르는 줄로 알았던 시간이 상대적으로 흐른다.
게다가 중력에 의해 공간이 휘어진다.
이젠 절대시간·절대공간 따윈 없다.
더 나아가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양자물리학은 '결정론'이 아닌 '불확정성 원리'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극시켰다.
원자 주위를 맴도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운동량)는 오직 확률로만 알 수 있다.
물체의 상태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결정론적 사고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로써 300년 가까이 군림했던 고전 물리학의 시대가 저물었다.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신본주의는 르네상스를 거쳐 인본주의에 주류 자리를 내줬다.
그동안 종교에 속았으니 이젠 깨어나자는 의미의 '계몽주의'가 확산됐다.
인간 이성이 신의 자리를 꿰찼다.
지금은 아예 인간도 동물과 다를 게 없다는 진화론의 시대다.
인본주의와 진화론 핵심은 '신의 흔적' 지우기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진화론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 화학진화론에서 진화의 원동력이라던 '돌연변이'는 유전정보의 증가가 아닌 감소를 수반한다.
이는 해로운 돌연변이를 낳는 만큼, 새로운 종으로의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
이와 함께 고고학적 발견이 이뤄지면서 성경 속 역사가 잇달아 사실로 입증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상엔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절대진리가 분명히 있다.
반면 인간이 구축한 패러다임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현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에 주입되고 있는 다양성 주의(종교혼합·동성애 등)와 세계주의, 기후종말론, 진화론, 백신 지상주의도 마찬가지다.
지배권력은 자신들이 쌓아놓은 패러다임이 무너지지 않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그것에 반대하거나 어긋나면 이단아·음모론자로 몰아붙인다.
하지만 결국 패러다임은 바뀐다.
게다가 그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이 때문에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일은 늘 흥미롭고 뜻깊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남기현 컨슈머마켓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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