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대왕은 지옥에서 업경(業鏡), 즉 ‘업의 거울’로 망자의 죄를 낱낱이 비춰 심판하는 무서운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래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동아시아 사찰의 명부전과 지장전에서 만나는 염라의 도상이 형성되기까지는, 인도의 신화에서 출발해 초기 불교 경전을 거치고 다시 중국의 관료제와 한국의 독자적 신앙을 통과하는 길고 굴곡진 역사가 존재했다.
염라의 기원과 변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살펴본다.

야마에서 염라까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키는 자의 탄생
현대인도 한 해의 성과를 숫자와 등급으로 환산하는 연말 평가의 시기를 두려워한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불교의 명부신앙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뒤에도 일곱 차례에 걸쳐 7일마다, 그리고 100일과 1년, 3년이 되는 날까지 모두 10번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른바 시왕(十王)신앙이다.
이 피할 수 없는 평가 체계의 다섯 번째 자리, 가장 널리 알려진 심판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염라대왕이다.
염라왕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의 복잡한 내력을 증언한다.
산스크리트어 ‘야마라자(Yamarāja)’를
음역한 이 명칭은 ‘염마라사(閻魔羅闍)’, ‘염마천(閻魔天)’, ‘염마(閻魔)’, ‘염마라(閻魔羅)’ 등으로도 표기된다.
뜻으로 옮기면 ‘속박’, ‘쌍둥이’, ‘쌍둥이 왕’, ‘평등’, ‘살해’, ‘분노한 왕’, ‘억제’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얼굴을 지닌다.
이 가운데 ‘쌍왕(雙王)’이라는 의역은 그가 본래 쌍둥이였다는 인도 신화의 원형을 담고 있다.
인도의 가장 오래된 문헌인 『리그베다』에 따르면 야마는 태양신 비바스바트(Vivasvat)와 사란
(Saraṇyū)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쌍둥이 여동생 야미(Yamī)를 뒀다.
고대 인도 신화에 따르면 야미는 오빠에게 강렬한 유혹을 건넸고, 두 사람의 결합으로 선과 악,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대립이 비로소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 야마가 인류 가운데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해, 죽은 조상들(Pitrs)이 모여 사는 저 너머의
낙원으로 가는 길을 처음으로 닦은 존재가 됐다고 전한다.
그의 궁전에는 감로(甘露)가 흐르고, 입구는 네 개의 눈을 가진 신성한 사냥개가 지켰다.
곧 초기의 야마는 죽음을 주관하되, 그 영혼들을 따뜻하게 끌어안았던 사후세계의 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의 이마(Yima), 북유럽 신화의 이미르(Ymir) 역시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존재로 보는 것이 비교신화학의 오랜 견해인데, 이는 이 신격이 얼마나 오래되고 보편적인 인류의 원형에 닿아 있는지를 방증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자애로운 낙원의 왕이 불교에 편입되는 순간, 이미 심판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앙굿따라 니까야』는 인간에게 보내진 세 가지 신의 사자(使者), 곧 ‘늙음’과 ‘질병’과 ‘죽음’을 설한 뒤, 사람이 죽으면 지옥의 옥졸이 그를 염라왕 앞으로 끌고 가는 장면을 그린다.
비구들이여, 사람이 죽으면 지옥의 옥졸이 그를 염라왕에게 데려가 이렇게 말한다.
‘대왕이시여, 이 사람은 대왕의 통치 아래에서 불의(不義)를 행하고 정의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
그때 염라왕은 그 사람에게 묻는다.
‘너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인간이 법(法)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듣지 않았느냐.’
『쌍윳따 니까야』에 이르면 이 문답은 한층 더 불교의 업설(業說)과 밀착한다.
영혼이 염라왕
앞에 이르면, 왕은 “너는 인간 세상에서 자신의 업에 따라 그 결과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느냐”고 묻고,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면 “네가 생전에 들었던 모든 불법(佛法)을 기억하지 못하고 악업을 쌓았으니, 네가 가야 할 곳은 지옥이다”라고 선고한다.
낙원의 왕이 심판자로 넘어가는 이 과정은, 후대 부파불교가 정교한 이론으로 완성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초기 경전 속에서 예비돼 있었던 셈이다.

선악을 새기는 두 그림자, 구생신(俱生神)
그런데 업의 인과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집행하려면, 먼저 그 업을 낱낱이 기록하는 존재가 있어야
했다.
대승불교는 이 필요에서 ‘구생신(俱生神)’이라는 독특한 신격을 길러 낸다.
힌두 신화를 기록한 『가루다 푸라나』는 이미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두 신이 함께하며 그의
선행과 악행을 각각 나눠 기록한다고 노래한 바 있는데, 불교는 이 쌍둥이 서기(書記) 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약사경』은 모든 중생에게 구생신이 있어 선악을 낱낱이 기록한 뒤 이를 염라왕의 사자에게 전달한다고 설하며, 『화엄경』 역시 “사람이 태어나면 두 종류의 천신(天神)이 따라다니며 그를 보호한다.
하나는 동생(同生), 다른 하나는 동명(同名)이라 한다.
이 천신들은 언제나 사람을 지켜보지만, 사람은 그들을 볼 수 없다”고 전한다.
훗날 중국의 주석가들은 이 구생신의 형상을 한층 구체적으로 그려 낸다.
수나라의 길장(吉藏)
스님은 동생(同生)을 오른쪽 어깨 위에서 악행을 적는 여성 신으로, 동명(同名)을 왼쪽 어깨 위에서 선행을 적는 남성 신으로 설명했으며, 당나라의 징관(澄觀) 스님은 이들을 좌우 어깨 위에 앉은 동자(童子)의 형상으로 묘사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매 순간 어깨 위에서 우리의 선악을 받아 적고 있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는 상상. 이는 염라의 심판이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낱낱이 기록된 장부에 따른 것임을 못 박기 위한 정교한 장치였던 셈이다.

저승의 관청에 좌정하다
인도에서 형성된 이 무서운 심판자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전혀 다른 결을 입게 된다.
중국인들은
본래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동악(東岳) 태산으로 돌아가 태산부군(泰山府君)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믿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기 이전 시기인 한대(漢代)의 무덤에서 출토된 매지권(買地券)과 묘지명(墓誌銘)을 살펴보면, 저승이 인간 세상의 군현제(郡縣制)와 다를 바 없는 행정 관청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명부(冥府)의 관원이 호적과 세금을 관장한다는 신앙은, 인도 죽음의 신 야마가 중국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사법적 정확성과 행정 절차를 갖춘 ‘염라대왕’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토양이 됐다.
도교의 저승 관념이
여기에 짙게 스며들면서, 염라는 마침내 불교와 도교가 함께 완성한 시왕(十王) 체계 속 다섯 번째 왕의 자리로 자리 잡게 된다.
당송 시기를 거치며 염라신앙은 시왕신앙으로 한층 정교하게 체계화된다.
죽은 자는 진광왕(秦廣王),
초강왕(初江王), 송제왕(宋帝王), 오관왕(五官王), 염라왕(閻羅王), 변성왕(變成王), 태산왕(泰山王), 평등왕(平等王), 도시왕(都市王), 전륜왕(轉輪王)이라는 열 명의 대왕 앞을 차례로 지나며 49일과 100일, 1년, 3년에 걸쳐 심판을 받는데, 염라는 이 가운데 다섯 번째, 곧 죽은 뒤 다섯 번째 7일(45일째)의 심판을 주관하는 자리에 배치됐다.
염라는 본래 인도에서 저승세계 전체를 다스리던 유일한 왕이었다.
그런 그가 열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축소된 것은 중요한 전환점을 시사한다.
사후세계의 심판 체계가 당시 중국의 관료제를 닮은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방증이다.
흥미로운 것은 후대 중국에서 염라왕의 성씨가 ‘포(包)’씨로 알려졌다는 점인데, 이는 한국에서
드라마로도 널리 알려진 포청천, 즉 북송시대 청렴하고 강직한 명판관으로 명성을 떨쳤던 포증(包拯)을 가리킨다.
신화 속 추상적인 심판자보다 실제로 부패와 불의를 엄단했던 역사 속 인물에게서 더 큰 신뢰를 느꼈던 민중의 종교적 심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적 인물을 염라대왕으로 인식하는 사례는 포증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수당(隋唐)의
명장 한금호(韓擒虎), 북송의 명재상 구준(寇准), 그리고 범중엄(范仲淹)까지 이른바 ‘사대염왕(四大閻王)’으로 불리며 차례로 염라왕의 화신으로 거론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염라왕’이라는 자리가 특정 신격에게 고정돼 있지 않고, 시대마다 청렴함과 강직함이라는 가치를 대표하는 실존 인물로 끊임없이 갈아 끼워지는 유동적인 상징이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염라왕은 『불설예수시왕생칠경』에서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는다.
아난이 그 인연을 묻자, 부처님께서는 지금의 염라천자는 죄인을 엄정히 다스리며 스스로의 인연을 성숙시켜 왔기에 미래세에 반드시 성불해 보현왕여래(普賢王如來)가 되리라 예언한다.
사람들이 가장 무섭고 가차 없는 심판자로 두려워하는 그 존재는, 실은 끝없는 원력으로 보살행을 실천해 온 또 하나의 구도자였던 것이다.

『금강경』의 신봉자, 염라대왕
염라왕의 모습은 조선에 들어와 또 한 번의 변모를 겪는다.
조선의 시왕도(十王圖)는 화면
상단에 책상 앞에서 준엄히 판결을 내리는 염라왕을, 하단에는 참혹한 지옥의 집행 장면을 배치하는 이중 구도를 즐겨 구성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 화승들은 여기에 파격적인 도상 하나를 더했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시왕도에서 염라왕은 다른 명부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제왕의 관모를 쓴 모습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관모 위에 『금강경』을 얹은 형태로 바뀌었다.
이러한 도상의 뿌리는 중국 당나라 시기에 성행했던 『금강경』 영험 전승에 있다.
당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강한 설득력을 얻은 영험의 형태는 경전 독송을 통한 ‘수명 연장’의 효능이었다.
경전을 암송하는 행위는 공덕 축적으로 간주됐고, 이 공덕은 명부(冥府)에서 빌려 쓴 수명(壽命)을 갚거나 현생의 수명을 늘리는 영적 재화로 인식됐다.
그 결과 영험담 속 ‘사후 세계로부터의 귀환’ 이야기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결정적 원동력은 생전에 쌓은 『금강경』 독송의 공덕으로 귀결됐다.
생전에 『금강경』을 사경하거나 정성껏 독송한 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염라대왕이 머리
위의 경전을 받들어 형벌을 면해 주고 수명을 더해 준다는 믿음. 이 믿음은 조선에서 가장 두려운 심판관의 정수리에 가장 지혜로운 경전을 얹어 놓는 도상으로 마침내 꽃피운 것이다.
조선 불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앞서 살펴본 『불설예수시왕생칠경』의 수기(授記)에 따라
염라대왕이 미래에 ‘보현왕여래(普賢王如來)’가 되리라는 믿음은, 그를 ‘현왕(現王)’이라 부르는 별칭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명칭에는 실질적인 신앙적 효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즉 사후에 시왕에게 차례로 심판을 받으려면 보통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는 것과 달리 그중 핵심 심판관인 염라대왕에게 직접 현왕재(現王齋)를 올리면 망자가 지옥의 고통 없이 곧바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사후 3일째(삼우제 무렵) 재를 지낼 때 쓸 목적으로 현왕도가 많이 제작됐고, 이는 중국과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국 불교 명부신앙이 빚어낸 독창적인 모습이다.
야마에서 염라대왕으로, 다시 보현왕여래로 이어지는 이 긴 궤적을 면밀히 추적해 보면, 한 가지
역설에 다다른다.
가장 거칠고 가장 두려운 모습으로 그려진 존재일수록, 그 안에 가장 깊은 자비의 의지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천상의 왕에서 지옥의 심판자로 변한 야마의 이력은 단순한 격하가 아니라, 자비가 공정한 심판의 형태로 옮겨 앉은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메시지는 심판이 곧 응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끝내 모든 존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교훈을 전해 준다.


현주 스님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나라
신중도를 중점적으로 탐구한 연구자로서, 신중도 관련 학술논문만 13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가유산청 문화재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충북 문화유산위원회 전문위원,
전남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