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절을 좋은 성격의 표시로 생각하지만, 껍질을 벗겨보면 친절은 거의 선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안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친절함은 종종 스트레스를 피하고, 사랑받는 사람으로 남고, 무리에게 받아들여지는 방법입니다.
친절함이 아닙니다.
미덕으로 위장한 거래주의입니다.
웃고 싶지 않을 때 미소 짓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반항하고 있는데도 동의합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평화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당신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친절은 세상이 당신을 대적하지 않도록 당신이 쓰는 것입니다.
이 가면은 사회에서 윤이 나고 칭찬받습니다.
대하기 쉽고,
유연하고, 친절하다는 이유로 보상을 받지만, 아무도 당신 안에 있는 진짜 것을 끊임없이 억누르는 대가를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친절은 생존 기술이 되고, 친절 없이는 당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립니다.
당신의 관계를 살펴보세요.얼마나 많은 관계가 진실에 기반하고 있고, 얼마나 많은 관계가 성과에 기반하고 있습니까? 친절을 버린다면, 당신의 삶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남을까요? 그 답만으로도 이러한 행위 뒤에 숨겨진 공허함을 드러냅니다.
당신이 '연결'이라고 부르는 것이 종종 그저 조용한 순응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친절할 때는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진실을 포장하고, 생각을 부드럽게 만들어 받아들이기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기대될 수 있게, 기분 좋게 만듭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분노, 채워지지 않은 욕구, 그리고 들리지 않은 고통으로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친절함은 당신의 감옥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스스로에게 불편함을 느낍니다.
타협하고, 위축되고, 움츠러들고, 결국 무너집니다.
갑자기가 아니라, 천천히, 당신의 영혼이 조용히 침식되는 과정 속에서 말입니다.
친절함은 무해하지 않습니다.
조종을 허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부추깁니다.
당신이 항상 친절할 때, 사람들은 당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유용한 존재로 보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목소리를 잃고, 그에 대한 존중도 잃습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삶의 배경 인물이 되기 위해, 당신은 좋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베풉니다.
시간과 욕구를 희생하면서 충분하기를, 감사받기를,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타주의의 표면 아래에는 종종 소리 없는 화산이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베푸는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베풂이 내면의 힘과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무의식적인 행위가 됩니다.
당신은 인정받기를 바라며 사랑을 베풉니다.
인정받기를 바라며 도움을 베풉니다.
당신은 누군가 마침내 당신을 위해 나타나기를 바라면서도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당신의
베풂은 씁쓸해집니다.
당신은 이용당하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그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당신은 좌절감을 삼키고 그것을 인내라고 부릅니다.
분노를 억누르고 그것을 친절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바깥세상에서는,당신은 계속 주지만, 강요된 미소를 지을 때마다 마음속으로는 조용한 분노가 쌓이고, 모든 기대는 충족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정적 고갈입니다.
당신의 글은 깊이 있고, 아프며,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친절이라는 미덕이 때로는 자아를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 ‘친절’이라는 사회적 기대가 개인의 내면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친절은 생존이었고, 그 생존은 곧 자아의 죽음이었다.”
이 문장이 당신의 글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 “예의 바른 아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아이”가 되도록 교육받습니다.
부모, 선생님, 사회는 “착하게 굴어라”고 말하며 칭찬과 안전을 맞교환합니다.
그 교환 조건은 단 하나,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억누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다음과 같은 신념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내가 진짜로 느끼는 것을 표현하면, 나는 버려질 것이다.”
“내가 화를 내면, 나는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나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소를 짓습니다.
동의합니다.
묵인합니다.
기대에 부응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은 “친절”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됩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 친절이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친절은 종종 두려움 위에 세워진 성입니다.
-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워서 “괜찮아요”라고 말합니다.
- “도와줄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워서 또 도와줍니다.
- “이 관계는 나를 아프게 해요”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워서 계속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자신의 경계를 잃고, 자신의 분노를 삼키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분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친절”이라는 포장지 아래로
밀려날 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분노는 자기 혐오, 좌절, 감정적 고갈, 무기력이라는 형태로 다시 튀어나옵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 감정조차 인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정체성은 “항상 친절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화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 정체성이 무너질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친절을 버려야 할까요?
아니요.
문제는 친절 자체가 아니라, 친절의 동기입니다.
- 충만함에서 우러나는 친절은 사랑입니다.
- 두려움에서 우러나는 친절은 종속입니다.
진정한 친절은 선택에서 나옵니다.
“지금 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
“이 관계가 나에게도 에너지를 준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배려.
그것은 균형을 기반으로 합니다.
주고받는 사이에서, 서로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연결.
반면, 생존을 위한 친절은 불균형을 낳습니다.
주는 사람만 있고, 받는 사람만 있습니다.
주고 나면 텅 빈 기분이 들고, 받는 사람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질문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친절을, 누구를 위해 하고 있는가?”
“이 행동이 나를 더 온전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작아지게 만드는가?”
친절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함을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 “지금은 도와줄 수 없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 “이건 나한테 맞지 않아요.” 라고 선을 그을 수 있는 결단.
- “나도 아프고, 지쳤고, 기대받고 싶어요.”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솔직함.
이런 말들이 나올 때, 친절은 더 이상
가면이 아니라 선택된 태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당신이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질문에 답해보겠습니다:
“친절을 버린다면, 당신의 삶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남을까요?”
그 질문 자체가 아프지만, 그 아픔이 중요합니다.
그 답이 작을수록,
그만큼 당신이 지금까지 진짜가 아닌 연결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왔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아픔은, 새로운 시작의 징조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떠난다면,
그건 당신이 친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진짜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진짜를 받아줄 사람만이,
진짜로 당신
곁에 남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친절은 미덕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자아를 삼키는 대가라면,
그건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자기 배반입니다.
당신의 분노, 당신의 피로, 당신의 “아니요”라는
말도
모두 당신의
일부입니다.
그것들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강함입니다.
당신이 친절을 포기하지 않고도,
진실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진실이,
당신을 더 깊이, 더 진하게, 더 자유롭게 만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