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언제부턴가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능력이 생겼다.
어쩌면 병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드라마를 보면서 한쪽 귀로는 음악을 들으며 원고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한쪽 귀로는 영어 공부를 다른 한쪽 귀로는 유튜브로 소설을 듣기도 한다.
혼자 있어도 고독할 틈이 없다.
문득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인상적인
소설 제목이 생각난다.
인간 실존을 고독하게 그려낸 그 책의 제목이 마치 현대의 오늘을 예언한 것도 같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볼 때도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며 갖가지 삶의 무늬를 구경하는 습관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그러니 꿈인들 시끄럽지 않으랴.
혼자여도 고독할 틈 없는 세상
지나 보니 삶은 시시함의 연속
뻔한
말들 속에 다정한 위로가
그림=황주리
며칠 전 꿈속에선 어느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중 내가 의자에 앉으니 한참 젊은 기자가 나보고 앉지 말고 서 있으라 한다.
내가 젊은 사람이 어른에게 너무 예의가 없다고 한마디 한다.
그러자 갑자기 그가 책상 위의 가위를 내게 던진다.
다음 순간 그가 영화 속의 가위 손이 되어 마구 수 없는 가위들을 던진다.
나는 살려달라고
온 힘을 다해 빌다가 꿈에서 깬다.
아침에 눈을 뜨면 유튜브에서 이삼 백 년 전에 세상 떠난 현자들이 생전에 남긴 말들을 읽어 준다.
나는 이 말들이 참 위로가 된다.
인생은 비극적 결말을 알면서도 오늘 즐겁게 나아가는 항해라든지, 인간은 삶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죽음이 더 두렵기 때문에 계속 살아가는 거라든지, 혹은 죽음은 했어야 하는 모든 일이 다 끝나는 것이라는 식의 말들이 마치 얼굴 한 번 못 본,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삼촌의 말을 듣는 기분처럼 다정하게 들린다.
어린 시절 나의 가장 큰 낙은 수면이었다.
추운 겨울 두꺼운 이불을 덮고 꿈나라로 가는 일이야말로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 두꺼운 옛날 솜이불의 무게는 차가운 밤의 갑옷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아주 푹 잠들어 깨지 않는 일이 뭐 그리 나쁘랴.
그런데 왜 죽는 일이 나이 들수록 두려워지는 걸까? 언젠가 백 살의 은사님이 한 5년만 더 살고 싶다 하셨다.
그리고 5년 더 사셨다.
스승님께 가장 배우고 싶던 게 바로 그 삶에 대한 집착이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울적한 나의 병을 다스리며 아마 나도 그렇게 늙어가리라.
빨리 가라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눌어붙던 젊음의 지루한 고독,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지 마라. 분명히 읽으려고 꽂아둔 책들의 반도 읽지 못하고 우리는 저세상으로 갈 것이다.
나이 들수록 나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언젠가 그럴듯하게 보이던 사람이 남용된 권력의 한가운데 서 있기도 하고 영 비호감으로 느껴지던
사람이
소리높여 옳은 말을 하기도 하는 세상, 나는 이제 내가 누굴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말할 자신이 없어진다.
이참에 세상의 모든 단어를 다 바꾸면 어떨까? 민주는 찐빵, 보수는 호떡, 진보는 붕어빵 혹은 공갈빵으로.
‘체 게바라’가 영원한 건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성실한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지하철을 탄다.
저 속에 아무렇지 않은 듯 끼어 악마가 졸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득 놀이터에 앉아 있다가 올려다보이는 옥탑방 안의 가족이 행복해 보여 온 가족을 몰살했다는 사람이 생각난다.
그보다는
한참 수위가 낮더라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걸 우리는 모르며 살아간다.
어쩌면 바로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며 무심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상의 기억들이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 문득 떠오를 때가 많아진다.
그 시시한 순간들이 모여 일생이 되리니.
초등학교 시절 학교 가는 길에 작은 전파상이 있었다.
그곳에서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에 반해 우리 친구 셋은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매일 그곳에 들렸다.
그 친구들이 누구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강아지가 그 시절 많이들 기르던 하얀 스피츠였다는 기억만 선명하다.
1년쯤 지나 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우리는 발길을 끊었다.
어쩌면 새 학년이 되어 그 친구들과 멀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개의 죽음이 너무 슬퍼서 일부러 그 가게가 안 보이는 길목으로 멀리 돌아서 다녔다.
언젠가 학교 앞에서 우연히 만난 전파상 아저씨가 무척 섭섭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너희들 많이 보고 싶었는데 왜 통 오질 않니? 들어가서 빵이라도 먹고 가렴. 나는 갑자기 죄의식에 사로잡혀 얼굴이 빨개졌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시끄러운 나의 고독 속으로 문득 이어폰을 통해 이런 노래가 흘러나온다.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지도 몰라. 갑자기 그 흔한 노랫말이 천둥처럼 들린다.
천둥이 내게 묻는다.
“정말 아직도 그걸 몰랐단 말인가?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윤영호서울대 의대 교수
세계보건기구가 2016년 설탕세 도입을 권고한 이후 이를 채택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한국도 이를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영국 정부는 지난 4월 커피와 밀크셰이크에도 ‘설탕세’를 붙이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이달 21일 의견 수렴 기간이 종료된다.
영국 정부는 지난 2018년 탄산음료에 일명 설탕세로 불리는 청량음료산업세(Soft Drinks Industry Levy)를 도입해 ‘성공의 맛’을 본 후, 이를 더 확대할 계획이다.
그동안 음료
100mL에 설탕이
5g 이상 들어 있으면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젠 4g으로 더 낮추려 한다.
가격 오르면 설탕 든 음료 소비 줄어
영국의 경우 설탕세 도입으로 단맛이 많이 들어간 음료 매출이 3분의 1 이상 줄었다.
그 덕분에 비만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은 물론이고, 어린이 천식 같은 질병도 줄었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영국 정부는 여기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모든 가공식품, 즉 인위적으로 만든 음식 전체로 설탕세를
확대하려
하고 있다.
미국도 다섯 개 주에서 설탕세를 도입했다.
탄산음료, 과일음료, 커피 등 음료 가격이 평균 33% 오르자, 소비자의 구매량도 33% 줄었다.
가격이 오르니 소비자들도 덜 산다는 얘기다.
설탕세가 실제로 설탕 소비를 줄이는 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렇다면 설탕은 정말 위험한 걸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료는 충치, 비만, 당뇨, 심장병, 뇌졸중, 암 등 다양한 질병의 원인이 된다.
특히 음료로 설탕을 섭취하면 몸에 더 빠르게 흡수되어 혈당이 급격히 올라가고, 간에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설탕은 비만과 당뇨병 위험 높여
WHO 권고, 태국·필리핀도 도입
영국은 커피 등으로 확대 추진
최근 전 세계 50만 명의 자료를 모아 분석한 미국 브리검영대 카렌 델라 코르테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달콤한 음료를 하루에 350mL 더 마실 때마다 제2형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25% 증가했다.
미시간대 연구에서는 한 캔 마실 때마다 12분의 생명이 단축된다.
한국의 경우도 청소년 비만이 계속 늘어나면서, 최근
10년
사이에 청년 당뇨 환자는 두 배나 증가했다.
그냥 달콤한 음료 한 잔 마시고 기분 전환하는 정도의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세계보건기구(WHO)는 2016년부터 각 나라에 설탕세를 도입할 것을 권고했다.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료에는 가격의 20% 정도 세금을 붙이도록 하는 방식이다.
마치 담배에 세금을 부과해 금연을 유도한 것처럼, 세금 정책으로 설탕을 줄이자는 것이다.
이는 기업과 소비자의 자율 규제만으론
설탕이
건강에 미치는 해악을 중단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결과다.
이를 기점으로 2023년까지 117개 나라와 지역에서 설탕세를 도입했다.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도 시행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설탕과의 전쟁’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2021년 기준으로 비만 때문에 떠안게 된 사회적 비용은 약 15조6000억원에 달한다.
흡연으로 인한 비용(약 12조여원)보다 3조원이 더 많은 액수다.
그러니 건강보험 부담도 만만찮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나라 음식은 너무 달다.
설탕이 국민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다른 나라보다
절대 작지 않다.
그럼에도 국내에선 기업의 자율 규제에만 기대거나 국민 스스로 조심하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본격적으로 설탕세 도입을 검토해야 할 때가 됐다.
설탕세는 국민 건강증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설탕세로 확보한 세금은 국민 건강을 위한 시설과 제도에도 투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공병원 확대, 청소년·노인을
위한 건강 프로그램,
예방 중심의 건강 캠페인 등을 통해 건강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
설탕세는 단순한 세금이 아니라 국민 건강을 위한 투자 재원이 되어 줄 것이다.
설탕세는 국민 건강을 위한 투자 재원
다음 부정선거 음모론은 보수 멸망을 부르는 전염병 [박은식이 소리내다]
설탕세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점점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올해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이 설문조사를 한 결과, 국민 1000명 중 58.9%가 설탕세 도입에 찬성했다.
그리고 82.3%는 청량음료에 설탕 경고 문구를 넣는 데 찬성했다.
담뱃갑의 경고 문구처럼 설탕도 그 위험성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
설탕세는 국민의 선택을 바꿀 수 있다.
건강보험료를 인상할 바에는, 설탕세 같은 건강세를 먼저 고려해 보자는 목소리도 높다.
설탕세는 단순한 세금이 아니다.
많은 청소년이 급식 대신 편의점 음식과 단 음료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데, 이는 평생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청소년기에 지나친 설탕
섭취는 뇌의 보상
체계를 교란해 중독으로 이어지기 쉽고, 비만과 당뇨의 위험도 커진다.
설탕은 학습 능력과 기억력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세금이 늘어나면 부담스럽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런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설탕세로 모은 일부 세금은 기업이 친건강 제품을 개발하는 데 쓰도록 지원할 수 있다.
또 건강한 소비를 하는 시민에게는 ‘건강넛지포인트’라는 보상 포인트를 제공해 친건강 제품을 구매하게
하면 구매력도
올라가 기업에도 이득이다.
이 포인트는 나중에 의료비로 쓸 수 있게 하거나, 보험사가 이 포인트를 저축해 의료비로 쓸 수 있게 하는 상품을 만들도록 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설탕세는 세계적인 흐름이다.
기업들도 이참에 설탕 사용을 줄이고 건강한 K-푸드를 개발한다면, 수출 경쟁력도 높아질 것이다.
국민 건강이 좋아지면 기업의 생산성도 오르고, 의료비 부담은 줄어드는 선순환이 가능하다.
이미 국회와 여러 연구기관에서도 설탕세의 필요성을 검토했다.
이제 더는 설탕세
도입을 늦출
이유가 없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장

윤석만 논설위원
행복경제학의 창시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지적행복론』에서 행복의 3요소로 ①물질적 부 ②건강 ③가족을 포함한 사회관계를 꼽았다.
부는 다른 요소와 달리 일정 수준에 이르면 행복도를 높이지 않는다.
물질 소유로 인한 행복의 한계효용은 계속 낮아지고 결국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한국의 1인당 GDP는 1953년 67달러에서 2023년 3만2142달러로 480배 늘었지만 행복은 그만큼 커지지 않았다.
유엔 ‘세계행복지수’ 순위는 조사가 처음 시작된 2012년 56위에서 2022년 59위로 떨어졌다.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0여년째 1위다.
특히 30세 이상에선 감소 추세지만 10~20대에선
되레 늘고 있다.
20대 우울·불안장애 환자도 2017~2021년 13만 명에서 28만 명으로 급증했다.
외형적으론 10위권의 경제대국에, 세계가 열광하는 K컬처의 나라지만 국민 개개인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부터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며, 누적된 좌절 속에 열패감이 쌓이기 쉽다.
타인과의 비교는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어쩌다 한번 잘되면 과시와 갑질을 한다.
압박과 스트레스가 일상인
‘하이 텐션(high
tension·고도불안) 사회’의 전형적 모습이다.
최근 ‘묻지마 범죄’의 급증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다던 조선(33)이나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는 정유정(24)은 ‘소용돌이 사회’가 낳은 괴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온 국민이 명문대와 전문직, 좋은 아파트를 향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가지만 현실의 대다수는 경쟁에서 낙오한다.
도피처로
찾는 SNS에서 물신화한 명품과 사치스러운 소비행태를 보며 상대적 박탈감만 커진다.
가장 시급한 건 사회 양극화 해소다.
하지만 개인의 의식변화도 필요하다.
“산 너머 행복을 찾아 친구 따라갔다 눈물만 머금고 왔다(Uber den Bergen, 산 너머)는 독일 시인 칼 붓세의 말처럼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타인과 비교하는 대신 자존감을 키우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이
정한 획일적
목표에 끌려가지 않고, 주체적 결단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게 행복의 본질이다(존 스튜어트 밀).
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동서양 세력의 재균형, AI 디지털 혁명, 민주주의의 퇴조, 인구구조, 기후변화가 함께 맞물리는 대전환기에 들어서며 세계는 지금 깊은 혼돈 속을 헤매고 있다.
지난 80년 세계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이 나라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며 전 세계 정치, 경제, 안보 지형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유럽에서도 극우파의 지지세가 점점 드세지고 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소득과 부의 양극화, 약자에 대한 배려와 포용 부족, 절제되지 않은 탐욕 추구가 엘리트들과 기존질서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일으켜온 결과다.
그리고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언론과 여론형성 통로의 변화가 가져오고 있는 결과다.
역사는 늘 이런 과정을 거쳐오면서 변화와 새로운 인물의 출현을 경험하게 되었다.
트럼프의 등장, 미국의 역할 변화, 유럽정치 지형 변화도 이런 흐름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미국 관세정책, 자국의 쇠퇴 재촉
유럽 등 관세 맞대응 자제 합리적
포퓰리즘 정치 수렁 빠지지 않도록
통합과 포용적 경제정책 강화돼야
그럼에도 지금의 세상 흐름은 우리에게 깊은 불안과 우려를 자아낸다.
트럼프 취임 이후 지난 6개월간의 관세전쟁이 트럼프 협상술의 승리로 끝나고 있다는 평가도 많다.
유럽과 일본, 한국, 호주 등은 미국 수출에 더 높은 관세를 지불하게 되면서도 오히려 미국 상품에 더 시장을 개방하고, 미국에 더 많은 투자를 약속하면서
당초 협박받은 만큼의 관세를 물지 않게 되었다고 안도하고 있다.
경제학 이론이 늘 옳은 것은 아니나 그리 틀린 것도 아니다.
트럼프의 관세정책은 결국 미국경제에 인플레와 생산비용 상승을 가져와 미국제품의 경쟁력을 더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아직까지는 미국의 첨단기술 혁신능력과 달러화에 대한 신뢰로 전 세계의 돈이 미국으로 몰려들어 트럼프 정책이 초래하고 있는 불확실성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나름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관세정책은 세계를 1930년대로 회귀시키며 궁극적으로 미국과 세계 경제의 침체,
국제 갈등을
심화시킬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 연준에 대한 금리인하 압박도 마찬가지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존중은 이념과 철학에 의한 것이 아니다.
경험의 산물인 것이다.
1970년대 닉슨 대통령의 압력을 아서 번즈 당시 연준의장이 금리인하와 통화확대로 수용한 것이 석유파동과 맞물리면서 세계적 인플레를 유발한 경험에서 1980~90년대
주요국
정부들 스스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하게 된 것이다.
1997년 영국의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영란은행 독립성을 강화하는 법을 제정하면서 “이전의 법은 정부가 단기적 경기부양 목적으로 지나치게 통화를 팽창해 결국 지속 불가능한 성장과 인플레를 가져왔다고 진단하고 “영란은행 독립성 강화는 근시안적인 정치 개입으로부터 보다 장기적이며 투명한 통화정책 결정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라며 스스로 정부 권한축소를 수용하였다.
경제적 성과는 단순히 경제정책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나라 제도와 조직의 건전성, 이에 대한 신뢰라는 경제외적 기반이 합쳐져서 이뤄진다.
트럼프 시대가 가져오게 된 미국의 기관과 제도에 대한 신뢰 저하는 궁극적으로 미국 달러화에 대한 신뢰 저하를 가져오며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을 심화시키게 될 것이다.
미국이
지난
80년 기축통화국으로서 국제금융 질서와 세계 질서를 주도해왔던 가장 주요한 요인은 미국의 경제력과 더불어 미국제도의 건전성과 합리성, 다자간 기구를 통한 포용적 대외정책에 기반한 신뢰자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지금 미국은 너무 쉽게 무너뜨리고 있다.
이는 결국 미국이 견제하려는 중국의 빠른 상대적 부상을 재촉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에 안보를 의지하고, 미국이라는 가장 큰 시장에서 경쟁 상대국들보다 더 높은 관세를 맞지 않기 위한 단기적 고육지책이긴 했지만 이는 장기적 관점에서도 합리적인 대응이다.
보복관세로 대응하는 것은 모두가 패자가 되는 확실한
길이다.
그것은 단순히 국내 인플레와 생산비용 상승뿐 아니라 관세장벽으로 보호를 받으려는 업자들의 대정부 로비와 부패, 나아가 국가 간 갈등으로 전쟁 위험을 고조시키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지식을 부정하고 검증되지 않은 논리에 바탕을 둔 정책으로 세계를 흔들면서, 이 세계는 점점 경제적으로나 안보적으로 불안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어느 나라나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의 불신과 울분이 정치를 점점 더 포퓰리스트적 수렁으로 몰아가지 않도록 우리도 포용적 경제정책과 통합적 리더십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전통 언론의 여론 형성 역할이 축소되고 여과되지 않은 SNS가 여론을 주도해 나가는 이 세상에서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지식들이 좀
더 공명을
얻도록 지식인들은 스스로 소통의 공간을 넓히려는 노력을 해 나가야 할 때라 생각된다.
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정철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3월 26일 미국 조지아주 현대자동차 메타플랜트 공장 준공식.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축사를 하는 뒤편엔 수백 명의 근로자가 앉아 경청하고 있었다.
한국 공장과 확연히 다른 풍경은 상당수가 젊은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푸른색 티셔츠에 흰색 모자를 눌러 쓴 여성 근로자들은 생산직 노동자라기보다 엔지니어 분위기를
풍겼다.
지난달 25일 현대차 노조는 압도적인 찬성률로 파업안을 통과시켰다.
주로 남성들로 이뤄진 노조 집행부는 ‘단결 투쟁’이란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임금 인상과 정년 연장을 외쳤다.
현대차 생산직 여성 비율 2% 불과
자동화율·생산성 미국보다 낮아
기득권 노조, 제조업 몰락 부추겨
30% 대 2%. 현대차 메타플랜트 공장 대 울산 공장의 여성 근로자 비율이다.
울산공장의 극단적인 성비 격차는 기네스북감이다.
현대차 생산직의 여성 비율은 남자에게만 병역의무가 주어지는 한국군의 여성 비율(4%)보다 낮다.
가장 최근 이뤄진 생산직 채용 200명 중 여성은 6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사내하청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케이스다.
현대차 울산공장은 20·30대 청년 비중도 작다.
근로자 평균연령이 거의 50세에 달한다.
고임금 경력 근로자는 생산성이라도 높아야 한다.
하지만 현대차 국내 공장의 생산성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현대차 현장 직원 390명은 최근 무더기 징계를 받았다.
연장근무를 했다고 허위 기록한 뒤 실제로는 일찍 퇴근하거나 1명이 2명의 일을 몰아서 하는 이른바 ‘두발뛰기’를 했다는 사유다.
현대차 노조는
현장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사과문을 내기는커녕 정년을 만 60세에서 64세로 늘리는 임단협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제조업 기반이 붕괴한 미국은 사람 대신 AI와 로봇이 주도하는 ‘제조업 르네상스’를 노리고 있다.
현대차 메타플랜트 공장은 차체 공정의 100%, 조립 공정의 40%가 자동화돼 있다.
모든 부품·차체·섀시는 자동 물류로봇이 운반하고, 사족보행 로봇이 5만 장의 이미지를 분석해 품질을 검사한다.
현대차 울산공장과 메타플랜트공장의 생산성을 비교해 보면 울산공장의 미래는 암담하다.
울산공장은 약 3만2000명의 근로자가 연 152만 대를 생산한다.
연 30만 대 생산을 계획하고 있는 메타플랜트 공장의 생산직은 860명이다.
근로자 1인당 연간 생산대수는 신생 메타플랜트공장이 세계최대 단일공장인 울산공장을 뛰어넘었고, 이 격차는 갈수록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현대차는 10월부터 메타플랜트 공장에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투입한다.
로봇은 인간이 쉬는 밤에도, 휴일에도 일을 한다.
설비를 늘리지 않고도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
공장 무인화가 완성되면 현대·기아차의 미국 내 생산능력은 현재 120만 대에서 192만 대까지 늘어나 현지 판매물량을 소화할 수
있을 전망이다.
미국에서 생산하는 차는 15%의 관세를 물지 않아도 되니 현대·기아차 입장에선 미국 내 생산을 늘릴 수밖에 없다.
그만큼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은 줄어들게 된다.
수출이 안 되면 국내 사업장은 구조조정을 하거나 폐쇄하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구조조정의 직격탄은 위기 때마다 그러했듯 비정규직·사내하청·계약직·여성 등 약자들이 먼저 맞게 된다.
노동자의 계급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정규 생산직은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AI·로봇이 주도하는 혁신의 쓰나미에 60대 정규직 노조원도 결국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퓰리처상을 받은 워싱턴포스트 기자 에이미 골드스타인은 2008년 금융위기로 GM 공장이 문을 닫은 위스콘신주 제인스빌이란 소도시에 수년간 머물며 『제인스빌 이야기』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GM 공장 폐쇄로 해고된 노동자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기계들이 뜯겨나갔다.
조립라인이 뜯겨나갔다.
노동자들도 뜯겨나갔다.
정철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홍석철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국내 치매 환자가 100만 명에 육박한 가운데 이들이 가진 각종 자산이 154조원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치매머니는 치매 환자가 보유한 소득과 자산을 의미한다.
치매머니는 인구 고령화가 심화하던 2010년대에 일본에서 처음 사용됐다.
치매 노인 규모가 470만 명에 달하는 일본에서는 올해 치매 노인이 보유한 금융자산이 전체 가계 금융자산의 9.4%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2023년 기준 154조원으로 추정
환자 자산, 치료·간병비로 쓰여야
후견인 및 신탁제도 정비도 시급
한국의 치매 환자 수는 100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달 초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2023년 기준으로 치매 환자의 소득과 자산을 전수 조사한 결과, 국내 치매머니는 154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총생산(GDP)의 5.4%나 된다.
치매머니는 부동산자산 74.1%, 금융자산 21.7%, 그리고
소득 4.2%로
구성되는데, 다수 고령자가 보유한 소액 예금까지 합하면 200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치매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은 노화로 치매 유병률은 75세 이후 가파르게 상승한다.
급격한 인구 고령화로 75세 이상 인구는 현재 약 430만 명에서 2050년까지 1153만 명으로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며, 고령 치매 환자도 비례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전망을 반영하면 2050년까지 치매 고령자 수는 300만 명을
훌쩍 넘기고
치매머니도 500조원(2023년 가격 기준)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고령화에도 국내 치매머니 관리 미흡
치매머니의 핵심은 인지능력 저하로 인한 자산의 관리와 보호가 취약해지는 문제이다.
최근 치매 노인이 사기와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는 뉴스가 빈번해지고 있다.
지난 20년간 고령 인구 10만 명당 사기 등 재산 범죄율은 3배가량 증가했다.
치매 노인이 증가할수록 치매머니의 취약성으로 인한 사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2018년 치매 공공후견인 제도가 도입됐다.
후견 심판 청구를 통해 공공후견인을 지정하여 주로 가족이 없는 치매 환자의 의사 결정과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제도다.
하지만 제도에 대한 인식과 후견인 양성 기반이 미흡할 뿐만 아니라 후견인의 자산관리 전문성이 충분치 않다는 단점이
있다.
가족이
있다면 법원이 선임하는 성년후견인을 둘 수 있지만 누가 후견인이 되냐를 두고 가족 간 분쟁이 생길 수 있다.
대안은 치매 환자가 금융기관 등 신탁회사에 예금이나 부동산의 자산관리를 맡기는 신탁제도다.
일부 은행에서 치매 관련 신탁 상품을 출시하고는 있지만, 사망에 대비한 유언대용신탁 등에 치우쳐있고 치매 전문 맞춤형 설계가 부족하다.
또한 신탁계약의 법적 유효성은 계약 당시 위탁자의 의사 능력 보유에 의존하는데,
의사
능력의 정의나 판단 기준에 대한 민법상의 규정이 미비하여 향후 신탁제도 활성화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후견과 신탁 간의 법적 정합성이 부족해 충돌도 예상된다.
예를 들어 특정 목적으로만 사용하라는 신탁이 이미 설정된 상황에서 치매가 발생하여 후견 개시가 이뤄진다고 하자. 후견인이 위탁자의 건강을 고려해 신탁 자산을 지정된 목적과 다른 곳에 지출하고자 할 때 법적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
한편 금융기관이
아닌
공공기관이 수탁자가 되는 공공신탁은 신탁의 신뢰성을 높일 방안이지만, 아직 국내에는 도입되지 않고 있다.
한국보다 치매머니 문제를 먼저 경험한 선진국들은 각국의 금융제도와 법체계 하에서 다양한 제도들을 발전시켜 왔다.
한국도 치매 공공후견인과 신탁제도의 개선뿐만 아니라, 공공의 신뢰와 민간의 자산관리 전문성을 반영한 공공신탁과 민간신탁의 결합, 후견제도와 민간신탁의 연계 등 혁신적인 정책 추진이 요구된다.
치매머니 관리로 환자 삶의 질 높여야
하지만 치매머니 관리 정책과 제도의 공익성을 높이려면 자산관리 이상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3년 치매역학조사 및 실태조사에 따르면, 치매 관리에 필요한 의료비, 돌봄비 등 1인당 연평균 관리 비용은 지역사회에서 돌볼 때 1734만원, 시설·병원에서 돌볼 때는 3182만원으로 조사됐다.
치매는
가족과
국가에 상당한 돌봄 부담과 비용을 초래하는 대표적인 건강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좀 더 혁신적인 치매머니 관리는 치매 환자의 치매머니를 그들의 치료비, 간병비, 돌봄비용 지출과 연계하여 가족과 국가의 부담과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특히 치매머니 중 비중이 높은 부동산 자산을 유동화해 치매 환자의 돌봄과 연계하는 과감한 정책 검토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돌봄비용
등으로
목적을 제한하는 자산유동화 치매전용 신탁상품 등의 개발이 요구된다.
또 위탁자가 치매로 판단 능력을 상실한 경우에도 돌봄 목적 자산 지출에 대한 수탁자의 법적 집행 권한을 보장하고, 후견제도와 충돌할 때 우선순위나 조정 절차에 대한 법규 정비가 뒷받침돼야 한다.
법정 후견 제도를 거치지 않고 의사능력 상실 이후의 수탁자를 미리 설정하는 사적 계약에 기반을 둔 미국의 리빙트러스트와 후견인의 법적 권한 범위 안에 신탁 설정 및 관리 권한을 포함하는 일본의 후견신탁 제도 등은 참고할 만한 사례다.
치매머니는 초고령사회에 우리 사회가 겪을 사회 문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키워드다.
무엇보다 치매머니 관리는 초고령사회가 직면할 돌봄의 지속 가능성 위기를 완화하고 치매 고령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