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안 되는 이유

|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독일의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책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모든 사람에게는 비밀스러운 세계가 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빛나고, 가장 끔찍한 날로 상처 입은 그 세계는 다른 이들에게는 결코 열리지 않는다.
” 소설가 박완서가 아들을 잃고 쓴 고통의 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에도 이 구절이 나온다.
인간사의 소통 불가능성에 대해 이만큼 정확한 언명도 드물 것이다.
나의 마음, 타인의 마음이 절대로 열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마음을 닫아서가 아니라 몸의 개별성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사회적 구성물이지만 동시에 철저한 개체(個體)이다.
명절 연휴. 대화가 스트레스가 되는 시간이 왔다.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많지만 여전히 우리는 오랜만에 가족과 친지를 만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사람들은 대개 예의가 없다.
매일 친하게 지내는 사이에서도 하기 힘든 그 유명한 질문, 아니 심문(審問)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댄다.
주로 아랫사람을 상대로 한 취업, 진로, 결혼 여부, 재테크 등에 대한 궁금증(?)이 그것이다.
몇해 전 정치학자 김영민은 명절의 이러한 현상에 대해 동문서답으로 대응하라는 칼럼을 써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당숙이란 무엇인가”라는 식으로 되물으라는 얘기다.
평소 젠더 이슈를 둘러싸고 모욕에 가까운 질문을 받는 나도 자주 사용하는 소통 방법이다.
젠더에 대한 질문은 비상식적이거나 대답하기에 며칠이 걸릴 만한 추상적이고 큰 물음이 대부분이어서, 나는 내게 “물을 것이 있다”며 다가오는 이들이 다소 두렵다.
한국 사회는 젠더의 인식론적 지위가 낮고 여성학 지식이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에 나 역시 동문서답을 하거나 겸손한 척하면서 대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전략은 상대방을 설득하기보다 당황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통을 간절히 원한다.
내 뜻대로 되는 대화, 내 말을 잘 들어주는(듣는) 사람, 나를 수용해 주는 사회를 원한다.
타인과 연결은 삶의 조건이자 의미가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외롭다”고 말한다.
외로움과 혼자임은 다르다.
가장 외로운 시간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소통이 안 되는 타인과 제도적 관계로 묶여 있을 때다.
가족, 직장 생활, 파트너, 사제 관계, 군대 내 계급 등이 대표적인 (폭력적) 제도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소통은 더욱 어려워졌다.
사람마다 주로 이용하는 매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손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e메일로만 소통하는데, 요즘은 원고 파일조차도 카카오톡으로 보내는 사람이 많아졌다.
전자메일도 점차 낙후된 매체가 된 것이다.

게다가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대체로 약자가 되기 쉽다.
인생 문제를 대화가 아니라 힘의 원리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굳이 타인과의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주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요점이 뭔데?” “예, 아니요로만 말하시오.”대화는 격렬한 평화한편, ‘대화=평화=민주주의’일까? 우리는 “주먹 대신 대화”가 좋은 가치라고 믿는다.
“대화로 해결하자”는 말이 넘쳐나지만 실제는 대화는 불가능하거나 이미 짜인 문화적 각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는 사유하지 않는 대화 지상주의자를 경계한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인간관계, 즉 소통이다.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말이 안 통해서” “말해봤자 소용이 없어서” “말을 안 듣는 인간들 때문”이다.
반대로 말이 통하는 순간 인간은 사랑을 하고 깨우침의 쾌락을 얻는다.
소통은 ‘본래’ 불가능한 인간사다.
나는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 왜 불가능한가를 살펴봄으로써 최소한의 소통을 모색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대화(對話), 소통(疏通), 모여서 말하기(會話·conversation)라는 단어 자체가 대화의 어려움을 웅변한다.
대화의 ‘대(對)’는 적대를 뜻한다.
마주 앉아 말하기는 상당한 불안이 따르는 노동이다.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대화는 편안하지 않다.
변화가 일어나고 긴장이 따른다.
‘소통’은 어떠한가. ‘소(疏)’에는 멀리 있다, 친하지 않다는 뜻이 있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소외(疏外)’의 그 한자이다.
conversation’은 영어 동사 ‘convert’의 명사형으로 개종(改宗)하다, 전환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를테면 110V 제품이 220V로 바뀌는 경험이다.
대화는 종교를 바꾸는 개종 수준의 변화를 요구하는 인간 활동인 것이다.
이 단어들은 모두 만남의 어려움, 대화 자체의 격렬한(violent) 본성을 함의한다.
폭언이 말이 아니라 폭력인 경우가 대표적일 것이다.

소통은 내게로 돌아오는 길근대 해부학의 발달은 보편적 인권 개념의 물적 근거가 되었지만, 동시에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자기만의 고 한 몸을 가진 단독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개인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고로 우리는 타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다.
누구도 남의 삶을 살 수 없으며, 대신 아플 수 없고, 자녀 대신 공부해 줄 수 없다.
지구상 80억명의 사람은 모두 다르다.
타인의 몸과의 단절성이 바로 인간의 고유성,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소통이 불가능한 근본적 원인이다.
이처럼 소통 불가능성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또한 우리는 각자 다른 세계에 산다.
사람마다 사회적 위치(포지션)가 다른 것이다.
성별, 연령, 장애, 지역, 성 정체성 등 개인이 처한 처지나 정체성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당대 한국 사회의 세대 갈등, 젠더 갈등, 지역 갈등은 큰 문제지만, 이는 인류 역사상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던 차별이자 갈등이기도 하다.
사회적 위치만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권력 관계다.
상하, 위계,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 몸은 시시각각 변한다.
갑을 관계도 역전될 수 있으며, ‘갑을병정…’으로 얽힌 관계도 숱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표현의 자유가 ‘반사회적인 깽판’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대화의 내용은 많은 경우 오해, 무시, 아부, 못 들은 척, 알아들은 척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여성주의 평화학자 신시아 인로는 가장 완벽한 의사소통은 명령과 복종으로 이루어진 ‘폭력’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소통이 불가능한 이유는 너무나 많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고 하지만, 그 약속에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것도 아니며 수시로 변하는 약속이다.
약속은 계속 변화하며 언제나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
말의 유동성(流動性), 대화 중 미끄러짐, 불확실성이 언어의 본질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은 글자 그대로 말의 길이 끊이거나 잃은 상황, 내 상황을 설명할 언어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할 말은 많은데 (박준 시인의 표현대로) “출력”이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전달 과정 즉 대화는 상대방과 나의 말이 번역되는 행위다.
번역에는 오역이 필연적이다.
대화가 오고 가는 과정에서 말이 흔들리고 각자가 받아들이는 방식과 의미가 달라진다.
상처받지 않는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만일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언제나 조우(遭遇·encountering)의 형식을 띤다.
영원하지 않은 우연적인 행운인 것이다.
당위적으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소통이 왜 불가능한가를 생각해봄으로써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소통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통의 의지를 갖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화는 본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이다.
사람들과 만난 후 우울하거나 찝찝한 적이 있다면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상대방의 무례로 내 기분이 상했거나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내게로 돌아오는 길(성찰)이 번잡하고 부끄러운 경우가 그것이다.

소통에 임하는 최선의 방법은 결국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항상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타인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기보다 협상적으로 말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가 타인에게 하는 말이나 질문을 나 자신에게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아무 말이나 할 수 없고 세상은 조금 평화로워질 것이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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