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스마트폰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리자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공포스러웠다.
내가 나임을 증명할 모든 게 사라진 기분이었다.
마셜 매클루언이 말했듯 미디어는 인간 신체의 확장이 됐고, 이제 스마트폰은 우리 손의 일부가 됐다.
그런데 이 확장된 신체는 완벽하다.
한 번의 터치로 모든 게 작동한다.
현실 세계에는 없는 이 부자연스러운 매끄러움이 문제의 시작이다.
현실은
울퉁불퉁하다.
신발 끈은 이유 없이 풀리고, 우산은 바람에 뒤집어지고, 지퍼가 중간에 걸리는 게 우리가 사는 진짜 세계다.
그런데 디지털은 마찰을 제거하는 게 목표다.
옛날에는 편지를 쓰려면 펜을 찾고 종이를 꺼내 쓸 말을 고민했다.
이 모든 과정이 마찰이지만 그 덕분에 더 신중하게 썼다.
지금은 카톡으로 “ㅋㅋ”을 보내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으니 별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매끄러움은 뇌에 비정상적인 도파민을 분비시킨다.
우리가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건 그 안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안락한 편리함이 있기 때문이다.
해법은 없을까. 의도적으로 디지털에 현실의 불완전함을 이식하면 어떨까. 가끔 앱이 2~3초 지연되게 하고, 버튼을 꾹 눌러야만 작동하게 하고, 검색할 때 ‘정말 이게 필요한가요?’라고 3초간 멈춰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완벽한 추천 대신 “다른 것도 시도해 볼까요?”라고 제안하는 알고리즘은 어떨까. 아이들에게는 ‘AI에 도움받기 전에 세 번 틀리기 챌린지’를 주고, 실패를 포켓몬처럼 수집하는 게임을 만들면 어떨까.기술을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술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는 있다.
불완전함 속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본의 ‘와비사비(侘寂)’ 철학이나 역경을 통한 성장인 핀란드의 ‘시수(sisu)’처럼 디지털이 없애고 있는 우연, 실패, 마찰, 기다림을 다시 새겨 넣는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혁신은 모든 걸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울퉁불퉁함을 되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백영옥
국내인물문학가현대문학가소설가
출생1974년
출생지서울특별시
데뷔년도2006년
데뷔내용단편 '고양이 샨티'
인물소개
학력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 석사
친구가 주식을 샀다가 크게 하락해 낙심했다.
다행히 실적이 잘 나와 주가가 올라 겨우 본전을 찾았고, 약간의 이익까지 보고 팔았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자신이 팔자마자 그 주식이 상한가를 치며 끝없이 오른 것이다.
친구는 허탈해했고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얘기했다.
주식을 샀을 때 내려가는 고통과 팔았을 때 올라가는 고통 중, 어느 쪽이 더 클까.
인간은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손실에서 두세 배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손실 회피 편향’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주식이 ‘하락하는 고통’이 훨씬 크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 사람들은 팔고 난
뒤의 폭등을 더 오래 기억한다.
사라진 기회를 바라보는 후회는 실제 손실보다 더 집요하다.
사고로 절단 수술을 겪은 환자의 60% 이상이 일정 기간, 혹은 평생 ‘환지통’을 겪는다고 한다.
사라진 팔과 다리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아픈 것이다.
후회의 감각은 환지통처럼 실제 없는데도 우리를 괴롭힌다.
나심 탈레브의 ‘행운에 속지 마라’에는 흥미로운 실험이 소개된다.
은퇴한 치과 의사가 주식에 투자해 매일 수익률을 확인하면, 그는 기쁨보다 고통을 더 자주 느끼며 심리적 적자 상태에 빠진다.
손실에서 오는 부정적 효과는 이익에서 오는 긍정적 효과보다 2.5배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인 주기를 바꾸면 결과는 달라진다.
월별이나 연간 단위로만 성과를
확인하면 그는 훨씬 적은 고통과 더 많은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시간의 척도가 변하면 운의 속성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주식이든
인생이든 우리는 ‘수익’이 아니라 ‘변동성’을 더 자주 목격한다.
그래서 실제 손실보다 사라진 기회에 대한 환지통에 더 크게 시달린다.
얻은 것보다 놓친 걸 더 아프게 기억하는 뇌의 습성이 그렇다.
친구의 경험은 단순한 재테크 실패담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선택과 후회의 축소판이다.
중요한 건 ‘언제 사고팔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시간의 눈금으로 내 삶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질문일지 모른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바람난 애인과 헤어진 후배가 그의 집을 마구 부수는 상상을 하다가 같이 키우는 고양이가 불쌍해 그 녀석만 빼오는 계획을 세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친구가 “상상으로 뭔들 못해!”라는 말을 던지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적 복수에 대한 상상이 펼쳐졌다.
이어서 한 남성이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힌
형을 떠올리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상상을 하게 된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다.
우리는 “내가 미쳤지, 걱정도 팔자, 배부른 소리!”라며 자신의 마음을 쉽게 재단한다.
그러나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감정은 마음속에 찾아오는 손님 같아서 불쑥 왔다가, 할 말만 하고 떠난다.
감정은 몸과 마음이 보내는 중요한 신호다.
감정이
상할 때 쓰는 ‘속상하다’는 말은 우리 몸 안의 장기들이 실제로 상하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감정을 계속 참으면 결국 탈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자신의 감정에만 냉정한 판사가 된다.
분노하면 ‘성격 더러운 놈’, 슬퍼하면
‘약한 놈’, 두려워하면 ‘비겁한 놈’이라고 판결한다.
감정을 느끼는 것과 실제 행동하는 게 전혀 다른 일인데 말이다.
중요한 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감정은 내면의 날씨와 비슷하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나쁜 날씨라고 하지 않듯, 분노나 두려움을 나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비가 씨앗을 키우듯, 분노는 부당함을 바꾸는 힘이 되고, 두려움은 조심성을 길러준다.
엄마도 아이가 미울 수 있고, 아이도 엄마가 싫어질 때가 있다.
그런 감정을 품는다고 나쁜 엄마나 나쁜 자식이 되는 건 아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읽다가 각성한 순간이 있다.
소설 속 ‘안녕’이 굿바이(goodbye)가
아니라, 봉주르(bonjour)였다는 충격 때문이다.
결국 ‘안녕’은 슬픔을 떠나보내겠다는 결별이 아니라 어서 오라는 환대의 인사였다.
나도 내 안의 모든 감정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잘 머물다가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타인의 취향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심리학자 김경일의
강연에서 놀이공원에 간 딸이 풍선을 사달라고 졸라대 어쩔 수 없이 비싼 풍선을 사준 일화를 들었다.
잠시 후, 팔이 아프다며 투정하던 딸이 결국 풍선을 놓쳐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는 그제야 풍선을 사기 직전 주위에 풍선을 든 아이들이 많았는데, 30분 뒤에는 딸 이외에 풍선을 든 아이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딸이 원한 건 풍선이 아니라, 풍선을 든 수많은 아이들 중 하나가 되고 싶은 ‘동일성 욕망’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원하는 것(Want)’과 ‘좋아하는 것(Like)’을 구별하지 못한다.
특히 한국인은 타인의 욕망을 자기화하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비슷한 꿈을 꾸며 살아간다.
책도 베스트셀러만 팔리고,
영화도 천만 관객 영화만 살아남는 식이다.
모두 ‘Like’보다 ‘Want’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Like’가 빠진 ‘Want’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허무하게 바람에 날아간 풍선처럼 쓸려 다니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요즘은 ‘새로운 Like’를
발견할 가능성이 좁아지고 있다.
알고리즘 때문에 반복적으로 접하는 것만 선택하게 되고, 이전에는 호기심이었을 새로운 경험과 취향의 시도는 점점 배제된다.
취향은 단순히 물건을 사 모으는 행위가 아니다.
타인과 나를 구별하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명확히 하는 자기 경계선이다.
세상이 별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에 기꺼이 시간을 들여 ‘무용함의
쓸모’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거 돈이 돼?” 같은 관성적 질문에서 벗어나 나의 고유성을 되찾는 일 말이다.
타인이 원하는 것만 좇는 삶은 이미 정류장을 떠난 버스를 잡기 위해 뛰는 것처럼 허무하다.
반대로 정말 좋아하고 몰입할 수 있는 걸 아는 순간, 삶은 내 것이 된다.
그제야 세상의 소음 속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림이든, 뜨개질이든,
작은 몰입 속에서 나만의 자리를 찾는 것. 나를 흔드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취향을 갖는 건 공허함에 맞서는 태도다.
단순함의 힘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멜 로빈스의
책 ‘렛뎀(Let Them) 이론’에서 ‘아침에 거울 속 자신에게 하이파이브 하기’를 읽다가 노희경 작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뺨을 치고, “빨리 써. 게으름 피우지 마. 너는 작가잖아!” 외친다고 했다.
인터뷰를 읽고 난 후, 나 역시 뺨을
치며 게으른 나를 각성시켜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었다.
뺨 때리기와 하이파이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다.
핵심은 단순함이다.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때, 내가 일부러 왼손을 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마우스를 왼손으로 쓰면 잘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툰 왼손을 쓰면, 습관에서 벗어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제3의 시선을
얻게 된다.
5, 4, 3, 2, 1. 숫자를 거꾸로 센 후, 바로 행동하는 것 역시 뇌에 자극을 준다.
이처럼 단순한 동작들은 우리를 ‘오토 파일럿 모드’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돕는다.
칫솔모의 색이 변하는 기능 하나로 사람들의 칫솔질 습관을 바꾼 덴마크 기업 ‘조르단’이나, 복잡한 PC 경험을 직관적인 ‘아이폰’으로 단순화해 사람들의 삶을 바꾼 애플처럼 말이다.
책 속의 ‘렛뎀(Let Them)’, 즉
‘남들이 뭘 하든 내버려두라’는 이론 역시 복잡한 인간 관계를 두 단어로 해결한다.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복잡한 이론을 사람들이 쉽게 기억하고 행동할 수 있게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노희경 작가의 ‘뺨 때리기’가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한 결기와 진정성이라면, 멜 로빈스의 ‘하이파이브’와 ‘렛뎀’은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기 확신을 심어준다.
전자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방식을, 후자는 단순한 효율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방법은 달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는 같다.
세상의 소음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복잡한 계획이 아닌, 삶의 본질을 꿰뚫는 단순함이다.
결국 성공의 비결은 언제나 행동에 있기 때문이다.
단순함은 그 행동을 이끈다.
약속의 힘
종영된 ‘다큐 3일’에서 특별히 편성한 방송을 보았다.
10년 전, 여행을 하던 두 명의 청춘과 촬영진 셋이 얼결에 10년 후 같은 시간, 안동역에서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한 후에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과연 그들은 만났을까. 10년 후 그날, 촬영 시간이 종료될 즈음 카메라가 꺼지자 안동역에 한 여성이
다가왔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잘 살았냐고, 잘 살아줘서 기쁘다는 안부가 서로 오고 갔다.
그러나 다큐를 보는 내내 내 마음은 청춘을 관통하며 나눈 수많은 약속들을 향해 달려갔다.
대학 때, 한 미술 평론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한 달간의 교생 실습을 마치고 헤어지던 날, 아쉬움에 우는 여고생들에게 말했다.
그 시절 유행하던 행운의
날, 1977년 7월 7일 7시에,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나자는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이루어졌을까. 강의를 듣던 많은 학생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에 의하면, 7시 정각에 어른이 된 여학생들이 하나둘씩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했던 여학생 대부분이 한자리에 모였다.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약속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내 약속도
아닌, 타인의 10년 전 약속이 그토록 마음을 흔든 이유는 무엇일까. 2025년 8월 15일, 오전 7시 48분, 안동역, 만남의 기적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이른 아침부터 서 있는 수많은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나눈 약속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지켜지지 않은 약속일지라도 그 약속 덕분에 우리는 더 간절히 살았고, 더 애틋하게 사랑했으며, 더 깊이 그리워했다는 걸 말이다.
약속의 진정한 의미는 만남에 있는 게 아니라,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 모든 시간들에 있는지 모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들, 실망하고 좌절했던 매 시간이 모여 지금의 우리가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약속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진짜 마법이 아닐까. 안동역에 선 저 많은 사람이 증명하듯,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의 약속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램프 증후군’을 막으려면
‘램프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알라딘이 램프의 요정을 불러내듯이 현대인들이 근심과 걱정을 불러내 자신을 괴롭히는 현상을 말한다.
과거의
선조들이 주로 현재의 생존을 위해 걱정했다면, 우리의 걱정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많다.
AI가 일상에 스며들고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에, 행복은 역설적으로 더 멀어져 버렸다.
24시간 연결된 초연결 사회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벽이 사라지고
모든 문이 열린다는 뜻이다.
불안은 알지 않아도 되는 걸 너무 많이 아는 데서 온다.
과도한 연결은 오히려 소외감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초연결은 ‘모르고 사는 즐거움’이 있다는 우리의 감각을 점차 훼손시켰다.
나만의 소박한 행복을 위해 적당한 울타리와 담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현생 인류에게는 이제 스마트폰 안과 밖, 두 가지 삶이 존재한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에서의 삶은 조명이 달린 투명한 어항 같아서 아주 작은 것까지 환하게 비춘다.
호텔 패키지, 유명한 맛집, 명품 선물 같은 일상은 그곳에서 사진 몇 장으로 압축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초라해진다.
타인의 기쁨이 곧 나의 근심으로 바뀐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이 완벽해 보이는 건 힘든 ‘노동’을 치우고 ‘여유’를 확대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개한 꽃만 전시하고, 뒤편의 거름과 가지치기의 흔적을 치우는 정원사처럼 말이다.
비교는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남의 숫자가 더 작아 보이는 고장 난 체중계와 같다.
세계 둘째 부자조차 첫째의 무게에 짓눌린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선택적 무지의 지혜다.
그것이 불통과 차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를 불행하게 한다면 비교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알라딘의 램프는 스마트폰이다.
잠들기 전 어두운 방에서, 저마다의 작은 화면이 램프처럼 빛난다.
문제는 우리가 램프에서 요정이 아니라 괴물을 불러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부르고 있는가. 희망의 요정인가. 불안의 괴물인가. 그 램프를 켜는 것도, 끄는 것도 결국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