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폭력

아름다움이 살인의 무기가 될 수 있을까. 19세기 영국 화가 로런스 알마타데마의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1888년·사진)는 이 역설적인 질문에 냉혹한 답을 건넨다.
화면을 가득 채운 분홍 꽃잎은 눈이 시릴 만큼 황홀하지만 그 화사한 더미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순간, 경탄은 곧 공포로 변한다.
이 그림은 로마의 문제적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연회장 천장을 열어 엄청난 양의 꽃잎을 쏟아부어 손님들을 질식시키는 잔혹한 유희를 즐겼다.
사실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이 권력의 본질을 너무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은 종종 아름다움의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
이 그림에서 폭력은 칼이나 피가 아니라 장미로 표현된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것, 누구나 좋아할 법한 것이 순식간에 살의를 띤다.
쾌락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지만, 그것이 정도를 넘는 순간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폭력으로 변질된다.
황금빛 로브를 걸치고 높은 단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황제의 표정은 기이할 만큼 평온하다.
그는 즐긴다기보다 되레 지루해 보인다.
타인의 생사는 그저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줄 일회성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다.
권력은 잔혹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의 탐욕에만 몰두할 때 붕괴한다.
결국 엘라가발루스 역시 성난 근위병들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은 차가운 강물에 버려졌다.
비뚤어진 권력은 언제나 그렇게 허망할 만큼 비참한 말로를 맞는다.
장미는 본래 아름다움과 사랑의 상징이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죽음의 도구로 사용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권력자가 뿌리는 장미의 향기가 공동체를 질식시키는 악취로 변하고 있지는 않은지, 현실을 가린 화려한 꽃비가 곧 들이닥칠 파국의 전조는 아닌지.

쇼트폼과 칼럼

| 신새벽 민음사 편집자쇼트폼 중독이 사회 문제다.
쇼트폼은 이름처럼 짧은 영상이다.
인간의 주의를 빼앗아가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한번 들어가면 어이쿠, 그만 봐야지 하고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발표한 ‘2025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3~69세 한국인 중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이 22.7%인데, 이들은 일반 사용자에 비해 유튜브 쇼츠, 틱톡, 인스타 릴스 등 쇼트폼 플랫폼을 더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쇼트폼을 안 보려고 노력한다.
쇼트폼 아니더라도 스마트폰 중독 상태다.
그러다 쇼츠에 출연을 하게 되었다.
중독의 온상으로 보였던 쇼츠는 과연 간편한 형식이었다.
보도자료, 서평보다 빠르고 멀리 간다.
3분 남짓한 영상이라 준비 시간부터 길지 않다.
마케터에게 섭외 메일을 받고 무슨 이야기를 할지 잠깐 고민하고 수락했다.
봄에 읽기 좋은 책을 손에 들고 카메라 앞에서 두세 마디 말하자 잘 편집되어 곧 공개되었다.
쇼트폼의 위력은 보는 사람만이 아니라 나오는 사람에게도 강력했다.
내가 나온 영상이 조회수와 ‘좋아요’와 댓글을 얼마나 기록했는지 자꾸 확인하게 되었다.
급속도로 퍼지는 게 기분이 좋고 홍보 효과도 뿌듯한데 가장 중독적인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봐주고 반응하는 댓글이다.
한두 개를 볼 때는 다들 너그럽구나, 하고 점잖게 거리를 두다가 또 없나, 하고 갈급해진다.
새 댓글을 확인하러 들락거리느라 긴 호흡이 필요한 당면 과제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새로운 매체가 지옥문을 열고 만 것인가?나 때는 ‘책의 사생활’ 코너에 신간 이야기를 써서 회사 블로그에 올리는 게 홍보였다.
코너 이름이 사생활이지만 완전히 사적인 이야기를 쓸 수야 없고 공식 정보만으로 채울 수도 없었다.
이번 책은 정말 쓸거리가 없다며 편집자들은 괴로워했다.
원고를 쓰면서 뜻밖에 예리해지기도 했다.
동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엿볼 수도 있었다.
쇼트폼 시대에 돌아보니 그때 쓴 것은 일종의 칼럼이었다.
칼럼도 쇼트폼 아닌가. 신문 지면에 ‘기둥’처럼 자리를 차지한 데서 유래한 칼럼(column)은 애초에 길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다.
취재 기사보다 짧고 글쓴이의 개성이 또렷했다.
사설과 달리 외부에서 받았고 외부에서 오기에 의견이 다양했다.
20세기에 칼럼은 다양성의 공간이었다.
뉴미디어 시대에 오자 글이라는 속성 때문에 신문은 책과 같은 편이 됐다.
요즘 칼럼니스트들은 독서율 저하로 사고력이 위기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고는 미디어의 확장 속에서 가능하다.
<미디어의 이해>에서 마셜 매클루언은 미디어를 “감각과 기능의 외부 확장”으로 정의한다.
“책 지향적인 사람들은 미디어를 끊임없이 사용하는 것을 품위 없는 일”로 여기지만, “우리는 눈과 귀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동기로 미디어를 사용한다.
”텍스트 매체가 힘을 잃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철학자 김용석은 칼럼의 어원을 성찰하면서 고대 유적지에 남아 있는 돌기둥처럼 칼럼은 미래에 남으리라고 썼다.
“의지대로 되지 않는 운명임을 깨닫는 비극적 품위를 잃지 않으면 된다”니 이 또한 미디어의 이해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자

inG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행복

댓글 쓰기

Welcome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