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근정전 앞에 선 조재량 대목장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25년 만의 탄생, 조재량 궁궐 국가무형유산 대목장
지난해, 25년 만에 새로운 국가무형유산 대목장이 탄생했다.
조재량(62) 궁궐 건축 대목장이다.
이로써 전통 궁궐 건축의 기문(技門,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며 형성된 가문) 계보가 이어지게 됐다.
당대 최고 장인이 지은 유산, 왕조의 역사가 살아 있는 궁궐 복원 수리의 최고 권위자 조재량(62) 대목장을 만나봤다.

조재량 대목장이 근정전 앞 근정문의 기둥을 바라보며 설명하고 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대부분 힘들어 떠난 자리
조 대목장이 신응수 전 대목장 보유자 문하로 입문한 건 30년
전인 1996년이었다.
그의 나이 서른 초반, 작업장엔 또래 젊은이가 거의 없었다.
들어와도 쉬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작업자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낮엔 일하고, 밤엔 연장을 만들던 고된 일의 반복. 그러나 그는 힘든 줄 몰랐다.
새로운 걸 배운다는 기쁨이 더 컸다.
“밤엔 좋은 쇠를 골라 연장을 직접 만들었어요. 좋은 연장은
비싸고 귀했거든요. 예리하고 날렵한 연장을 만들 때 정말 신났습니다.
쇠의 반발력을 이겨내고 나무를 정확히 내리찍어 자를 때의 쾌감이 있었죠.”

그가 부편수로서 처음으로 맡아 복원한 건청궁 곤녕합의 옥호루 앞에 섰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궁궐 보수에 참여한 지 10년, 실무를 맡아 복원하는 부편수가
되어 처음 마주한 곳이 명성황후의 처소인 건청궁이었다.
건청궁 내 곤녕합에 딸린 누각인 옥호루가 바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비극의 장소였다.
그러나 경복궁의 다른 건축물과 달리 유독 남아 있는 사진이 없었다.
워낙 민감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 몇 장을 정밀 판독해 복원해냈다.
“어느 날, 복원 작업을 하다 밖을 나오니 향원정에서 행사가
열리더군요. 명성황후 추모행사였습니다.
기분이 묘하더군요. 그렇게 그 장소는 다시 세상에 나왔습니다.”
조 대목장은 복원 과정에서 경복궁 월대에 설치됐던 석조물을
처음 발견하기도 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시신을 불태운 장소였던 녹산에서였다.

녹산에서 그가 처음 발견한 난간
석주가 세워져 있다.
월대는 3년 전 복원됐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복원 공사 차량을 녹산에 주차했었죠. 어느 날 차를 세우는데
뭔가 바퀴에 ‘탁’ 걸리더군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내려서 살펴보니 바닥에 돌이 살짝 나와 있었습니다.
모양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불러 흙을 파봤죠. 동자주였습니다.
사람 모양처럼 생긴, 어도에 세웠던 난간 석주였어요.”
발견 이후 본격적인 발굴 조사 작업이 시작됐고, 그곳에서 일제강점기에
철거됐던 월대 난간 석주가 다수 발견됐다.
그가 최초 발견한 건 3년 전 복원된 월대 오른편에 세워져 있다.
야무진 손끝에서 나온 자신감
조 대목장이 나무를 다룬 건 어릴 적부터였다.
그가 나고
자랐던 진도군 조도면은 대부분 자급자족해야 했던 섬마을이었다.
9남매 중 여덟째였던 그는 유난히 손끝이 야무졌다.
“목수가 꿈은 아니었지만, 직접 대나무를 깎아 팽이나 칼자루를 만들면 솜씨가 좋다는 칭찬을 늘 들었죠. 그러다 보니 목수를 하면 남들보다 훨씬 잘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막연한 자신감은 인생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차피 하게 될’ 목수라는 직업을 인생의 가장 마지막 순서로 미뤄둔 것이다.
“너무 일찍부터 목수를 시작하면 아무것도 못하고 나무만 만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젊을 때 하고 싶은 걸 다 하기로 했죠.”
군 제대 후 학습지 영업맨으로 1년간 바짝 일해 번 돈으로 인도로
떠났고, 그곳에서 만난 음악 평론가와 동업한 음반 사업으로 한때 호황을 누렸지만 MP3가 나오면서 사업을 정리했다.
이후 거처를 옮긴 경상북도 상주 속리산의 노후한 시골집에서 그의 목수 생활이 시작됐다.
“새로 짓는 게 나을 만큼 낡은 집이었죠. 그때 신문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하던 분들이 한옥을 짓는 ‘우리 살림집 짓기 운동’을 한다는 소식이었죠. 배우고 싶은 마음에 충북 청원군으로 당장 달려갔습니다.”
그해 그는 문화재보호재단에서 운영하는 ‘공예건축학교’에서
1년간 한옥 모형을 만들며 배웠고, 이듬해 경복궁 대규모 복원 공사 현장에 뛰어들었다.
고도로 정밀한 궁궐 복원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건축물. 나라의
문화유산인 궁궐을 복원하고 수리하는 일에는 많은 책임감이 따른다.
“궁궐은 일반 살림집과는 위계가 완전히 다릅니다.
부재의
크기도 압도적이지만, 일하는 방식이 고도로 정밀합니다.”
나무에 선을 그어 재단할 때, 궁궐 건축에서는 대나무를 깎아
칼처럼 만든 ‘먹칼’을 사용한다.
두께가 불과 0.1~0.2mm인 선을 두고 철저히 계산해야 한다.
“선을 없애는 것을 ‘죽인다’, 선을 남겨두는 것을 ‘살린다’고 표현하는데, 조립할 때 너무 빡빡하지도 헐렁하지도 않게 하려면 어떤 선을 죽이고 어떤 선을 살려야 하는지 엄격한 원칙을 몸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살려야 할 선을 죽이면, 거대한 나무 전체를 통째로 버릴 수도
있다.
어렵게 구한 귀한 나무가 선 하나로 잘못될 수 있기에, 그는 혹시 놓친 빈틈은 없는지 ‘끊임없이 되짚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혹시 잘못 보진 않았나 끊임없이 다시 점검하죠. 그래도
실수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태원전 행각 공사 때, 기둥 160개 중 3개를 잘못 팠죠. 엄청 혼이 났습니다.
궁궐 건축에서 실수는 있어서는 안 되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 실수를 마음속 깊이 품고, 다음 작업할 때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칩니다.
그런 신중함과 강박이 결국 완벽함을 만드는 거니까요.”
실수를 하더라도 자기비난에 빠지는 대신, 더 나은 방향으로
에너지를 빠르게 전환한다는 게 그만의 노하우다.
완벽하게 구현된 건축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람’보다는 ‘당연함’을 느낄 정도이다.
“집을 짓고 공간을 만드는 사람은 스스로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곤란해집니다.
작가 정신을 지나치게 내세우다 보면, 은연중에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스며들기 때문이죠. 건축가는 자기를 낮추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공간에 살 사람들을 위해 나의 재능을 온전히 빌려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장인의 태도이자 건축의 본질이죠.”
웅장한 예술 작품을 일궈내는 장인의 손끝은 섬세해야 하지만,
나무를 다스리듯(治木)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더 치열하고 엄격한 일이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그치며 살아온 시간 때문일까, 마주한 그의 눈빛은 정련된 쇠처럼 단단하고도 예리했다.
인류 초상 최고의 걸작 ‘아가멤논의 가면’

기원전 16세기 미케네에서 출토된, 이른바 ‘아가멤논의 가면’이라 불리는 황금 데스마스크 | 퍼블릭 도메인
고대 세계가 남긴 위대한 유산이 반드시 거대한 건축물이나
기념비적인 조각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작고 내밀한 예술 작품 하나가 시공을 초월해 인류를 매료시키기도 한다.
기원전 16세기, 미케네의 장인이 순금을 정교하게 두드려 만든 한 점의 장례용 마스크가 바로 그렇다.
비록 고고학적 오류에서 비롯된 이름이지만, 이 유물은 전
세계에 ‘아가멤논의 가면’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더불어 호메로스가 노래했던 영웅주의, 전쟁의 참혹함, 사랑과 비극이라는 인류의 오래된 정신적 유산을 다시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미케네의 찬란한 황금빛 유산
후기 청동기 시대를 장식했던 미케네인(기원전 1600년경~1100년경)들은
수 세기 동안 그리스 세계를 지배했다.
펠로폰네소스반도 동북부에 둥지를 틀었던 이들의 영토는 전사(戰士) 왕들이 통치하는 일종의 봉건 제도로 조직되어 있었다.
우리가 쓰는 ‘미케네’라는 명칭 역시 이 문명에서 가장 거대하고 견고했던 요새 궁전인 미케네 성채에서 유래한 것이다.

(좌) 시각장애인 시인 호메로스의 흉상.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기원전 2세기 헬레니즘 시대 원작의 로마 시대 모조품 | Roman Belogorodov/Shutterstock
(우) 독일의 사업가이자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의 초상(1866~1890년경) | HeidICON/CC-BY-SA-4.0
문명의 정점에서 미케네인들은 지중해 전역을 무대로 활발한
무역을 펼쳤고, 사나운 전사로 명성을 떨쳤으며, 고도의 석조 건축 기술을 선보였다.
서구 문학의 주춧돌을 놓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집필한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배경이 바로 이 미케네 시대다.
호메로스는 이 문명을 ‘황금이 풍부한 곳’으로 묘사했으며,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고향으로 돌아와 참혹하게 살해당한 아가멤논 왕이 다스리던 땅으로 기록했다.

청동기 시대 미케네 성채의 정문인 ‘사자의 문’ | Artem Kniaz/Shutterstock)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깊이 매료되어 그것이 단순한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라 굳게 믿었다.
그는 오늘날에도 널리 인정받는 튀르키예 히사를리크 언덕을 발굴해 호메로스 속 트로이를 세상에 알리며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몇 년 뒤인 1876년, 슐리만은 마침내 미케네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원형 무덤군 A’로 명명된 부유한 왕가의
무덤을 발견했다.
이 매장지 안에는 고대의 유골과 함께 장신구, 정교하게 장식된 무기, 귀금속으로 만든 잔 등 호화로운 부장품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섯 점의 황금 데스마스크가 고요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눈부신 보물들은 현재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영웅의 풍모를 담은 최고의 걸작
출토된 가면 중 가장 정교하고 독특한 세부 묘사를 자랑하던
한 점을 보고 슐리만은 감격에 겨워 외쳤다.
“내가 아가멤논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 극적인 선언 이후 유물은 ‘아가멤논의 가면’으로 굳어졌으나,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이는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가면의 제작 시기(기원전 16세기)와 실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시기(기원전 13세기) 사이에는 무려 300년이라는 시간 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케네 유적지에 위치한 ‘원형 무덤군 A’와 성채의 정문(왼쪽) | Andreas Trepte/CC-BY-SA-2.5
그럼에도 ‘아가멤논의 가면’이 뿜어내는 군주의 풍모는
압도적이다.
잘 다듬어진 수염과 위로 말려 올라간 콧수염, 오뚝한 코와 높은 광대뼈, 얇은 입술을 가진 넓은 입, 그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아몬드 모양의 눈매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귀 근처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은 고인의 머리에 가면을 고정하기 위해 끈을 묶었던 흔적이다.
고대의 장인은 금판 뒷면을 두드려 앞면에 양각 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레푸세’(돋을새김) 기법으로 이 걸작을 완성했다.

금판 뒷면을 두드려 입체감을 살리는 ‘레푸세’ 기법으로 제작된 이른바 ‘아가멤논의 가면’(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 Viacheslav Lopatin/Shutterstock
아가멤논이라는 이름은 호메로스의 시와 기원전 5세기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를 통해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신화 속 왕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여전히 증명되지 않았고, 슐리만이 발견한 것 역시 아가멤논의 진짜 무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오늘날 미케네는 ‘영웅의 시대’를 눈으로 확인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매혹적인 성지가 되었다.
그 중심에는, 손바닥만 한 황금판 위에 고대 인간의 정체성과 영혼을 가장 밀도 있게 응축해 낸 최고의 걸작 ‘아가멤논의 가면’이 빛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