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관리에만 목숨거는 것, 과연 좋은 삶일까

나쁜 삶의 기술 l 로베르트 팔러 지음, 나유신 옮김, 사월의책(2024)

나쁜 삶의 기술 l 로베르트 팔러 지음, 나유신 옮김, 사월의책(2024)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철학자 로베르트 팔러는 ‘나쁜 삶의 기술’에서 우리가 항상 이 질문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스스로에 대한 온갖 강박과 완벽주의에 시달리는 우리네 삶에서, 이 질문은 “숨 쉴 공간과 평온함과 신중함을 준다고 강조한다.
우리 삶은 가치 있을까? 그렇다면 왜 가치가 있는 걸까?

팔러는 현대 사회의 풍경을 이렇게 진단한다.
사람들은 더 건강하게, 더 오래, 더 안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갇혀 있다.
모든 행위가 효율과 비용 절감의 기준으로 평가되고, 작은 기쁨조차 죄책감으로 덮인다.
우리 사회의 언어로 번역한다면, ‘저속 노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집착으로, 혹은 매일 ‘갓생’ 살고, 짠테크와 투자로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옭아맨다.
우리는 돈, 건강, 자기 관리만을 쫓느라 삶에 대한 진정한 감각은 잃고 있다.

그러면서 금욕과 자기검열은 미덕이 되고, 웃음과 낭비는 무가치하거나 비난받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삶을 지키려는 태도가 오히려 삶의 가치를 지워버린다.
단순히 안전하게 오래 사는 것만으로는 그 어떤 의미도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오히려 부담감을 불러일으켜, 반작용처럼 우리를 쇼츠나 릴스, 에스엔에스(SNS) 중독에 빠트린다.
삶은 거대한 중압감과 도피라는 두가지 축으로만 채워진다.

그렇다면 삶은 언제, 어떻게 가치 있게 되는가? 팔러는 이 질문에 대해, 우리가 억눌러온 감각과 잉여를 회복할 때라고 답한다.
불필요해 보이는 낭비와 사소한 기쁨 속에서, 웃음과 향유의 순간 속에서 드러난다.
그는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계산되지 않는 순간이라고 강조한다.
친구와 함께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행위, 무심코 흘러나오는 웃음 같은 것들이야말로 삶을 살 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팔러가 말하는 가치 있는 삶이란, 금욕과 성과의 집착을 벗고 우아함과 관대함, 허비와 향유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에 있다.
때로는 낭비해도 좋고, 웃을 수 있고,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순간 속에서 삶은 비로소 아름다워진다.
소진과 늙음, 죽어감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우리는 삶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더 동안인 얼굴, 조금이라도 더 천천히 늙는 식단, 재테크를 통한 자산 축적을 통한 비싼 동네 아파트, 외제차, 명품 가방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이 모든 설계 과정은 우리를 ‘더 좋은 삶'으로 인도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여정 자체를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오늘을 있는 그대로 누리는 여유와 자유의 기쁨은 사라진다.
강박적인 시간의 틈에서 누리는 스마트폰 속 자극적인 영상들만이 겨우 남은 쾌락들이다.

건강 관리도 좋고, 재산 축적도 중요하지만, 과연 그러한 일들이 우리 삶을 오히려 잃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는 여유도 가져보면 좋을 듯하다.
그 마음의 힘은 “사는 것이 왜 가치 있는가?라는 마법의 질문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기억해 보자. 그러면 의외로 잠시 오늘의 계획을 멈추고, 내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어질 수도 있다.
가치 있는 삶을 위해 기꺼이 이 오늘을 허비하고 싶을 수 있다.

사생결단 안 해도 되는 삶을 위하여

정지우의 책과맥주

거리의 현대사상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지수 옮김, 서커스(2019)

거리의 현대사상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지수 옮김, 서커스(2019)

어째서인지 삶이 잔잔하고, 큰 자극이 필요한 건 아닌데, 약간 즐겁고 싶을 때 나는 우치다 다쓰루를 읽는다.
비교적 최근에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다작가라 저서가 100권은 넘는다.
우리나라에도 그의 저서 상당수가 번역이 되어 있는데, 어떤 책을 읽든지 ‘신선한 사고’를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작가다.
읽을 때마다 그런 경험을 주는 작가란, 정말이지 드물다.

그의 책을 대부분 좋아하지만, 최근에는 그가 20년 전에 쓴 ‘거리의 현대사상’을 집어 들었다.
20년 전 책이라고 해서, 고리타분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애초에 진지하게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 일상에서 길어 올리는 온갖 사유들이란, 좀처럼 고리타분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거리의 현대사상’은 일상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한 내용으로 채워진 책이다.
거의 모든 소재들이 흥미롭지만, 며칠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구절이 있다.

“‘결단’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완전히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과거에 한 행동이 청산되는 일이다.

인생에서의 결단이란 대개 ‘미래가 열리는’ 일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결단이란 역시 미래보다는 과거와 관련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느 날, 회사를 퇴사하기로 결단한다면, 내게 어울리지 않는 회사에 너무 오래 다닌 결과를 ‘청산 받는’ 일인 셈이다.

“이제껏 몇번이고 결정적인 국면에서 판단을 잘못해 온 사람 앞에는 결단을 재촉하는 갈림길이 자꾸만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양자택일 가운데 절실히 결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면, 우리는 잘못 살아온 것이다.
오히려 올바른 선택을 계속해 왔다면, 그런 ‘사생결단’의 상황을 마주하기 전부터 그저 자연스럽게 삶은 변화해 왔을 것이다.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은, 잘못된 선택들을 누적하며 망설인 결과라는 것이다.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내 삶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던 결혼은 어느 날 이루어졌다.
몇번의 이별들을 경험하며, 이제는 그만 안정적인 관계로 들어서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아내를 만났다.
나의 마음도 매일 그런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은 딱히 ‘사생결단’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퇴사도 비슷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나는 퇴근 이후나 주말이면 늘 글을 쓰거나 일회성 강연을 다니기도 하며 회사 바깥에서의 삶에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 회사에서 마음이 떠나고, 회사 바깥의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하자, 큰 결단 없이 회사는 그만두게 되었다.

“이제껏 올바른 결단을 쌓아온 사람 앞에는 결단을 망설일 만한 양자택일의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매일 ‘올바른 선택들’을 잘 쌓아간다면, 우리에게 사생결단을 망설이게 할 상황은 오지 않는다.
이 말은 역으로, 그만큼 우리가 오늘의 작은 선택들에 섬세하게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니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 전에, 매일 올바른, 작은 결단들을 쌓아가자. 어쩌면 오늘 오후 가볍게 공원을 달리고, 늦은 밤 우치다 다쓰루를 꺼내어 읽는 일도 그런 ‘올바른 오늘의 결단’에 속할지 모른다.

또다른 라퓨타에 사는 우리들

정지우의 책과 맥주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2019)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2019)

많은 사람들에게 ‘라퓨타'라는 이름은 지브리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라퓨타는 사실 300년 전에 쓰인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처음 등장한 나라 이름이다.
걸리버는 ‘소인국' 여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후 거인국을 거쳐 천공의 나라인 라퓨타까지 여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 원래 라퓨타의 설정이 사뭇 흥미롭다.
라퓨타 사람들은 수학, 음악, 천문학 등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현실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항상 일종의 관념적 공상에 사로잡혀 있다.
흥미로운 건 그들은 현실감각이 극도로 사라져 버린 나머지, ‘치기꾼'이라는 존재 없이는 주변 사람들과 대화조차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치기꾼'은 라퓨타인들이 대동하고 다니는 일종의 하인이다.
이들은 라퓨타인들 사이에 대화가 필요할 때마다, 주인을 방망이로 때려서 정신 차리게 만든다.
그러면 간신히 사람들은 공상에서 벗어나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대화를 할 수 있다.

이 장면을 읽고, 아무래도 우리 시대의 풍경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기에, 지하철에서 타인과 눈 마주칠 일도 드물어졌다.
길을 다니면서도, 저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어 부딪히는 경우도 생긴다.
가족끼리도 서로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 각자 스마트폰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도 많다.

재밌는 것은 라퓨타를 ‘천공의 섬'이라고 부르듯, 우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접속하는 세계도 ‘클라우드'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치 현실이라는 땅을 두고도, 항상 클라우드 세계, 말하자면 구름 위의 온라인 세계 속에 살아가는 셈이다.

지상을 버리고 하늘로 간 라퓨타인들은 지상을 폭력적으로 지배하면서, 저항하는 곳이 있으면 가서 섬을 내려 앉히는 방식으로 파괴한다.
자신들만이 옳다고 믿는 절대권력 속에 있는 셈이다.
현대인 또한 알고리즘에 의해 강화된 자기 입장, 자기 취향 속에 갇혀 ‘타자의 입장'이라는 것을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있다.
에스엔에스(SNS)에는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만 노출되고, 유튜브도 내가 좋아할 만한 영상만을 추천한다.
극단화되는 대립과 각자만의 세계 속에서 타자에게서 ‘유리'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우리는 역시 라퓨타인을 닮았다.

라퓨타인의 또 다른 특성은 ‘끝없이 불안'해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천문학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절대권력을 가지고도 언제 혜성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이 또한 어쩌면 우리를 닮았다.
그 어느 시대보다 풍요로운 문명을 이룩했지만, 우리는 더 많은 불안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남들에 비해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 벼락거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직장을 잃거나 사회적 나락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걱정 등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우리 또한 현실의 진짜 관계와 감각들로부터 유리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라퓨타인들처럼 우리는 현실을 직접 살아낼 힘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도 이 손 안의 구름 너머에도 반드시 마주해야 할 땅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땅 위의 누군가는 나의 한 마디 인사와 눈맞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가끔은 방망이로라도 일깨워야 할 입장인 것이다.

정지우 작가·변호사

 

삶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의학 

김준혁의 미래 의료인을 위한 책장

한강 ‘채식주의자’ 속 병원과 의학

영혜 살려내지만 기존 질서를 강요

당혹과 좌절 수용해야 인간적 의학

역사 화가 토니 로베르플뢰리(1837~1911)가 프랑스 파리의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원에서 병자들을 족쇄에서 풀어주는 정신과 의사 필리프 피넬을 그린 그림. 이처럼 환자를 한꺼번에 모아 치료하는 방식이 근대 병원의 출발점이었다.<BR> 위키미디어 코먼스

역사 화가 토니 로베르플뢰리(1837~1911)가 프랑스 파리의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원에서 병자들을 족쇄에서 풀어주는 정신과 의사 필리프 피넬을 그린 그림. 이처럼 환자를 한꺼번에 모아 치료하는 방식이 근대 병원의 출발점이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미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이니만큼, 그의 작품 중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작품보다 ‘채식주의자’를 여전히 애정하는데, 그것은 다른 작품(예컨대 ‘소년이 온다’와 같이 역사의 아픔을 담은 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의학적 소재와 구조 때문이에요.

기억하시는 것처럼 작품에는 갑자기 고기를 먹지 않게 된 여성 영혜가 등장합니다.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꿈을 꾼 다음부터 사람이 바뀐 것처럼 고기를 집에서 모두 치워버리지요.
남편은 이런 영혜를 부담스럽게 느끼게 되고, 결국 가족 모임에서 사달이 납니다.
아버지가 영혜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게 하려고 다른 가족에게 영혜를 붙들라고 하고 입에 고기를 넣는데, 영혜는 고기를 뱉은 뒤 자해를 하지요.
영혜는 병원에 입원하지만,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본 남편은 영혜를 떠나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영혜는 식물이 되려고 하지요.
영혜가 꽃이 되는 꿈을 꾸고 식물의 생산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두번째 단편 ‘몽고반점’을 지나, 세번째 단편 ‘나무 불꽃’에 도달하면 영혜는 이제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서 아무것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병원에선 억지로 그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정맥관을 통해 포도당 등을 공급하지요.
하지만, 정맥을 찾는 데 한계에 이르자(정맥 주사를 하면 그 혈관이 망가져서 다른 정맥을 찾아서 주사를 해야 하는데, 피부 근처에서 쉽게 닿을 수 있는 정맥의 수는 한정되어 있어서예요) 병원은 영혜에게 콧줄을 연결하려 해요.
콧줄이란 코를 통해 위로 직접 넣은 관으로 음식을 주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혜의 거친 반항으로 이마저 실패하자, 시골 병원은 그를 더 볼 수 없다며 큰 병원으로 전원시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지요.

소설에서 고기 또는 육식으로 대표되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라고 여러 글에서 논의한 것 같아요.
남성, 폭력, 타인을 해쳐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동물적 본능을 벗어나려 여성, 거부, 식물 되기를 선택하는 주인공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채식주의자’를 읽는 접근은 크게 틀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짧게 정리한 이야기에도 몇 번이나 의학과 병원이 등장한다는 점이 저의 관심을 끕니다.
그렇다면 의학의 역할은 작품에서 무엇일까요? 의학이 영혜를 살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영혜의 삶, 의학적 개입 없이는 유지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영혜를 위한 것인가, 라고 생각해 보면 갸우뚱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대 의학이라는 실천과 제도는 사실 등장한 지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현대 의학이 등장하게 된 중요한 계기로 산업화와 도시화를 꼽을 수 있지요.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으려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도시 빈민층을 형성했고, 끔찍한 거주 환경에 어쩔 수 없이 갇혔어요.
그리고, 그런 환경은 수많은 병을 낳았지요.

국가는 이런 환자들을 놓아둘 수 없었어요.
근대 국가로 돌입하던 시대, 노동력이 곧 국력이 막 되기 시작하던 시점에 질병으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환자를 모아서 치료하는 공간을 마련하게 됩니다.
구빈원(또는 수용소), 곧 근대 병원의 출발점이었지요.

이런 장소적 구분이 왜 중요할까요? 치료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가 중세와 근대의 의학을 나누기 때문이에요.
중세 의학은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왕진을 기반으로 했지요.
의사는 개별 환자의 환경적 특징(지금이라면 행동·사회적 특성이라고 부를 거예요)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고자 했어요.
반면, 근대에 들어서면서 환자들은 어디서 살고 무슨 일을 했는지와 무관하게 같은 장소, 병원에 모였습니다.
이제 의사들은 환자를 환경이나 지역이 아닌, 지금 나타내는 신체·정신적 특성에 따라 그들을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명씩 보는 게 아니라, 수백명씩 환자를 보려니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지요.
그리고 그들 집단에 대해 효과를 나타내는 치료법을 시도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현대 의학의 초엽, 18세기 말의 병원 풍경입니다.

이 모든 것은 좋은 치료를 위한 약속이었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실제로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냈어요.
특히, 두 세계 대전은 엄청난 수의 생명을 앗아갔지만, 한편 그중 일부를 구할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의학이, “의과학이 당연한 시대가 우리를 찾아왔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놀라운 결과 앞에서 자꾸 그것이 무엇에서 나왔는지를 잊곤 합니다.
현대 의학의 출발점은 구빈원, 빈자들을 모아 집단으로 관리하려 했던 국가적 수용 방식이라는 사실을요.
이 지점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긴 했어요.
이들은 현대 의학이 사실 겉보기만큼 좋은 게 아니라, “살려만 놓는 국가의 강제적 기술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이런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습니다.
이 비판은 너무 무뎌서 세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심지어 부분을 억지로 끼워 맞춰야만 현실을(심지어 과거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당장 이런 논의는 환자와 의료인들 각자가 기울인 다양한 노력을 무시하고 하나의 단일한 장치(“생명 유지 기계)로 의학을 설명하려 하지요.
그러다가 안타깝게도, 비슷하지만 현실에는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문제 제기가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닐 거예요.
무엇보다, 현대 의학이 여전히 권력과 강압을 개인에게 주입하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생각은 틀리지 않지요.
한편 의학 없이 우리는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의학은 은근슬쩍 우리에게 기존 질서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활용됩니다.
‘채식주의자’에서 의학이 작동하는 방식이 그런 것처럼요.
영혜는 의학 없이는 바로 죽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의학 때문에 영혜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가부장과 폭력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지요.

당연한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소설의 삼면화(세 개의 그림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것)적 구성은 그를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되기도 해요.
크게 소설이 동물적 생명에서 식물적 생명으로, 타자를 해치지 않는 삶으로 건너가려 몸부림치려 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배경에서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 강제의 방식(응급실)이던 의학은 마지막에 도와주려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어 하는 당혹의 형식(시골 정신병원)으로 바뀝니다.
현대 의학이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자랑한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생의 미로 앞에서 당혹하고 좌절하지요.
그리고 그 당혹과 좌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의학이 조금 더 인간적으로 바뀔 방식이라고 ‘채식주의자’는 넌지시 말하고 있습니다.

김준혁 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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