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에 대해 말하기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

‘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다.’(수전 손택)타인의 질병을 우리 몸으로 직접 아파할 수 없기에 그 고통을 상상하고 무언가에 빗대어 질병을 추측한다.
일종의 은유처럼. 손택은 에세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암에 대한 은유들을 지적했다.
여기서 은유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질병을 바라보는 사고의 틀이다.
손택은 질병에 대한 은유가, 즉 질병을 두고 사람들이 상상하는 방식이 어떻게 질병을 왜곡하는지, 그로 인해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을 왜곡하는지를 말한다.
우리는 어떤 질병에 대해 가지는 통상적인 생각이 편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누가 중병에 걸렸다면 뭔가 병들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성격이나 습관이 원인이라는 단정. 그 병은 으레 어떤 병이라는 편견, 심지어 질병을 잘못 살아온 환자의 탓이라거나 질병은 인과응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은유는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다.
암 환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는 통상적인 시각과 환자에게 씌운 이미지를 손택은 비판하고 걷어내고자 했다.
암은 불행일 뿐이고 환자는 아플 뿐인데. 환자는 질병뿐 아니라 타인의 시선 때문에도 아프다.
손택이 글을 쓴 지 40여년 뒤 한 작가가 손택의 글에 자신의 의견을 보탠다.
유방암 환자였던 앤 보이어는 자신의 책 ‘언다잉’에서 보편적인 암 환자들이 아니라 개별적 암 환자를 이야기하자고 한다.
손택이 암에 대한 은유를 걷어내고 환자들의 고통에 대해 말했다면, 보이어는 질병의 이름으로 일반화된 환자들의 고통이 아니라 ‘바로 그 환자’의 고통을 말하고자 했다.
고통은 암 환자의 몸속에 있는데 고통이 환자의 몸을 떠나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암을 말하곤 한다.
“이 암은 주로 어떠어떠합니다.
여기에서 ‘당신’은 빠져 있다.
‘언다잉’에서 보이어는 자신의 유방암, 자신의 투병기,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질병의 이름 앞에 자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자신은 곧 몸이다.
암은 추상적 질병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다.
보편적 고통이 아니라 개별적 몸의 사건이다.
개념으로 상상하는 고통이 아니라 몸으로 견뎌내는 고통이다.
암 환자를 우리가 가진 해석의 틀 속에서 바라보려는 시각, 그 환자도 전형적인 암 환자의 고통 속에 있으리라는 가정으로 인해 한 사람의 고통은 잊히거나 또는 가중된다.
우리는 똑같이 아프지 않고 각기 다르게 아프다.
유튜브의 시대는 미디어를 통해서 질병에 대한 은유가 생성되고 전파된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정보들로 고통을 해석한다.
미디어는 질병을 쉽게 이해하도록 인식의 틀과 정보를 제공한다.
질병은 추상화된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쉽게 공감하기도 한다.
손쉬운 공감과 피상적인 연민은 도리어 고통을 비하한다.
그들의 몸이 아픈 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아픔을 생각하는 대로 공감한다.
암 환자에게 대뜸 “긍정적 태도를 유지하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이런 말은 몸에 가닿지 못하고 몸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암에 대한 인식 개선을 명목으로 화려한 행사를 개최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데 얼마나 미숙한지 말해준다.
타인의 고통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고통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왜곡하는 은유를 걷어내고, 고통에 신중히 귀 기울이고, 고통의 획일화 속에서 차이를 찾아낸다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
말을 처음 배우듯 고통을 말하는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그것은 미디어 속 언어가 아니라 환자의 사연과 몸이 말하는 언어일 것이다.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

존중의 본질과 치유

오늘날 우리 사회는 존중이라는 가치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여야 갈등이 첨예하고, 세대 간에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비난이 앞선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교사에게 대들고, 교사는 교권 침해를 호소한다.
이런 현상의 밑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존중의 결여가 있다.
가장 간단한 해결법은 존중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다만 ‘존중한다’가 무엇인지 모르고, 실천이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 장애물이다.
상담에서는 도움을 청한 사람, 즉 내담자를 존중하고자 노력한다.
존중은 예의 바른 태도나 말투, 존댓말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담자가 내담자의 고유한 가치와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믿는다는 것이다.
내담자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그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담자가 있다’는 것은 내담자 스스로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기준을 세워 살아갈 수 있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상담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충고나 지시, 설득을 하는 순간 상담실에는 상담자만 존재하고 내담자는 사라진다.
내담자의 삶을 판단하고 방향을 정해주는 순간, 그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항상 지각하는 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대부분 사람은 “계속 지각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등의 말로 염려를 표현하고 고치려 노력한다.
이런 염려는 “성실하게 사는 게 더 낫다는 상담자의 판단을 내담자에게 암시하거나 강요하려는 시도다.
이는 내담자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가 더 나은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다.
내담자를 존중하는 인간중심 상담자는 “너에게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구나라고 반응한다.
내담자 기준에서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행동을 바꾸려 하기보다 그의 기준을 존중하는 것이다.
내담자의 문제를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하나의 특성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행위다.
존중은 각자 자기의 세계에서 자기답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인정할 때, 즉 그의 존재 가치를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려 하거나, 더 나은 길이 있음을 알려주려 하거나, 자기 뜻을 따르라고 설득하는 것은 모두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다.
느림이나 빠름은 상대적 개념이다.
내가 더 느린 사람이면 내담자의 움직임은 빠른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자신의 판단 기준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의 속도를 느낄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방식과 속도로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느림은 ‘늦음’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중 한 시점일 뿐이다.
삶의 문제는 특정 순간에는 문제로 보이지만 인생 전 과정에서 바라보면 그 순간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때가 많다.
그저 존중만 하는 것이 내담자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과거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고통 겪던 내담자를 상담한 적이 있다.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용서하고 싶어 했다.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품고 있었지만 자신이 필요한 방향으로 살아가고자 했다.
상담자는 그의 감정과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했다.
그러자 내담자는 외적 조건이나 문제를 탓하기보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살아온 자신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자기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과 삶을 미워하는 대신 좋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문제에 매이지 않고 자기 존재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존중은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강력한 힘이다.
존재를 인정받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며 성장을 믿는 사람이 된다면 참 멋질 것이다.

승리보다 소중한 것

박수밀 고전학자·한양대 연구교수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이 한창이다.
선수들에게 한국시리즈는 1년을 결산하는 무대이자 한 시즌의 마지막 목표다.
정규 시즌의 피와 땀, 수많은 부상과 부진을 지나 단 몇 경기로 자신의 실력과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 간절함과 긴장감 속에서 선수들은 한 경기, 한 공, 한 타석마다 모든 힘을 쏟는다.
특히 9회 말의 역전 홈런이나 결승타는 승리한 팀에 짜릿한 감동과 환희를 안겨준다.
공이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터져 나오는 함성,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은 선수들의 눈물과 웃음은 승리라는 이름의 짜릿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기면 누군가는 반드시 진다.
카메라의 초점이 환호하는 선수들에게서 옮겨가면, 그 뒤편에는 고개를 숙인 투수와 망연자실한 패자의 얼굴이 있다.
분노한 팬들은 거친 비난과 욕설을 퍼붓고, 선수의 이름 앞에 패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얼마 전 미국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연장 11회 말, 한 투수가 어이없는 송구 실책을 저지르며 팀이 패하고 말았다.
시리즈를 끝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때 어깨를 떨군 투수에게 팀 동료들과 코치진이 마운드로 다가와 실수를 저지른 투수의 어깨를 두드리고 끌어안았다.
“우리는 함께 이기고 함께 진다.
동료들의 위로에는 비난보다 더 큰 아름다움과 품격이 있었다.
시리즈의 명운이 걸린 끝내기 실책 앞에서 팀 선수들은 동료애를 선택했다.
이 장면은 승자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세상에 생각을 던져준다.
인간 사회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갈라놓는다.
누군가 기뻐서 환호할 때, 누군가는 패배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누군가 합격하면 누군가는 탈락하고, 누군가 올라가면 누군가는 떨어진다.
세상은 승패로 실력을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준은 때로는 불완전하고 약하다.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잘 풀리는 것도 아니다.
실력이 있어도 실패하고 최선을 다했어도 넘어지는 경우가 있다.
종이 한 장 차이의 실력으로 승패가 갈리고 사소한 선택과 운이 승패를 결정짓기도 하는 건 비단 야구만의 일이 아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시험에 떨어진 사람도, 경기에 진 선수도 단지 그 순간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에게 노력이 부족했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패배한 선수도, 시험에 떨어진 사람도 모두 자신의 힘을 쏟아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 공 하나까지 힘껏 던졌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패배한 사람들도 이미 싸움을 완주한 이들이다.
오늘의 패배자는 어제의 영웅이었을 수도 있고, 내일은 승리자가 될 수도 있다.
패배의 짐을 짊어진 사람에게 보내야 할 것은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와 격려다.
아니, 패배야말로 인간을 성장하게 하는 내밀한 힘이다.
승자가 환호 속에 현재를 누릴 때 패자는 고통 속에서 내일을 준비한다.
패배의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부족함을 직시하고 더 깊은 성찰과 성숙으로 나아간다.
넘어져 본 자만이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알고, 고통을 견딘 자만이 인내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
인간의 삶에는 승리보다 더 많은 패배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패배의 시간이야말로 삶을 더욱 단단하게 단련시키는 담금질이자 새로운 시작을 만드는 디딤돌이다.
승리한 선수들과 함께 기뻐하는 장면도 보기에 좋지만 패배한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모습은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것이야말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인간적인 연대를 잃지 않는, 진정한 팬의 품격일 것이다.
스포츠의 가치는 승리의 영광에만 있지 않다.
패자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전하는 인간애와 동지애 속에 진정한 스포츠맨십이 깃들어 있다.
박수밀 고전학자·한양대 연구교수

댓글 쓰기

Welcome

다음 이전